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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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우정

2018-03-06T11:12:31+00:00 2018.03.06|

서펜타인 갤러리의 CEO 야나 필과 아트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를 만났다. 대화는 이우환의 작품으로 시작해 서펜타인의 청사진으로, 유서 깊은 갤러리가 꿈꾸는 혁신으로 이어졌다.

VOGUE KOREA
서펜타인의 두 주인공을 서울 장충동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함께 온 건가?
YANA PEEL
우리가 함께 서울에 온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베이징에서 서펜타인 파빌리온 론칭을 갓 마치고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포비든 시티(Forbidden City, 베이징의 자금성)’ 입구에 건축가 리우 지아쿤(Liu Jiakun)과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울 예정이다. 둘째, 서펜타인이 다음 50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한국은 우리가 꿈꾸는 미술관을 함께 일구어가는 데 아주 흥미로운 파트너다. 그리고 셋째, 가장 중요하게는 이우환 작가의 커미션 작업이 서펜타인을 통해 공개된다는 사실이다.
HANS ULRICH OBRIST 당신이 런던에 와서 이우환의 작업을 보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고 일종의 시그니처라고도 할 수 있는 바위를 사용한 조각이고, 거울로 바위, 공원, 관객을 모두 비추는 조각이다. 그런 점에서는 명백히 관객 참여형 설치 작업이다.

VK 이우환 작가는 자기 생각을 출발점으로 외부 세계와의 연결점을 찾는 식의 작품 세계를 선보여왔다. 그래서 이 작품이 과연 어떤 풍경과 에너지를 발산할지 더 기대된다.
YP 우리는 예술을 만나는 공간에 대한 도전을 즐긴다. 어디서,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 말이다. 특히 이번엔 공원에 대중을 상대로 한 조각을 만들어냄으로써 예술을 우연히 접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이우환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목적지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갤러리를 넘어서고, 그 벽을 허물고 싶다. 그리고 갤러리 밖의 더 많은 관중들에게 자유로운 예술과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준다. 다리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HO 간극을 메워주는 다리다. 매년 120만 명의 사람들이 서펜타인을 방문하지만, 입장료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작년에 해외 출장을 갔다가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택시 기사가 7시에 나를 켄싱턴 가든까지 태워주면서 하는 말이, 서펜타인에서 일하는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는 거다. 지난여름에 열네 살 된 딸과 공원에 산책하러 갔다가 그의 딸이 파빌리온으로 뛰어들어가는 바람에 자신도 처음 들어가봤다고 했다. 그런 상황이 없었더라면, 미술관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라고. 오지 않을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다.” 더 재미난 건, 그의 딸이 그날 이후로 깨달음을 얻은 듯 매일 건축 책을 읽으며 건축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제2의 자하 하디드가 될지 누가 알겠나? 이 일화는 우리가 미술관을 넘어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예술이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은 늘 놀랍다. 이우환 작가의 조각 역시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고, 그 택시 기사와 딸이 했던 경험을 하길 바란다.

VK 평소 이우환이라는 작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점을 좋아했나.
HO 1990년대부터 나와 야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수많은 국제적인 그룹전을 보러 다녔다. 당시 어떤 예술가들을 만나든 간에 이우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우환은 예술가들의 예술가라고 했다. 작품도, 글도 영향력이 정말 크다고 말이다. 우리는 어떤 기회로든 그와 런던에서 작업하고 싶었다.
YP 요즘 세상에서 단색화는 더욱 특별하다. 사색적이고, 명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시대에 걸맞게 더욱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지만, 단색화에서 볼 수 있듯 잠시 숨 돌리며 여유 있는 순간이 있는 삶 역시 지향한다. 속도를 잠시나마 늦출 수 있는 방법을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2014년 베르사유 전시야말로 이우환의 작품이 외부 환경과 함께 큰 힘을 발휘한 좋은 예다. 아니, 그보다도 그 이듬해 국제갤러리가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선보인 단색화 전시가 압도적으로 환상적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2014년의 베니스, 2015년의 베니스, 2017년의 샤토 라 코스트에서 이우환을 통해 경험한 마법을 좇고 있었다.
HO 베니스에서 본 이우환의 작품은 정말이지 작지만 마법 같은 정원이었다. 그 환상적인 작품 덕분에 아주 바쁜 비엔날레 속에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YP 모든 게 연결된 세상에서 이따금 연결을 끊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우리 모두에게 절실할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다.

