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하라겐야의 비전

2018.04.26

by VOGUE

    하라겐야의 비전

    일본디자인센터 대표이자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 하라 겐야. 미래의 주거 환경을 제안하는 프로젝트 ‘하우스비전’의 수장도 겸한다.

    “오늘 수트는 어디 거죠?” 검은색 수트 차림으로 나타난 하라 겐야(Hara Kenya)에게 내가 물었다. 하라 겐야는 “무인양품(MUJI)이라 답할 줄 알았습니까? 구찌입니다”라며 웃었다. “다들 내가 무인양품처럼 군더더기 없는 집에 사는 줄 알죠. 제 아내는 레이스를 무척 좋아합니다. 무슨 뜻인 줄 알겠죠? 어찌 보면 전 최악의 클라이언트와 살고 있습니다.(웃음)” 디자이너의 디자이너라 불리는 하라 겐야는 작은 농담을 즐겨 한다.

    하라 겐야는 하우스비전-서울의 세미나를 위해 방문했다. 하우스비전은 세미나, 서적, 전람회 등의 방법을 통해 미래의 주거 환경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다. 2011년 하라 겐야가 일본에서 처음 기획했다. 현재는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대만 등 아시아 전역에서 진행하며, 지난 2월 21일 서울디자인재단과 일본디자인센터의 MOU 체결을 통해 서울도 참여한다. 서울은 최욱 건축가를 비롯해 김인철 그래픽 디자이너, 유보라 자동차 디자이너, 김치성 브랜드 디자이너, 백빛나 경영 전략 컨설턴트, 나훈영 라이프스타일 프로듀서 등 전문가 20여 명이 기획위원이다.

    하라 겐야는 기획위원들과의 세미나에 이어 3월 24일에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살림터 3층에서 관객과 함께 프레젠테이션과 대담을 가졌다. 스타 디자이너인 만큼 강연장은 정원의 두 배가 넘는 500여 명의 사람들로 붐볐다. 한 디자인 전공 학생은 휴대폰을 켜고 전 과정을 녹화했으며, 질문 시간에는 하우스비전 말고도 하라 겐야의 디자인 철학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하라 겐야는 1초도 낭비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촘촘히 진행했다. 군더더기 없는 설명과 시간 활용, 당연하지만 하라 겐야와 그의 디자인은 닮았다.

    동네 마을회관을 개조한 요시노 향나무집. 1층에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툇마루를, 2층에는 외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배치했다.

    그는 왜 하우스비전을 기획하게 됐을까? 주거 환경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무인양품은 1980년 처음 시작했다. 거품경제의 일본이 사치와 화려함에 젖어 있던 시기임에도 무인양품은 간소함을 지향했으며, 2002년 다나카 이코(Tanaka Ikko)로부터 하라 겐야가 아트 디렉션을 이어받으면서 이를 극대화한다. 처음 40품목으로 시작한 무인양품은 현재 7,000품목이 있다. 하라 겐야는 생활 전체를 망라하는 상품군과 주택 판매 사업도 하는 무인양품 안에서 미래를 그리다가 하우스비전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후 10여 차례의 세미나를 거쳐 2013년 도쿄에서 ‘새로운 상식으로 집을 만들자’란 주제의 하우스비전 전람회를 열었다. “하우스비전은 제게 다른 사람의 수주가 없는 첫 일이었습니다. 종이, 첨단 섬유 등에 관한 전시 기획은 많이 했지만 모두 클라이언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우스비전은 제가 기획하고, 야구장 크기의 공간을 빌리고, 기업의 지원을 받고, 건축가에게 설계를 부탁하고, 관객에게 입장료를 받는 등 디자이너로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습니다. 때론 비판도 받습니다. 디자이너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거죠. 하지만 디자인은 무언가의 형태를 바꿔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2013년 하우스비전-도쿄 전람회를 마치고 “특별한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동네 마을회관을 개조한 요시노 향나무집. 1층에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툇마루를, 2층에는 외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배치했다.

    하라 겐야에게 주거와 도시는 욕망의 집합체다. “30여 년 전 도쿄보다 지금의 도쿄가 훨씬 깨끗합니다. 더 이상 길거리에 침을 뱉는 사람이 없죠. 벌금을 걱정하기보단 깨끗한 거리를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전봇대의 뒤엉킨 전선은 그 도시가 전기를 많이 쓰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도시를 보면 사람들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보입니다.” 하라 겐야에게 서울은 어떤 욕망의 도시일까. “한쪽엔 굉장히 현대적이고 보안이 철저한 아파트가 있고, 한쪽엔 오래된 건물마다 불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옥탑방을 증설했습니다. 멋진 곳에 살고 싶다는 욕망과 공간을 더 쓰고 싶다는 욕망이 대조적으로 드러나 보였습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격차가 주거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울이든, 도쿄든 공통된 욕망이 있다. 비슷비슷한 집 형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주거 환경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전시 주제도 ‘새로운 상식으로 집을 만들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다들 비슷한 구조의 집에 살지만, 이런 욕망이 변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하우스비전은 그들의 능동성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겠지요.”

