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니스

우울, 모두의

2018.02.05

by VOGUE

    우울, 모두의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사람,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 유능한 사람, 사랑받고 있는 사람, 사랑하고 있는 사람. 그 누구라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나처럼.

    Black Hole. 2018. 무나씨

    Black Hole. 2018. 무나씨

    세계가 사랑했던 젊은 아티스트가 별이 되어 떠난 뒤 비통한 마음에 우울증을 기획안에 올렸다. 그리고 취재 시작 하루 만에 아차 했다. 감기에 비유되며 여성 네 명 중 한 명은 경험하게 된다는 흔한 병, WHO가 세계적 3대 질병 중 하나로 지정한 위중한 병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고혈압이나 비만처럼 명쾌하게 다룰 수가 없다.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송후림 교수는 우울증은 단일 질환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원인과 정도, 경과, 예후가 모두 다른 이질적 질환의 모음이죠.” 각자가 처한 심리사회적 환경, 뇌의 상태, 기질 등이 다르기 때문에 ‘각양각색’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나타나는 증상도 다양하다. 흔히 알려진 무기력 이외에도 불안, 공격, 강박 역시 우울증의 한 형태다. 반응이 느려지고 식욕이 없어지며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거나 못 자는 등의 신체적 변화도 나타날 수 있다. 결국 100 사람의 100가지 우울이라는 건데, 이 지극히 개별적인 병을 내가 감히 무어라 전할 수 있겠나? ‘흔한 병이지만 위험하다니 조심하시오?’ 시의성만 있고 진솔함이 없는 칼럼이 될까 우려하던 차에 직업적으로는 반갑고 개인적으로는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나도 우울증일 수 있다는 소견을 듣게 된 거다.
    장르 불문, 나를 거쳐간 모든 운동 트레이너들이 했던 말이 있다. “정신력만은 태릉선수촌입니다.” 그런 나에게 ‘뇌가 심리사회적인 고통에 적응을 실패한 결과’라는 우울증은 태극마크를 반납하라는 통보와 같았다. 가족을 사랑하고 스태프들과 자주 낄낄대며 무엇보다 스스로 근성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고통 부적응자라고? 동료들은 모두 진천으로 이주해 새로운 메달을 꿈꾸고 있는데 나만 노메달로 은퇴하라니, 그렇게는 못하겠다! 마음을 다잡고 개인이 현실의 우울증을 대면하며 배우게 되는 것들을 공유하기로 했다.

    우울 모드 VS 우울증
    발단은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문진표였다. 열 개 중 다섯 개가 넘으면 우울증이 의심된다는데 여섯 개에 해당된다. 읽고 있던 참고 도서에 수록된 ‘벡 우울증 테스트’는 좀더 길고 자세했다. 15점이 넘으면 가까운 병원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캡션이 달려 있는데 계산해보니 22점이다(병원에 가면 이런 유의 문진표를 가장 먼저 작성하게 된다). 우울증 취재차 만난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박사에게 자가 테스트지를 들이밀었다. “수치상으로는 맞네요. 이런 상태가 2주 이상 지속된 건가요? 우울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 중 하나지만 그게 계속되면 병이거든요.” 이렇게 담담한 우울도 있냐고 반문하자 “그래서 질적 분석이 필수적”이라고 답한다. 예를 들어 ‘장래에 대해 낙심한다’와 ‘장래에 대해 기대할 것이 없다고 느낀다’ 중 후자를 선택했다면 그 이유와 비관의 종류를 묻는다. ‘내가 한 일이 잘못됐을 때는 항상 나 자신을 비난한다’라는 답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공격인지 아니면 종교적 삶의 태도인지 점검해야 한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어졌다’가 무기력을 뜻하는지 뒷담화를 지양하는 어른스러움인지도 알아본다. 대화의 마지막에 손 박사가 물었다. “기분이 좋고 즐거울 때가 많이 있나요?” 잘 떠오르지 않아서 ‘삶의 목표가 평정심’이라고 답했다. 기뻐도 너무 기쁘지 않게, 슬퍼도 너무 슬프지 않게 살고 싶다고 말이다. “우울증이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극복하는 중인 거 같네요. 이렇게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케이스가 더러 있어요.” 그럼 치료 받아야 할까? “주관적으로 우울하거나 슬픈 기분이 드는지, 자신은 괜찮아도 주변인이 이상하다고 느끼는지,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봐야죠. 치료 대상자에 대해서는 의사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주관적 괴로움이나 심리적 스트레스가 없는데 병원에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 그렇지,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하지만 모두 이 정도는 힘들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 우울증을 질병으로 보지 않는 전형적이고 위험한 시각이라는 건 기억해두세요. 정식으로 진료를 받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오시고요.” 기본 성향 자체가 비관적이고 지나치게 겸허한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무너지게 되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끝으로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그리고 고민이 시작됐다. 우울에 취약한 체질이 있다는 건 글로 배워 알고 있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어디로 가야 하지?
    치료 받는다고 가정하고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초록창 검색. 화면에 정신의학과의원, 한의원, 심리상담센터 등이 가득 리스트업됐다. 파워링크에는 없지만 종합병원도 고려 대상이다. 큰 병원과 작은 병원, 의사와 심리상담가, 수많은 선택지 중에 어떤 것을 골라야 할까? 집 주변의 작은 병원은 30분 이상의 밀착 상담이 가능하지만 겉만 봐서는 의사의 성향 파악이 힘들다. 큰 병원은 규모가 주는 신뢰가 있고 약에 강하지만 환자가 많아 의사와 10분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심리상담소? ‘정신병원’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말랑하게 어필하지만 상담사 개개인의 전문성을 확신할 수 없는 데다 반드시 약을 병행해야 하는 경우 시기를 놓칠 위험이 있다. 물론 상담 후에 병원을 권하는 현명하고 유능한 심리상담가도 많지만 시간을 지체하다 약 먹어야 할 시기를 놓친 경우를 경험한 의사들은 처음 진단 시 상담센터보다 병원을 먼저 찾기를 권한다.