VK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서펜타인의 2018년 전시는 꼭 챙겨서 봐두어야 하는 필독 리스트다. 매년 전시와 작가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HO 매년 떠오르는 예술가를 위한 기간을 꼭 마련해둔다. 그들의 작업을 기념하고, 조명하고, 현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도록 홍보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제공하고, 전도유망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더 많은 기회를 만나게 해준다고나 할까. 올해 손드라 페리(Sondra Perry)라는 엄청난 아프리칸-아메리칸 예술가가 전시를 앞두고 있는데, VR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작업을 한다. 작년에 AI에 대한 서펜타인 갤러리 마라톤을 했는데, 올해는 그 주제에 더욱 집중하려 한다. 요즘 세상에 증강현실, VR, AI에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YP 물론 이 모든 것은 백남준으로부터 시작된다.
HO 학창 시절, 백남준을 만나기 위해 나의 파트너 구정아 작가와 함께 뉴욕에 갔다. 그녀가 비디오를 찍었고, 내가 인터뷰를 했는데, 그 경험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감을 줬다. 어쨌든 작가를 선정하는 다른 기준도 얘기하자면,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것 말고도 잊힌 이전 세대의 아티스트들을 재조명하는 것도 우리 몫이다. 우리 스스로는 이를 ‘Protest Against Forgetting’이라 부른다. 그 프로젝트의 대상으로 로즈 와일리(Rose Wylie)를 전시하기도 했다.
YP 또한 우리 프로그램에는 아주 강력한 여성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손드라 페리가 서른 살 정도, 로즈 와일리는 83세이다.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이들은 항상 새롭게 떠오르는 작가다. 발굴되는 것이다. 특히 (<보그> 같은) 패션지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기쁜 건, 여성 작가들의 존재가 오늘의 시대를 정의하거나 논의할 때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이 우리로 하여금 각자의 삶에서 ‘바로 이 순간을 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HO 바로 그 점이 중요한 포인트다. 요즘 사람들이 어떤 예술, 어떤 예술가를 보고 만나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우리 프로그램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으면서도 항상 새롭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우리는 전시 공간이 무언가를 개척해야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VK 현재 서펜타인 갤러리는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변화의 지점에 있다. 지금 시점에서, 어떤 방향성을 공유하며 중요한 실험에 돌입하고 있나?
YP 방금 당신이 쓴 ‘실험’이라는 단어가 너무 좋다. 우리 우정의 시발점 혹은 영감의 교집합은 자하 하디드였다. 한스가 그녀와 함께 두 번째 건물인 서펜타인 새클러 갤러리를 짓기도 했고. 그녀는 2000년에 시작된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한스와 나는 평소 그녀가 “실험에는 끝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고, 주문처럼 외웠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일하기 시작했을 때 ‘노스탤지어에 머물지 않는 실험’으로 우리의 비전을 정의했다. 다행히 실험은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실험한다는 자체가 실수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프로그램이 지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서펜타인의 비전과 메시지를 세계에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스와 나는 우리 갤러리의 글로벌한 세계관, 테크놀로지를 포용하는 태도, 그리고 경험을 창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공유하고 있다. 처음에 난 CEO가 ‘Chief Eternal Optimist’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Chief Experience Officer’라고 믿는다. 우리 역할은 관객에게 쉽게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우리와 그들이 영감을 나눠 갖는 것이다.
HO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 역시 전시란 ‘놀라운(Extraordinary)’ 경험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놀라운 전시란 모든 감각을 활용한 경험이며, 다양한 분야를 연결한다. 예술에 작용하는 영향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션, 음악, 문학, 과학 같은 타 분야와의 연결 고리를 파악해야 하고, 그래야만 21세기의 많은 문제를 해결 혹은 논의할 수 있다. 철학과 학문을 강조하는 건 물론 생각을 끊임없이 하기 위해 서펜타인 갤러리 마라톤 같은 일종의 아이디어 축제를 개최한다. ‘서머 파티’나 ‘퓨처 컨템퍼러리 파티(Future Contemporaries Party)’ 등의 행사로 알 수 있듯, 패션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파빌리온에서 콘서트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며 음악을 통해서도 공감대를 쌓는다. 시 읽는 프로그램도 주기적으로 진행한다. 현대미술은 다양한 분야를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YP 게다가 우리는 병적으로 궁금증이 많고 긍정적이다!

