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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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여행

2018-04-26T21:27:08+00:00 2018.05.03|

늘 꿈꾸지만 늘 미루게 되는 것. 엄마와 여행 아닐까. 엄마와 여행을 떠나보면 비로소 엄마라는 호칭 뒤에 감춰져 있던 독립된 존재로서 한 사람이 보인다. 마흔이 넘어서야 엄마와 여행을 감행한 두 필자의 ‘나이 든 딸과 나이 든 엄마의 여행기’.

다시 엄마와 여행을 꿈꾸다 여자들이 40~50대에 꿈꾸는 일 중 하나는 엄마와의 여행이다. 내 경우 어느 날 갑자기 여행을 시작했다. 10년 전쯤이었으니 두 살 터울 언니와 나는 40대 중반, 엄마는 70대 초반이었다. 뭐, 대단한 여행은 아니었다. 50대 여고 동창들이 잘 떠나는 유럽 여행도 아니고, 럭셔리한 크루즈 여행도 아니었다. 계절 따라 바뀌는 아름다운 풍경과 서울에선 맛볼 수 없는 먹거리를 찾아 떠나는 소박한 국내 여행이었다. 숙박은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펜션에서 해결했고, 여의치 않으면 시골집 민박을 이용했다. 노부부가 창고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고로쇠 물과 산수유 열매는 사줘야 했지만. 언젠가는 영주 부석사 근처 황토방 펜션에 들어갔는데 밤

9시 취침을 종용하는 볼 빨간 아저씨와 말다툼 끝에 그곳을 빠져나와 근처 식당 방에서 겨우 잠을 청한 적도 있다.
잠자리는 어차피 편하지 않으니 우리의 목표는 자연스레 먹거리로 향했다. TV에서 소개하는 지방의 맛집들이 있는 곳, 제철 식품을 어디서나 실컷 맛보고 시장에서 사올 수 있는 곳, 특히 엄마가 좋아하는 제철 먹거리가 풍성한 곳들이었다. 여행의 시작도 엄마가 일기장에 아무렇게나 써놓은 ‘새우 한창’이란 메모 덕분이었다. 당시는 농어촌 이곳저곳을 생방송으로 소개하는 프로가 처음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날은 안면도 편이었는데 꽃게와 꽃새우를 TV 화면 가득 보여주며 리포터가 연신 ‘지금 안면도는 새우가 한창’이라고 떠들어댄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는 그 내용을 네 글자로 압축해 적어놓고 시장에 가고 없었다. 언니에게 메모를 보여주니 ‘탁월한 카피’라며 깔깔깔 웃어댔다. 엄마가 새우를 그리 먹고 싶고, 지금 한창이라니 우리는 며칠 후 안면도 여행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엄마와 딸들의 여행. 떠나는 시점은 언제나 <보그> 마감이 끝난 며칠 후였다. 매달 마감의 절정에서 전화를 걸면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 미리 머릿속으로 답사한 그달의 여행지를 알려줬고, 마감이 끝나자마자 우린 2박 3일 일정으로 훌쩍 떠났다. 신통하게도 늘 아프다는 엄마도 이때만은 팔팔했고, 놀러 가기 좋아하는 언니는 내비게이션 없이도 장거리 운전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나에게는 그야말로 꼭 필요한 힐링 여행. 마감 즈음 야근을 하다 보면 혈압이 올라가며 스트레스가 절정에 달했고, 나는 멋진 풍경과 한적한 드라이브, 맛난 먹거리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또 한 달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무작정 언니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살려줘 언니야, 이번엔 어디로 갈까?”

우리는 그 후 몇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별로 없다. 꽃 피는 봄엔 무조건 섬진강변으로 떠났다. 광양 매화마을과 구례 산수유마을에서 꽃구경을 마치면 식도락은 주변 맛집에서 해결했다. 섬진강휴게소 식당의 꼬막무침은 삶은 꼬막을 초장과 오이채에 버무려 ‘매콤새콤’ 정말 맛있었다. 때론 해안선을 타고 보성 차밭에 들렀다 강진에서 한정식을 한 상 가득 먹기도 했다. 삼합과 육회엔 젓가락도 못 대 주인아줌마의 핀잔을 들어야 했지만 고기와 생선, 나물 반찬들로 가득 차린 한 상은 그날 마침 생일인 언니의 생일상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우리 세 사람의 건강 상태가 좋을 때면 욕심을 부려 해남 땅끝마을과 미황사를 향했다. 미황사는 남해 최고의 크고 아름다운 사찰로 배배 꼬인 아름드리 암수 은행나무들로 유명하다. 이렇게 국토 장정을 떠날 때마다 감탄하는 게 있다면 바로 전국의 촘촘한 고속도로 시스템. 도로망이 어찌나 잘 갖춰져 있는지 아무리 먼 해남 땅끝마을, 거제와 남해라도 대여섯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주말은 사정이 다르다. 죽죽 뚫린 고속도로로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평일과는 딴판. 고속도로 곳곳이 주차장인 주말을 피해 우린 언제나 평일에 한적하게 떠났다.