    명의는 누구?
    라포를 형성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치료하는 병인지라 어떤 의사를 만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손 박사는 “의사에게 물어보라”는 매우 현실적인 충고를 했다. “진료과가 달라도 괜찮아요. 의사인 지인이 없다면 자주 가는 동네 내과도 좋습니다. 누가 성실한지, 경력은 어떤지 서로 알고 있으니까요.”
    궁합도 중요하다. 치료를 받다 보면 얼마든지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설명이 부족해서 갑갑하거나 무관심한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다. 종합병원의 10분 상담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속내를 자세히 들어줄 작은 규모의 병원으로 가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럴 땐 옮기면 된다. “우울증 환자들은 의사 바꾸길 두려워해요. 선생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우려하죠. 하지만 모든 행동의 시작과 끝이 자신을 살피기 위한 치료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정신과 전문의 조현욱은 의사의 멘탈은 의사가 챙길 테니 개의치 말라고 말한다. “치료를 받다 보면 맞지 않는 의사나 심리학자를 만날 수도 있어요. 그게 상처가 되기도 하죠. 하지만 일단 자신을 돌보겠다는 용기를 냈다면 그 과정까지 감내해야 해요.” 단, 병원을 옮길 때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이 있다. 복용 중인 약의 정보다. 그래야 수십 종의 우울증 약을 처음부터 다시 스크리닝하는 수고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어떤 치료를 받게 될까?
    긴 의자에 우아하게 누워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거나 수의같이 흰 환자복으로 팔다리를 결박당하는 것이 정신과 치료라고 상상하고 있다면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대부분의 치료는 1~2주에 한 번 의사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고 약을 처방받는 것으로 진행된다. 100 사람의 100가지 우울, 그래서 100가지 치료가 있는 셈이라 철저히 개별화되어 있고 기법도 다양하다.
    갑자기 힘이 나는 비법을 가르쳐주거나 찬란한 미래를 제시해주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뭘 해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많은 의사들이 “뭘 어떻게 할까요?”라고 환자가 먼저 물어오기 전엔 숙제를 내주지 않는다. 물론 ‘비타민 B가 풍부한 음식을 먹고, 햇볕을 쐬며 운동을 하는 것이 우울증에 좋다’와 같은 일반 명제는 있으되 그것이 ‘몸을 따뜻하게 하고 물을 많이 마시는 게 감기에 좋다’와 같은 절대 참은 아니다. 우울증의 대표 증상 중 하나가 바로 죄책감. 아침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회복에 좋다는 걸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하찮아 보여 더욱 슬퍼지는 것이 우울증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힘내라’는 말도 아낀다. 힘을 낼 수 없는 사람에겐 그것만큼 힘 빠지는 소리도 없으니까. 혹시 의사가 뭔가 권하거나 구체적인 충고를 해온다면 환자가 그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아직도 날 이해 못하는군’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서로의 치료 속도가 맞지 않은 것뿐이니 너무 섭섭하게 느끼지 말길. 치료가 더딘 자신을 책망할 필요도 없고 의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비용은 약이 일주일에 1만원 정도, 상담은 30분에 5만~10만원 선이다. 합리적일 수도,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돈이지만 일단 치료를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하다. 첫 발병 시 3~6개월 정도 충분히 치료를 받아야 재발 확률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보험 가입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풍문을 들은 적 있다고? “진료 기록은 본인의 동의 없이 절대 의료기관 밖으로 유출되지 않아요. 보험 가입 여부 역시 내외과적 질환과 동일하게 간주됩니다.” 송후림 교수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된다. “공식적으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의 선입견을 가진 보험설계사가 임의적으로 가입을 꺼리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이 경우 보험사와 직접 얘기하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약을 꼭 먹어야 할까?
    손석한 박사와 대화 중에 신체 기능이 떨어진 것같이 느껴지냐는 질문을 받았다. 우울증은 뇌도 아픈 병이라 실제로 사고가 둔해지고 예전처럼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등 몸의 이상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현욱 선생은 모든 케이스는 아니지만 약이 필요한 경우가 다수라고 설명한다. “불면, 식욕 저하, 집중력 저하, 혹은 요즘 뭔가 몸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감지됐다면 확실히 도움이 돼요.” 송후림 교수 역시 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고 강조한다. “가벼운 우울증이라면 상담 치료나 운동 같은 행동 치료가 효과적일 수도 있지만 뇌 기능에 영향이 생겨버릴 정도의 진성 우울증이라면 약물 치료를 우선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상담도 소용이 없거든요.”
    약을 먹으면 갑자기 ‘뿅!’ 행복해질까? 그건 아니다. 잘 자고 잘 먹을 수 있는 정도다. ‘견딜 만하다’ ‘우울하지 않다’는 기분에 이르려면 적어도 2~4주가 필요하고, 뇌 기능이 완전히 정상화되려면 최소한 6개월 이상 장복해야 한다. 중단하는 시기는 절대적으로 의사의 지시를 따르길.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건 그간의 수고를 수포로 돌리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솔직히 처음엔 ‘향정신성 의약품’이라는 일곱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곧 머뭇거리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내시경을 할 때는 그 몇 분의 불편함을 못 참고 ‘향정신성 의약품’ 프로포폴로 재워달라 하고, 삶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우울증 앞에 망설이는 꼴이라니. 우울증은 아니지만 자신도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약을 챙겨 먹고 있다는 송후림 교수의 말에 마지막 남아 있던 한 자락 불안까지 다 내려놨다. 그래, 의사가 먹으라면 먹자.