VK 영국의 정부 및 공적 자금의 지원 상황도 썩 좋지 않다고 들었다. 지원이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펜타인은 적극적으로 활동을 확장해가고 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YP 약 950만 파운드의 예산 중 정부가 10%를 지원하고, 나머지 90%는 모금 활동으로 충당한다. 펀드레이징의 절반은 자선으로 이뤄진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에 친구들과 기부자들이 있다. 나머지 절반은 윈윈 파트너십을 원하는 골드만 삭스, 샤넬, 구글 같은 파트너에게서 나온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우리와 흥미로운 모험을 함께 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나와 한스는 사업가다. 갤러리가 50주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펀드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스타트업과도 비슷하다. <보그>의 독자들이 이런 사실을 안다는 것이 그래서, 더 의미 있다.

VK 서펜타인이 아트와 자본의 관계를 가장 생산적이고도 바람직하게 보여주는 모델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HO 이런 과정이 우리의 야심 찬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뿐 아니라 예술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방식이라 믿는다. 우리는 지난 50개월 동안 300명의 아티스트들과 일했다. 펀드레이징은 작가들의 꿈과 프로젝트를 알리고, 지원하고, 관객들이 부담 없이 갤러리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 가지는 21세기에 들어 더 중요해진 아이디어인데, 도시에는 주요하게 자리 잡은 공공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프로그램이 활성화되고 대중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문화가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좋은 미술관이 없는 도시는 절대 좋은 도시로 인식될 수 없다.

VK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만드는 건 도시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여기에 서펜타인 갤러리는 스스로 현대의 필수적인 공간이 되고자 하는 것 같다. 서펜타인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YP 우리는 뼛속까지 에너지, 긍정, 열정,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아티스트들의 목소리를 사회의 중대한 문제를 다루는 대화의 중심에 놓아두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이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만남 혹은 모임의 장소가 되고, 다양한 문제를 논하고 수정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프로젝트와 파트너십을 주도하려 한다. 예술은 아주 중립적인 플랫폼 아닌가. 다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한 가지 문제를 건설적인 방식으로 같이 해결할 수 있게 하는 플랫폼이다.
HO 야나가 서펜타인의 CEO로 부임한 후 지난 18개월이 얼마나 흥미로웠는지 모를 것이다. 정말 많은 계획이 있었다. 그것이 하나둘씩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 감동적일 지경이다

VK 오래전부터 한국의 미술 신을 관심 있게 관찰해온 입장에서, 특히 무엇이 가장 흥미로운가?
HO 새로운 세대의 아티스트들, 1990년대에 태어나 기술과 함께 자란 첫 세대의 아티스트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1989년에 인터넷(www)이 발명된 이후에 태어난 작가들의 행보를 보는 게 신기하다. 그동안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나. 올해도 9월 광주비엔날레에서 이들을 더 알기 위해서라도 다시 올 예정이다. 그리고 지금 서펜타인에서 계획 중인 미술과 과학기술에 대한 리서치와 실험도 한국에 들여오고 싶다. 어떤 반응과 결과를 초래할지, 기대된다.

VK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관심이 많아 보인다. 테크놀로지의 문제가 지금 서펜타인 갤러리에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 것과 결국 같은 맥락인가?
HO 오래전 백남준 작가가 내게 해준 이야기가 있다. 텔레비전이 발명되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백남준은 텔레비전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후 인터넷이 발명되고 디지털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 그 후 많은 시간이 흐르고 이제야 이안 청(Ian Cheng) 같은 획기적인 작가들이 탄생한 거다. 그는 현세대의 백남준 같은 인물로 알고리즘, 인공지능을 주제로 작업하는 혁신적인 아티스트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서펜타인의 미션으로 출발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티스트들의 행보를 마주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갤러리의 미래를 그렸다고도 볼 수 있다. 작품이 있어야 큐레이팅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테크놀로지라는 중요한 주제가 작가들로부터 나온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들로부터 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한다. 우리는 거의 매일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각양각색의 작품을 접한다.

VK 당신을 매료시킨 테크놀로지가 앞으로 현대미술의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거라고 믿고 있나?
HO 우리는 세계화, 대중화가 소수를 멸종으로 몰아넣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고, 이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테크놀로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넘나드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다. 사실 2014년에 사라진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을 재조명하고 탐구하는 프로젝트 ‘Extinction Marathon’을 기획한 바 있다. 많은 언어가 세계화로 멸종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주제였다. 결국 우리가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방식은 온전히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확실한 건, 기술과 예술이 공모한다고 해서 회화, 조각 등 전통적 기법이 실종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새롭게 얻는 것이 중요하듯이, 잃는 것도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