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도시의 환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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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도시의 환대법

2018-03-16T15:07:02+00:00 2018.03.19|

4월까지 계속될 퀘벡의 겨울을 경험한다는 건, 기후에 상관없이 삶을 즐기려는 이들의 긍정성을 나눠 갖는 일이다. 역사와 정체성으로 굳건한 성벽을 쌓은 아름다운 도시가 이방인을 환대하는 방식이다.

레비섬 쪽에서 바라본 퀘벡 시티.

겨울이 긴 나라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게 있었다. 이건, 캐나다인으로는 처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소설에 영향 받은 바 크다. 먼로는 단편 <디어 라이프> 등에서 캐나다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내밀한 사건을 명징한 사실주의로 그려내곤 했다. 뒤덮인 눈에 사로잡힌 마을, 호숫가의 외딴집에 사는 이들은 저마다 실존을 심각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작품 속 ‘캐나다적인 삶’이야말로 어쩌면 판타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캐나다 같지 않은 곳, 드라마 <도깨비>의 찬란한 기운이 여전한 곳, 퀘벡 시티 한가운데 우뚝 선 프랑스 고성 스타일의 샤토 프롱트낙 호텔(Fairmont Le Cháteau Frontenac)과 세 인트로렌스강을 바라보고 서니 문학보다 훨씬 더 문학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해발 100m, 4.6km 길이의 성벽보다 더 굳건한 퀘벡의 첫인상은 캐나다의 이미지를 바꿈으로써 나를 환대했다.

지난 1월 25일, 125주년을 맞이해 대대적인 행사를 연 샤토 프롱트낙 호텔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400년 역사의 도시 중에서도 단연 상징으로 꼽힌다. 오래된 호텔이 존중받는 건 종종 역사의 목격자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 처칠 등이 여기서 퀘벡회 담을 열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히치콕이 <나는 고백한다>를 촬영했고, 그레이스 켈리, 폴 맥카트니 등의 명사들이 묵었다. 지난 2015년 수십억 원을 들여 리노베이션한 샤토 프롱트낙 호텔은 125주년인 올해 내내 과거의 영광을 기릴 예정이다. 사실 수리한 흔적을 찾는 것보다 <도깨비>에 등장한 황금색 우체통을 찾는 게 훨씬 쉽다. 문제의 회전문을 돌아 호텔에 들어서면, 대사가 들리는 것 같다. “신의 한 걸음 한 걸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누가 그랬을까요?” 글쎄, 누가 퀘벡 시티를 드라마에 등장시킬 생각을 했을까? ‘현대의 문학’으로 등극한 태평양 건너의 드라마가 이 유서 깊은 호텔에 청춘의 기운을 수혈한 셈이다.

퀘벡국립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의 작품.

드라마 한 편이 퀘베쿠아(퀘벡 현지인을 이르는 프랑스어)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는, 올드 타운의 프티샹플랭(Petit-Champlain)을 거닐다가도 실감할 수 있다. 퀘벡 시티가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성벽 도시라니 프랑스 시골을 닮은 프티샹플랭은 가장 오래된 번화가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지은탁이 튀어나온 빨간 문은 관광객들의 포토존이 되었지만 실제는 보라에 가깝기 때문에 차라리 토끼의 출몰을 알리는 표지판 찾기가 더 쉽다. 겨울이면 눈 때문에 마을이 회색으로 변하는 퀘벡은 그래서 대체로 지붕이 컬러풀하고, 겨울이 길기에 대부분의 집이 햇볕이 잘 드는 11시 방향으로 지어졌다. 상점이 대부분 반지하와 1층으로 낮게 구성된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길에 서서 반지하의 양복점을 한참 들여다 보다 주인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손짓을 했다. 평생 그곳에서 일했다는 그는 딸이 ‘고블린(<도깨비>의 영어 제목)’의 팬이라고 했다. (중국인 가이드도, 호텔 파티에서 만난 몬트리올 방송국에서 왔다는 모녀도 ‘고블린’ 이야기다.) 그리고는 페리를 타고 강 건너 레비섬에 가 보라고 했다. 유빙을 헤치며 천천히 나아가는 배 갑판에서 보는 퀘벡의 올드 시티가 ‘진짜’라는 것이다. 물론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퀘벡 시티 외곽에는 스키와 개썰매 등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양복점 사장님은 내게 퀘벡이 처음이냐고 물었지, 캐나다가 처음이냐고 묻지 않았다. 퀘벡은 독자적인 도시다. 17세기 초 프랑스 정착촌이 처음 들어선 이래 1763년 프랑스가 영국에 완전히 백기를 들기까지 ‘뉴 프랑스(프랑스 식민지)’였다. 미국과 캐나다의 경계인 세인트로렌스 강변에 위치한 퀘벡 시티는 그래서 대륙으로 통하는 진입 통로이자 강을 거슬러 진출하려는 적들을 격파하기에도 최적의 도시였다. 성벽과 요새가 유명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만큼 부침도 많았을 테지만, 이는 퀘벡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하는 심정적 동력이 되었다. 퀘벡은 비행기로 2시간 거리인 토론토와 자신들을 철저히 분리한다. 90% 이상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퀘베쿠아들은 자동차 번호판에 ‘나의 뿌리를 잊지 말자’는 문구를 써둔다. 프티샹플랭의 옆 골목, 플레이스 로얄(Place Royale)은 뉴 프랑스 초기 주민들의 모임 장소였기 때문에, 그 옆의 프레스코화에는 퀘벡 역사의 위인 15인이 실물 크기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명소가 되었다.

