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ana Daniel

Fashion

Tiana Daniel

2018-02-14T17:06:02+00:00 2018.02.08|

지난해 12월 5일, ‘Balenciaga Announcement’라는 제목의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첨부된 PDF 파일의 내용은 명료했다.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2018 가을/겨울 컬렉션부터 남성 컬렉션과 여성 컬렉션을 통합해 한 번의 패션쇼를 통해 소개할 예정이다. 그 첫 번째 통합 컬렉션 쇼는 다가오는 3월 파리 패션 위크에서 진행한다.”

이로써 발렌시아가는 버버리, 구찌, 생로랑, 캘빈 클라인, 보테가 베네타, 겐조 등 남녀 통합 패션쇼를 선보이는 무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최근엔 런던의 JW 앤더슨, 파리의 A.P.C.도 그 뒤를 이었다. 루이 비통과 디올처럼 남성복과 여성복 디자이너가 다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패션계 메이저 선수들은 이제 남녀공학을 선언한 것이다.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을 한 번에 선보인다는 건 좋은 비즈니스 전략이다. 두 번의 거대한 패션쇼 대신 한 번으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션계의 모든 현상을 숫자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변화는 한 명의 디자이너가 선보이는 창조적 세계에서 여성과 남성이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증거에 가깝다. 하나의 비전에서 탄생한 여성과 남성이 함께 어우러지는 현상.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는 디자인이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면, 이제 그 종착역에 가까이 온 셈이다. 즉 80년대 유니섹스, 90년대 앤드로지니, 2000년대 젠더리스와 젠더 뉴트럴의 시대에 이어 드디어 젠더의 혁명, 즉 ‘젠더퀘이크(Genderquake)’의 시대가 열렸다.

“구찌 같은 쇼를 봤을 때 남성복과 여성복이 공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베테랑 패션 저널리스트 팀 블랭크스는 이 모든 변화가 패션 진화의 과정이라 설명한다. 우리 모두 두 컬렉션이 이어진 걸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90년대 헬무트 랭을 떠올려보세요. 남성복과 여성복을 나누는 건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건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다. “이러한 변화는 패션계에 지진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니만 마커스 백화점의 패션 디렉터 켄 다우닝은 이렇게 설명했다. “경계 없이 스타일을 더 넓게 받아들이는 현상이죠. 젊은 세대가 옷을 입는 방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향을 연구하는 ‘Trendwatching.com’ 역시 젠더퀘이크의 근원지를 소비자로 진단했다. “그 결과 소비의 경향은 예전처럼 나이, 성별, 지역, 수입, 가족 등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특히 12세부터 19세까지에 이르는 ‘Z세대’를 비롯한 밀레니얼 세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성적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젊은 세대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미디어 에이전시 J. 월터 톰슨의 연구소가 내린 결론이다. “특히 어린 세대로 갈수록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선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고객의 취향을 따르기 위해 브랜드는 물론 온라인 숍과 백화점도 변화하고 있다. 3층은 여성, 4층은 남성으로 나뉘던 백화점 스타일의 카테고리도 사라지고 있다. 이미 2년 전 런던의 셀프리지 백화점은 ‘Agender’라는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성의 구분 없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으로 가득한 이 공간은 고객들에게도 새로운 실험이 될 것이다. “전통적인 백화점식 카테고리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싶습니다.” 백화점의 보도 자료는 이렇게 설명했다. 또 아크네 스튜디오와 랙앤본 같은 브랜드는 매장에 남성과 여성복을 함께 디스플레이하고 있다. 전통적인 마네킹도 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브루클린에 자리한 멀티숍 Odd92에는 반은 여성, 반은 남성의 몸을 가진 마네킹을 준비했다.
온라인 쇼핑의 경험도 바뀌고 있다. 쇼핑몰 앱을 열고,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던 카테고리를 따르던 경험은 곧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성의 카테고리를 없앤 쇼핑에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2년 전 미국 <보그>의 패션 펀드 후보에 올랐던 라벨, ‘스탬피디(Stampd)’는 아예 남성과 여성 카테고리를 없앴다. 대신 ‘셔츠’ ‘하의’ ‘모자’ 등으로 쇼핑을 즐길 수 있는 홈페이지를 완성했다. ‘Garmentory’ 역시 새로운 시대를 일찌감치 맞이한 쇼핑 사이트. 전 세계 부티크 숍에서 판매하는 아이템은 기본적으로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지만, 함께 즐길 수 있는 아이템은 ‘유니섹스’ 섹션에 맞추어 전시한다.