    ‘울밍아웃’의 기로
    나의 우울을 남에게 알려야 할까? 얘기하면 도와줄까? “정답은 없어요. 이해하는 친구도 있고 이해하는 듯했지만 지나치게 의지하면 지쳐버리기도 하죠. 그러면 그게 또 상처가 돼요.” 너무 현실적이라 마음이 안 좋다 말하자 손 박사는 그래서 의사가 필요한 거라며 웃는다. 들어주고 도와주는 걸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가라는 거다. “그럼에도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는 털어놓고 얘기하라고 충고하고 있어요. 대화 자체가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거든요.”
    여성 25%가 경험하게 될 정도로 흔한 병. 점심을 함께 했던 네 명 중 한 명이 우울증일 수 있다면 이참에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워두는 것도 좋겠다. 첫걸음은 ‘굿 리스너’가 되는 것.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하되 충고는 자제한다. 그리고 전문가에게 가보길 권해야 한다.
    조심스러운 일이라 예쁘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고 겁을 내자 조현욱 선생이 시뮬레이션을 펼친다. “먼저 ‘나 요즘 네가 좀 신경 쓰이는데 괜찮은 거니?’라고 물어보세요. 만약 문제없다고 부정하면 믿어주려 노력하십시오.” 아무리 봐도 괜찮지 않다고 판단되면 ‘네가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다시 손을 내밀자. “이쯤 되면 솔직히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함께 방법을 모색하는 일만 남은 거죠.” 끝내 거절한다면 거기서 멈춰라. 당신이 그에게 딱 그만큼밖에 아니라면 걸어 닫은 문을 억지로 열어선 안 된다. 대신 친구가 누구 말을 새겨듣는지 살폈다가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우회하자. 가장 피해야 할 건 ‘정신력’을 강요하는 일. ‘다 자기 할 탓’이라거나 ‘그만치 좋아졌으면 약에 의존하지 말고 네 힘으로 극복하라’고 알은체를 하는 건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빨리 달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모두의 우울, 모두의 위로
    타인의 우울을 평가하는 건 금물이다. 우울증일지 몰라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나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나도 우울해”. 버젓한 직장에 사지 멀쩡하고 마이너스 통장도 없는 네가 우울할 일이 무엇이냐, 정신없이 바쁘면 우울할 틈도 없다며 깔깔 웃는데 우울 일자무식 앞에 뭐라고 낫을 놔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우울증 발생 세계 분포를 보면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도 복지 선진국도 공평하게 우울하다.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고 그걸 견뎌내는 마음과 뇌의 역치가 다르니, 같은 뇌로 동일한 삶의 궤적을 경험한 게 아니라면 타인의 우울을 저울질해선 안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하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사회가 달라져서 우울의 여지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우울의 종류가 달라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조현욱 선생은 누가 더 불쌍한지 배틀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이 없다고 탄식한다. “누군가가 힘들어하면 공감하고 덕담하며 진심을 나누기만 하면 돼요.”
    우울증을 감기에 비유하는 건 병세가 유사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흔하게 걸릴 수 있다는 발병 패턴 때문이리라. ‘마음만은 태릉인’인 나도 치료가 은퇴가 아닌 재활임을 알게 됐기에 더 이상 방황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당신도 모르는 새, 슬럼프라는 이름으로 앓아냈을지 모를 우울증. 이제 정체를 알았으니 만약 자신에게 혹은 지인에게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면 방치하지 말고 전문가를 찾길. 그것이 단순한 우울 모드였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고 아니라 해도 절대 당황하거나 두려워 말자. 당신만의 한숨이 아닌, 우리 모두의 우울이니까

      에디터
      백지수
      일러스트레이터
      무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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