    하우스비전-도쿄의 전람회장 풍경. 바람이 통하면서 햇빛은 막는 천막에서 관객들이 쉴 수 있었다. 야구장만 한 크기의 전람회장에는 창의적인 실제 크기의 건축 모형을 설치했다.

    2016년 하우스비전-도쿄의 전시 주제가 ‘Co-Dividual’인 이유다. 코디비듀얼은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과 공동, 함께의 뜻을 나타내는 ‘Co’의 합성어다. 도쿄를 비롯한 세계는 점점 고령화되고, 1인 가구의 비율이 높아진다. 더 이상 분할할 수 없을 만큼 작은 단위의 가구가 된 이들, 다른 세대를 연결하는 주거 환경을 하우스비전에서 제시하고자 했다. 숙박 공유 기업 에어비앤비와 건축가 하세가와 고가 선보인 요시노 향나무집(Yoshino-sugi Cedar House)이 좋은 예다. 1층은 널찍한 툇마루가 있어 주민 누구나 쉽게 교류할 수 있다. 2층은 외부인이 쓸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다. 외부인과 마을 주민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지향한 것. 작은 마을을 여행지로 알리는 효과도 있다. “하우스비전의 전시가 끝나고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우스비전이 실생활에 작으나마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기쁩니다.” 하라 겐야가 꿈꾸는 농업과 기술력이 결합한 주거도 ‘코디비듀얼’의 갈래다. “단순히 전원주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A지역에 사는 딸이 발전된 기술을 이용해 B지역에 사는 아버지의 집안 농장을 관리해준다면 어떨까요? 딸이 안부 전화를 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우스비전은 기술력을 응용한 창의적인 미래 주거를 꾸준히 선보였다. 파나소닉과 건축가 나카야마 유코가 협력한 스파이럴 하우스(Spiral House)는 사물인터넷(IoT) 기술이 주요 장치다. 달팽이처럼 동그랗게 말린 집의 벽은 하얗게 비워져 있다. 벽은 스크린이 되어 날씨와 각종 생활 정보를 확인하는 창으로,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쇼핑할 수 있는 퍼스널 쇼퍼로 활약한다. 하라 겐야가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았다는 아이디어는 냉장고 하우스(House with Refrigerator)다. 현관문 옆에 작은 문이 하나 더 있다. 집 밖에서 열 수 있는 냉장고 택배함이다. 택배를 받기 힘든 1인 가구를 위해 택배나 세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문을 설치했다. 어떤 물류가 얼마만큼, 언제 입출고됐는지 데이터도 보여준다. “냉장고를 밖에서 열 수 있는 집이라니,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주거 중 하나도 밖과 안이 연결된 형태입니다.” 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 도시는 태풍이 잘 불지 않고 비가 수직으로 오기에 벽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벽이 없는 주거에 들어서니 통풍이 잘되고 시야가 트여 무척 좋았습니다. 저는 바깥과 안을 차단하는 삶이 아시아인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벽이 없어도 되는 집을 높은 수준의 기술력으로 이뤄낸다면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요? 유럽 스타일의 아파트가 스탠더드가 됐지만, 아시아도 새로운 스탠더드를 전파할 수 있을 겁니다.” 벽이 없는 집을 꿈꾸는 하라 겐야처럼 하우스비전은 실험적인 주거 환경의 장이다. “일본 타일 회사 릭실(Lixil)과 건축가 반 시게루(Ban Shigeru)가 ‘오픈 하우스(Open House)’를 선보였습니다. 배관 설비를 집 바닥이 아닌 기둥처럼 하나로 묶어 원하는 곳에 설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집을 ‘플레잉(Playing)’할 수 있죠. 천장과 벽도 지퍼가 달린 소재로 마감해 쉽게 여닫을 수 있습니다. 획기적이죠. 하우스비전은 바로 상품화할 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을 깸으로써 새로운 주거 환경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하우스비전-도쿄의 전람회장 풍경. 바람이 통하면서 햇빛은 막는 천막에서 관객들이 쉴 수 있었다. 야구장만 한 크기의 전람회장에는 창의적인 실제 크기의 건축 모형을 설치했다.

    하라 겐야가 개인적으로 가장 만들고 싶은 주거는 호텔이다. “하우스비전은 집뿐 아니라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공간을 대상으로 합니다. 제가 계속 이동을 하기에 호텔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처럼 앞으로 일과 휴식은 분리되지 않을 겁니다. 일하면서 휴가를 즐기고 휴식하면서 일하는 상황이 온다면 호텔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기회가 되면 도쿄 같은 대도시가 아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 재능 있는 건축가와 호텔을 짓고 싶습니다.” 10여 차례의 세미나와 인터뷰 등 모든 일정이 끝난 저녁, 호텔로 돌아가는 하라 겐야에게 물었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하라 겐야는 웃었다. “괜찮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피곤하면 찜질방에 자주 간다지요? 그런데 찜질방에서 아직도 양 머리를 합니까?” 그는 마지막까지 상대를 배려한다.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김영훈,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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