우아함의 반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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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함의 반대말

2018-01-24T16:45:36+00:00 2018.01.25|

아침저녁으로 인스타그램에 코를 박고 있다가도 무시로 이 세계가 21세기적 스타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에 대한 호기심과 의심이 동시에 일곤 한다. 혹시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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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언서의 존재는 공고한 취향의 위계와 경계를 재편한다. 취향의 좋고 나쁨, 전문가의 자격 요건, 진짜와 가짜, 우아함과 천박함의 의미까지 다시 쓰며 21세기적 스타 탄생의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최근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후배이자 패션 컨설턴트의 인스타그램에서 흥미로운 그림을 발견했다. 피라미드 형식으로 인플루언서를 분류한 그림인데, 이런 식이다. 수백, 수십 명의 팔로워를 확보하고 있다면 나노 인플루언서, 천 명에서 수천 명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개인 인플루언서는 마이크로 인플루언서,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가입자를 거느린 페이스북, 블로그, 유튜브 운영자는 매크로 인플루언서, 그리고 연예인이나 셀럽으로 대변되는 메가 인플루언서.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인플루언서가 양적 판단의 근거를 넘어서서 취향, 전문성, 소통의 양적 판단 근거를 확보하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하여 ‘마이크로 인플루언서’가 대세라는 점, 그렇다면 어쩌면 팔로워 276명인 나도 노력하면 ‘마이크로 인플루언서’의 대열에 낄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었던 세상은 인플루언서와 아티스트 그리고 인플루언서의 잠재력을 가진 사람과 아티스트의 잠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토록 인간 본능에 충실한 매체가 또 있었을까?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이해하기 쉬운 것에 마음이 동하는 건 인지상정. ‘좋아요’는 있지만 ‘싫어요’는 없는 건 누구나 긍정적인 경험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관찰, 갈망,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을 타당하게 만들고 죄책감을 제거한다. 어쨌든 모든 욕망을 그러모아 반영한 이 영특한 매체는 취향이나 정체성 등을 통해 사회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견고하게 실현시킨다. 누구나 롤모델을 둘 수도, 될 수도 있는 세상에서.

‘인플루언서’,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건 누구도 얻지 못한 영광의 호칭이다. 블로거, 크리에이터, 에디터… 대부분의 호칭은 ‘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고, 어쩌다 ‘파워’가 붙는 경우라도 객관적으로 그들 자신에 대한 거였다. 하지만 인플루언서는 좀 다르다. ‘영향을 준다’는 건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음을 전제하고, 이 상호 관계성이야말로 요즘 스타의 자질이다. 어쩌면 인플루언서는 스타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스타(메가 인플루언서)도 인플루언서(마이크로 인플루언서)가 되고자 욕망하고 모방하는 흥미로운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저 그랬던 개그맨이 무엇을 무기로든 인플루언서가 되는 순간 예능 무대를 뛰어넘는 각종 분야에서 러브 콜을 받으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모습은 왕왕 목격된다. 모든 스타가 인플루언서일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인플루언서는 스타가 될 수 있다. “작은 차이에서 오는 나르시시즘은 그 부분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으면서도 서로 적대감을 느끼는 기반이 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 따위는 잊어도 좋을 정도다.

인플루언서들의 강력한 마력은 그 메커니즘을 파악할 사이도 없이 빨려 들어가게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남의 일상’을 관찰하느라 ‘나의 일상’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다 보면 무시로 떠오르는 의심 어린 궁금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좋아요’를 누르는 생체 혹은 심리적 시스템은 무엇일까?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17초라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 포스팅 하나를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초 남짓이라는 연구는 왜 안 나오나 모르겠다. 아니, ‘무언가에 대한 긍정적인 판단을 표현하는 능력은 1,000분의 1초 안에 작동한다’ 하니 더 빠를 것 같다. 어쨌든 명확한 답은 시기상조이지만, 나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은 발견할 수 있었다. <취향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톰 밴더빌트 같은 이 말이다.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진이 좋다는 의미일까? 사진을 찍은 방법이 좋다는 의미일까? 사진을 올린 사람이 좋다는 것일까? 혹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때문에 나의 선호도가 바뀌지는 않는가? ‘좋아요’를 누르지만 실은 싫어하고 있진 않는가? 뇌 속의 전기 충격이 ‘좋아요’를 누르는 손가락으로 전달될 때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는가? 연구에 따르면 인스타그램 사진에 얼굴이 있으면 호감도가 30% 증가한다고 한다. (성별, 연령, 인원수를 가리지않고 얼굴만 나오면 된다.) 자, 이 사실을 알고서 ‘좋아요’를 누르려니, 혹시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되진 않는가?”

톰 밴더빌트에게 어떤 사람이 인플루언서가 되는가 질문하고 싶지만, 아마 그는 백기를 들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플루언서가 멸망할 때까지 해결 못할 문제일 수도 있겠다. 예컨대 이 문제는 각종 브랜드가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팔로워 수 같은 양적 수치가 궁극적으로 판매 증진과 이미지 향상 등에 어떤 영향과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갖고 있긴 한 건가 혹은 누가 봐도 협찬인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솔직함과 접근 가능성이라는 인터넷 스타의 본취지와 과연 맞는가, 같은 근본적인 궁금증과도 일맥상통한다. 내 주변의 인플루언서들을 면밀히 살펴본 적도 있었는데, 매력 지수, 전문성, 재력, 미모, 사교력의 정도가 인플루언서의 충분조건이 될지언정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다만 인플루언서들을 관찰함으로써 이 시대가 어떤 재능, 미덕, 매력을 원하는지 짐작할 뿐이다. 결국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어떤 포스팅 혹은 어떤 인플루언서를 좋아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스스로 의심한다.

