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히피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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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히피 라이프

2018-02-06T00:40:21+00:00 2018.02.06|

안녕하세요? 제가 요즘 핫하다는 모던 히피입니다.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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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을 내고 인터뷰를 했다. 기사가 나가자 주변 사람들이 놀려댔다. “히피가 싫다면서요?”
그렇다. 난 히피가 싫다. 그런데 기자는 내가 히피처럼 산다고 했다.

또 다른 장면. 2018년 트렌드 예측 기사를 쓰던 후배가 말했다. “모던 히피가 트렌드래요. 선배가 모던 히피잖아요.” 트렌디하다니 좋긴 하다만, 내가 히피라니, 삼대독자가 고자 소릴 들어도 이보단 덜 놀라겠다. 서적과 잡지에선 ‘모던 히피’를 “휴식과 명상,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웰니스 라이프를 추구”, “감수성이 풍부하고 공익 운동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 어쩌고 하는 말로 설명하고 있었다. “인문학, 철학을 통해 일상의 안정과 정신적 풍요로움을 추구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찾아보니 금세 머리가 복잡해진다. 인터넷에는 ‘모던 히피 되는 법’, ‘모던 히피처럼 옷 입는 법’, ‘모던 히피처럼 생각하는 법’, ‘모던 히피가 좋아하는 음악’ 같은 꼬꼬마 트렌드 헌터들을 위한 날림 기사가 넘쳐났다. 아마도 이제 히피란 프렌치 시크니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니 킨포크 라이프니 하는 것들처럼 계절 따라 기분 따라 내 삶을 장식하기 위해 갖다 붙이는 레이블이 된 모양이다.
본의 아니게 히피 분류 상자에 수납된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공개하면 이렇다. 옷은 죄다 오버사이즈에 리넨, 실크, 순면 같은 천연 소재고, 빈티지 드레스와 파자마 팬츠를 좋아하고, 회사에 안 다니고, 공산품을 사는 데 흥미를 잃었고, 머리는 천연 헤나로 염색해서 붉은 기가 돌고, 자동차를 몰 줄 모르고, 서울 집을 처분한 뒤 수트케이스 하나 들고 동남아 시골에 와서 여행자로 지낸다. 정글이 보이는 테라스에 모기향 피우고 ‘양반다리’로 앉아서 글을 쓰고, 남는 시간에 책과 영화를 보거나 내 공간을 가꾼다. 몸이 찌뿌듯하면 요가를 하고, 명상은 안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고, 정치, 사회 문제에 깨어 있으려 노력하고, 동물을 덜 먹으려 애쓰고, 어느 순간에나 ‘지금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여기까진 ‘히피’에 가까운지 모른다.

하지만 해외에서도 1시간에 한 번씩 가상화폐와 주식, 때로 부동산 시세를 검색하고, 수트케이트에는 옷 대신 맥북과 블루투스 스피커와 빔 프로젝터 등 전자 기기가 가득하고, 마리화나니 마약이니 하는 향정신성 물질은 질색이다. 동남아 시골이라지만 낮에는 적당히 일해서 돈을 벌고 밤이면 EDM을 틀어놓고 파티를 하면서 “나는 히피가 싫어요!”라고 외치는, 내면의 평화는커녕 섹스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사람들에 둘러싸여 온갖 치정 사건을 목격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히피’라는 표현에 유독 민감하다. 내 동거인의 컴퓨터에는 “I Hate Hippie!”라는 스티커까지 붙어 있다. 이들이 “나는 히피가 싫어요!” 외칠 때의 ‘히피’는 자본주의의 타락에 맞서 인간성의 회복을 부르짖고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던 1960년대 히피 무브먼트의 정신과는 하등 무관한, 상업화된 히피의 이미지만 소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것이 이른바 ‘모던 히피’일 게다.

요즘 내가 지내는 곳은 발리 근처의 누사페니다라는 섬이다. 작년엔 발리의 우붓에서 6개월을 머물렀다. 이곳 여행자들에게 ‘히피’는 경멸적인 호칭이다. 멀쩡한 직업도 없이 거지꼴을 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약물에 쩔어 해롱대는 남자들, 엄청난 트라우마로 사고 체계가 붕괴되어 정신연령이 열 살 꼬마로 퇴행해버린 것 같은 응석받이 여자들, 비대하고도 공허한 자아 때문에 쩔쩔매면서 요가와 명상에 집착하고 채식, 오가닉, 글루텐 프리 식단을 패션 아이템처럼 과시하고 다니는 사람들, 아즈텍 문양과 플라워 프린트, 다양한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나는 유행 따위 무시하는 쿨한 사람’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열아홉 살짜리 패션광, 오컬트주의자, 금치산자, 위선 떠는 에고이스트 등을 여기선 ‘히피’라고 부른다. 모두 도시가 싫어서 떠나왔다고 하지만 도시도 그들을 별로 안 좋아할 것처럼 보인다.