한편 퀘벡국립미술관(Musée National des Beaux-Arts du Québec)은 퀘벡과 캐나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주선한다. 퀘벡에서 캐나다로 증폭되는 예술사를 일별해두었을 뿐 아니라 한때 감옥으로 사용되던 건물과 신식 건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양새다. 캐나다의 미술사가 아카이빙된 이곳에서 나는 몬트리올 출신 작가 데이비드 알트메드(David Altmejd)의 아방가르드한 작품부터 캐나다발(發) 디자인까지 훑을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누이트 미술이었다. 이누이트계 부족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에스키모로 통칭하는 미국과는 달리 캐나다에서는 이누이트를 퍼스트 네이션, 메티스와 함께 독립적인 캐나다 원주민의 하나로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덕분에 국제사회 원주민 권리 보장의 성공 사례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누이트 아트가 이를 우회적으로 대변한다. ‘퀘벡’도 원주민어로 ‘강이 좁아지는 곳’이라는 뜻. 세상 어떤 곳에도 삶이 있고, 어느 순간에도 예술은 있다.

올드 타운에서 바라본 샤토 프롱트낙 호텔.

미술관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 <도깨비> 순례지 중 하나인 아브라함 평원(Plaines d’Abraham)을 걸어보기로 했다. 한국의 도깨비가 점령하기 훨씬 전인 18세기, 이 평원에서는 7년 동안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여름이면 캐나다 최대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이 여기서 열린다는 게 꼭 거짓말 같다. 끝없이 눈 덮인 평원을 걷다 문득 불길하게도, 처음 퀘벡에 온 탐험가가 폭설 때문에 부두에서 아브라함까지 도보로 꼬박 하루가 걸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걷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대부분은 크로스컨트리로, 스키로, 스노슈잉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늘을 날카롭게 찢는 태양 아래 완만한 경사, 종아리까지 덮인 눈까지, 겨울 스포츠를 즐기기엔 천상의 날씨였지만, 낯설기도 했다. 호텔 옆 테라스 뒤프랭에 자리한 카페테리아 오 1884의 터보건도 마찬가지였다. 이 고풍스러운 호텔 옆에 웬 놀이 기구인가. 한 일행은 최대 시속 70km로 달리는 터보건이 끝내주게 재미있다고 추천했지만, 나는 이미 난생처음 퀘벡주의 시골에서 40분 동안 다섯 마리가 끄는 개썰매를 탄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인트로렌스강에서 불어닥치는 엄청난 칼바람을 맞으며, 언젠가 여름에 이곳에 다시 와서 강을 등지고 앉아 아이스커피 마시는 상상을 했다.

샤토 프롱트낙 호텔의 지하 1층에서 발견한 사진은 예로부터 퀘벡이 대표적인 겨울 휴양지였음을 시사한다.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화를 신고 (아마도 샤넬을 입고) 앉은 두 숙녀와 칵테일을 서빙하는 웨이터. 퀘벡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보통 영하 20도, 체감온도는 영하 40도에 눈까지 잦다. 퀘벡 사람들이 추위에 적응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프렌치프라이에 치즈를 잔뜩 얹은 푸틴 같은 고열량 음식을 먹는다 해도 11월부터 4월까지 1년의 절반이 겨울인 나라를 집에서만 살아내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다 다 함께 야외에서 겨울을 신나게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매년 1월 말에 열리는 윈터 카니발은 1800년대 후반 그렇게 태어난 축제다. 삶을 즐기고자 하는 ‘아모르 파티’식 긍정성은 얼음으로 성을 세우고, 조각 작품을 만들고, 슬라이딩 레일을 건설하고,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의 존재로 느껴진다. 그러다가 심신의 따뜻함을 기리는 센튀르 플레체를 허리에 두른 ‘겨울의 왕’ 보놈을 만나 포옹이라도 하게 된다면,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편이다.

겨울이 되면 퀘벡 곳곳은 겨울 스포츠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며칠 후 서울. 강렬한 추위를 경험했기 때문인지, 몸살 기운이 엄습했다. 따끈한 물에 메이플 시럽을 탔다. 달콤한 향기가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기억을 소환했다. 거의 모든 음식에 메이플 시럽을 넣은 달짜근한 음식, 아이스 칵테일의 달콤 쌉싸름한 끝 맛, 나이아가라보다 더 높다는 몽모랑시폭포, 얼음 조각으로 만든 탱탱(Tintin) 캐릭터를 세워둔 프티샹플랭의 상점, 20세기 초의 올드 퀘벡 풍경과 눈 덮인 언덕을 유화로 그려낸 퀘벡의 모더니즘 화가 장 폴 레미욱스(Jean Paul Lemieux)의 그림… 지금은 소설가 백민석의 에세이에서 본 문장이 떠오른다. “어떤 도시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에 대한 글을 써라. 이 도시에 대해 사나흘 고심해 글을 쓴 일이, 관광객으로 도시를 돌아다니며 생긴 애정보다 더 많은 애정을 갖게 했다.” 비로소 나만의 퀘벡 시티를 즐기는 완벽한 리스트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