문득 정초에 만난 정서경 작가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는 사람이 작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군요. 작가란 세상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에요.” 그녀의 논리를 빌리자면, 결국 인플루언서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기억하는 것, 원래 좋아했던 것을 제시하는 사람인 걸까?

인플루언서를 탄생시키고 지지하는 세 글자, ‘좋아요’가 취향의 문제라 친다면, 공공연한 비밀처럼 전수되어온 공고한 취향의 위계와 경계를 무너 뜨렸다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둘러싼 ‘코페르니쿠스적 전이’라 할 만하다. 어떤 역사적 철학자도 정의하길 꺼렸던 취향의 문제를, 프랑스의 철학자 부르디외가 1979년 <구별짓기>라는 연구로 규정한 바 있다. 그는 ‘미학적인 소비와 일반적인 소비의 세상,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예술과 사람들이 먹고 구매하는 기본적인 쾌락을 구분하려는 칸트의 구분법’을 무너뜨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상류층은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일반인은 ‘푸른 도나우 강’을 좋아한다는 식의 계급과 취향에 대한 부르디외의 엄격한 ‘구별 짓기’는 이번 세기에 들어 다시 산산조각 났다.

요즘 인플루언서들이 ‘상업화된 힙스터’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건 이들이야말로 ‘관심의 대상이 되다’와 ‘영향을 주다’라는 문장을 일직선상에 놓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탁월한 미모만으로도, 혹은 탁월한 미모가 아니어도 인플루언서가 되는 건 가능하다. 취향의 좋고 나쁨 혹은 높고 낮음을 판단하다가는 꼰대 취급 받기 딱 좋다. ‘전문가’의 정의와 자격은 나날이 다시 쓰이는 중이다. 인플루언서는 그간 취향을 이야기할 때 신뢰한 나머지 간편하게 쓰던 이분법, 이를테면 우아함과 천박함을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두지 않을 때만 존재 가능하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빈티지 모던 의자와 싸구려 조립 가구,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과 같다. 심지어 테디 베어 코트를 입은 카린 로이펠트의 포스팅과 그녀를 따라 이 코트를 구입해 입은 이들의 포스팅, 그리고 교묘한 모조품을 입은 이들의 포스팅은 제각각 다른 지점에서 환호 받는다. 오리지널도, 오리지널이 아닌 것도 나름의 명분으로 ‘진짜’가 되는 세상. 그러니까 이제 우아함의 반대말은 (천박함이 아니라) 우아하지 않은 것이고, 천박함의 반대말은 (우아함이 아니라) 천박하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스타그램의 민주적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과 이 매체가 야기하는 행태가 우아함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며, 동시에 타당하다. 가령 어떤 포스팅을 좀 찬찬히 보고 싶어도, 금세 다른 소식이 올라오는 탓에 스스로를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왠지 뒤처지는 것 같은 강박이 엄습한다. 전 세계의 인플루언서들은 제각각의 ‘현재’를 살고 있기에 이들의 현재를 좇아가다 보면 나의 ‘인스타 시간’은 늘 과거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우아함의 기술>을 쓴 사라 카우프먼은 “21세기의 삶 자체는 급하고, 서투르고, 불만스럽기 일쑤다. 우리가 서로를, 우리 자신을 대하는 방식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절묘하게도, 이 세계 자체가 그렇다. (바쁜 시간 쪼개어 남의 일상 들여다보자니) 급하고, (눈과 귀에 장치를 연결한 채 마음은 멀리 가 있어 타인에게 물리적,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르니) 서투르고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니) 불만스러움을 야기한다. 휴대폰에 코를 박고 지내느라 몸마저 중력에 굴복해버렸으니, 여러모로 일상을 우아하게 살아가는 법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의심을 떨치기가 더 힘들다.

인플루언서를 호명할 자격 역시 대중들에게만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와 ‘인플루언서를 만들 수 있다’는 권한 모두를 양손에 쥐게 되었다. 더욱이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절에는 스스로를 꽤나 복잡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현대인의 특권이자 기본적 정서인 데다, 누구나 한번 얻은 것을 포기하긴 힘들다. 나도 예외는 아닌지라, 새해 벽두부터 포스팅을 기웃거리다가도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리곤 했다. 이 세계를 떠나면 이런 쓸데없는 의심 따위도 사라질까, 즐기는 법을 익히는 것이 더 현명할까. 언제나처럼 떠날 용기가 없는 난 결국 코코 샤넬이 충고한바, “우아함이란 이제 갓 사춘기를 벗어난 이들의 특권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의 미래를 꽉 잡고 있는 이들의 것”임을 기억해보기로 했다. 백날 인스타그램에 코 박고 있는 나나, 이 새로운 인종들이나, 언젠가 위키피디아에 ‘우아함의 반대말’로 기록되지 않길 바라는 것이 윤혜정이 인플루언서로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거라는 의심이 지워질 그날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