덕분에 요즘엔 누구나 유동적인 젠더(Gender Fluid) 패션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발렌시아가와 릭 오웬스 등의 10cm를 거뜬히 넘기는 하이힐 부츠를 즐기는 <보그 코리아>의 편집장부터 네타포르테보다 미스터포터 앱을 더 자주 열어본다는 여성 스타일리스트 등 내 주변에도 새로운 시대를 일찌감치 맞이한 선구자들은 많다. 비교적 보수적인 스타일의 나 역시 슬며시 그 선을 넘어보는 짜릿한 경험을 해보았다. 그 현장은 파리의 셀린 쇼룸. 지난해 7월 오뜨 꾸뛰르 기간 동안 리조트 컬렉션을 살펴보던 중 홍콩의 홍보 담당은 내게 블레이저 한 벌을 들이밀며 “너라면 이 재킷을 좋아할 것 같아”라고 말했다. 라펠을 재킷 안으로 말아 넣은 후 두툼하게 박음질한 재킷은 남성 팬들을 향한 피비 파일로의 선물 같았다. 홍보 직원은 내게 컬렉션에 소개한 블랙 데님 팬츠와 새하얀 스니커즈까지 들이밀며 입어볼 것을 종용했다.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수의 남성 고객이 셀린 여성복을 쇼핑한다고 덧붙인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너도 셀린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쇼핑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단순히 여성 재킷을 구입하는 남성이나, 남성용 티셔츠를 입는 여성들로 패션계 젠더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는 없다. 지난해 패션계를 정의한 키워드 중 하나는 ‘오프니스(Openness)’, 즉 개방성이었다. 톱 모델 안느 개비 오딜은 자신이 인터섹스라 밝혔고, 트랜스젠더 모델 하리 네프는 다코타 존슨과 함께 구찌 향수 광고의 주인공이 되었다. 셰인 올리버는 직접 화이트 하이힐을 신고 헬무트 랭 런웨이에 등장했고, 한국의 블라인드니스는 ‘Fuck Gender’라는 문구가 담긴 티셔츠를 소개했다. 그 무엇도 가능하고, 그 누구도 즐길 수 있는 패션계의 세상에서 불가능은 없다.

누구보다 이러한 현상을 재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건 젊고 패기로 가득한 디자이너들. 수많은 자유 영혼 중에서도 스페인의 알레한드로 팔로모는 지금 가장 주목할 만한 남성복 디자이너다. 지난해 LVMH 어워즈 최종 후보에 올랐던 라벨, 팔로모를 통해 자신이 꿈꾸는 남성성을 마음껏 표현한다. 오간자 드레스를 입은 남성, 장미꽃으로 장식한 뷔스티에를 입은 남성에게 두려움은 없다. 런던에서 패션을 공부한 후 스페인으로 돌아간 그는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남성상을 소개한다. “남성 속에서 연약하고,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면을 이끌어내고 싶습니다.” 런던의 찰스 제프리 역시 마찬가지. 러버보이라는 라벨에서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를 입은 비즈니스맨은 존재하지 않는다. 뷔스티에 장식 미니 드레스, 타조 깃털 장식 헤드피스를 쓴 건 다름 아닌 남자 모델이다. 이러한 쇼를 바라본 미국 <보그>의 평론가 사라 무어는 이렇게 선언했다.

“문명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인권 중 하나는 누구나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증명하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찰스 제프리는 바로 그 자유를 마음껏 표현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지금 유니클로에서 라운드넥 스웨터를 구입하는 일반적인 고객에게 이러한 성의 자유는 먼 나라 이야기일 수 있다. 패션이라는 기차 맨 앞 칸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이들만이 즐기는 은밀한 세상 말이다. 하지만 그 기차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이들이 더 자유롭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건 긍정적인 변화다.

“많은 이들이 젠더리스와 여러 종류의 남성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젠더를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성적 지향성에 대해 분명히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금 미지의 무엇을 가지고 실험한다고 할 수 있죠. 단순히 남자, 여자로 구분하는 순간 그 세상은 좁아지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