어느 독일 남자가 작은 행낭에 해먹과 베개를 넣어 다니며 한 달 동안 우붓 일대에서 노숙을 했다. 그러다 우기가 되어 야외 취침이 힘들어지자 요가 아시람에 들어가 빈방 있으면 공짜로 재워달라고 간청했다. 마침 방이 남아 주인이 적선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자기가 한 달 동안 나무에 해먹을 걸고 먹고 자고 했으나 그런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 자고 일어나니 베개에 이끼가 끼었다며 베갯값을 물어내라고 했다. 이때 주인이 뭐라고 했을까? “겟 아웃 마더퍼커.” 그리고 돌아서며 중얼거리는 거다. “퍼킹 히피.” 실화다. 우붓에 이런 사람들이 특히 많다. 정신이 위태로운 사람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쟤 우붓에 보내야겠어.” 그러니까, 발리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히피’라고 부르는 건 아주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줬음 좋겠다.

죽어라 일해봤자 현상 유지밖에 안 되는 도시 생활을 버리고 물가 싼 데 찾아다니며 적당히 벌어 놀고 먹는 삶, 야근과 철야와 주말 특근 대신 나 자신을 돌보고 문화를 향유하고 창조하는 일, 철마다 바뀌는 트렌드를 좇아가느라 돈과 시간과 환경을 소모하는 대신 유행 안 타고 편한 옷을 선호하는 것, 자기 삶과 환경 모두의 지속 가능성을 염려하는 태도, 다시 말해 탈도시, 탈유행, 여유를 추구하는 삶… 다 좋다. 좋은 말이고, 필요한 변화고, 실제 사람들의 관심도 높다. 하지만 그게 ‘히피’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 위에서 말한 나나, 이곳 이민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엄밀히 말하면 ‘히피’보다는 정장에서 캐주얼로 갈아입고 시골로 내려간 여피에 가깝다. 히피들이 색 바랜 스카프를 주렁주렁 늘어놓고 ‘Don’t grow up’ 따위 카피를 써 붙인 방갈로에서 장기 투숙하며 자아와 투쟁할 때, 조기 은퇴 자금과 크라우드 펀딩으로 에코 리조트를 짓고 그들의 돈을 긁어모아 유유자적 사는 사람들이랄까. 그래서 ‘히피’에 ‘모던’을 더한 거라고 주장한다면, 글쎄, 애초에 ‘모던’과 ‘히피’가 어울리는 단어기나 한지 의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60년 전통 김할머니 비건 곰탕 같은 소리냔 말이다.

미디어에서 그럴싸한 억지 네이밍을 만들어낼 때는 상업적인 의도를 먼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위키하우(www.wikihow.com)에 올라온 ‘모던 히피 되는 법’ 매뉴얼을 보라. 오가닉 푸드와 채식, 콤부차를 마시는 모던 히피 다이어트에 도전하세요, 화장은 하지 말고 겨드랑이 털을 기르고 샌들을 신으세요, 올드 뮤직과 일렉트로닉, 잼 밴드의 음악을 듣고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하세요, 앨런 긴즈버그와 잭 케루악의 책을 읽으세요… 올위민스톡(allwomenstalk.com)의 ‘히피가 뉴 트렌디다’ 기사를 보면 채식을 하고, 빈티지를 좋아하고, 자원봉사를 하고, 화학약품 안 쓰고, 텃밭을 가꾸는 게 모던 히피의 사인이라고 한다. 이게 다 무슨 헛소리람? 만약 내가 ‘모던 히피 되는 법’이라는 기사를 쓴다면 ‘잡지 하우투 기사 같은 건 잊어버려’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쓸 것이다. 소비 트렌드의 주인공이 된 히피라니, 티셔츠가 된 체 게바라랑 다를 게 뭔가. 오늘도 유행의 탈곡기는 탈탈 돌아가고, 모든 사상과 철학과 무브먼트가 패션으로 둔갑해 세상에 쏟아져 나오지만 이만큼 황당한 변신도 드물지 싶다. 참고로, 이 원고를 다 쓰고 나면 나는 MSG가 듬뿍 든 인스턴트 라면을 한 개 끓여 먹고, 스판덱스 운동복을 입고 스쿼트를 100개쯤 한 다음, 재테크 자료를 좀 찾아 읽고, 위스키를 한 잔 마시며 넷플릭스와 빔 프로젝터로 액션 영화를 한두 편 관람하다가 잠들 예정이다. 히피라고요? 농담이 심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