여름엔 엄마를 위해 남해나 거제 리조트로 큰맘 먹고 놀러 갔다. 더위에 약한 엄마를 리조트에서 푹 쉬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번은 남해의 개인 별장을 빌려 놀러 갔는데 개인 풀장이 따로 있었다. 다들 더위에 지쳐 축 처져 있을 무렵 여동생이 강아지들을 풀장에 넣어보자고 제안했다. 루씨, 루팡이 생전 처음 풀장에서 헤엄치는 모습이라니! 겁에 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절박하게 헤엄치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우리 모두는 폭소 만발. 네 모녀가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으니까.

먹거리가 풍성하고 단풍으로 알록달록한 가을이야말로 여행 다니기 가장 좋은 계절. 전어 철이면 어김없이 가는 안면도, 사과 철에 떠나는 영주 부석사와 소수서원, 안동 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도산서원, 양반들의 기와집들이 평민들의 초가와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선비촌 등은 우리의 단골 여행지였다. 엄마와 처음 가을 여행에서 있었던 대추나무 사건(?)이 생각난다. 그때 선비촌 기와집 뒷마당엔 집집마다 대추나무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한눈파는 사이, 갑자기 엄마가 하하하 웃으며 대추나무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대추나무에 매달려 대추를 따는 엄마를 보며 우리가 까르르 따라 웃자 어디선가 아주머니 한 분이 달려와 대추를 따면 안 된다고 말렸다. 늘 얌전하기만 한 엄마는 웬일인지 말을 듣지 않고 나무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고, 우리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낯설고 황당해 한참을 더 웃었다. 누구보다 남의 말을 잘 듣는 칠순의 엄마지만 어린 시절 동심으로 돌아가 대추를 따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대추나무 건은 뇌리에 꼭 박혀 엄마를 추억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됐다.

우리가 엄마와 여행을 다니던 그 시절 내가 만들던 잡지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로케이션 화보들이 잔뜩 실렸다. 한국의 절경과 시골 풍경이 풍성하게 실린 글로벌 매거진 <보그>! 매화가 만발한 광양 매화마을, 샛노란 꽃이 활짝 핀 구례 산수유마을, 순천 갈대밭, 진부 장전계곡, 남해 동백나무 숲, 거제 몽돌해변, 영주 사과밭… 나의 종용으로 패션 에디터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의 로케이션 화보들로 가득했던 <보그>였다. 새벽같이 출발하느라 에디터들과 스태프들이 고생 많았겠지만 <보그> 독자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물론 딸들도 더없이 행복했다. 경희, 명희, 문희. 이름도 비슷, 체격도 비슷, 얼굴도 비슷한 우리 자매들이 철들어 엄마를 모시고 떠난 여행에서 우린 엄마의 진짜 모습을 발견했다. 곱고 얌전한 엄마는 들르는 곳마다 인기 만발이었고 “아이고, 아직 예순밖에 안 돼 보이네” “참, 곱네 고와. 딸들이 엄마만 못하네”, 딸을 둔 할머니들은 특히 언니와 나에게 칭찬 일색이었다. “엄마랑 여행 온 거야? 나도 50대 딸이 있는데 여행은 같이 못 가봤어. 딸들이 엄마와 여행을 다니고. 정말 착하네!”

칠순의 나이에 ‘새우 한창!’ 같은 순발력 넘치는 멘트도 터뜨릴 줄 알고, 순박한 어린아이가 되어 대추나무에 무작정 매달리고, 여행 가서는 그곳 음식도 맛나게 잘 먹고, 어디서든 투정하지 않고 잘 웃고 잘 주무시던 우리 엄마. 모르긴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엄마는 누구에게나 예쁨 받으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거다. 언젠가 다시 만날 딸들과 하늘나라 봄꽃 여행을 기다리며. —이명희(두산매거진 자문위원)

51년생 정희 씨 정희 씨는 대한민국 아줌마들 중 9할이 가지고 있다는 등산복을 한 번도 구입한 적 없다. 입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그 후로도 25년 동안 거의 누워 살았다. 덕분에 동창들이 꽃놀이, 단풍놀이로 중년을 즐길 때, 정희 씨는 시집살이의 끝을 간병살이로 마무리했다. 등산복 하나 없는 정희 씨는 그래서, 어디 가자는 제안을 좀처럼 거절하지 않는다. 스타필드건, 경복궁이건, 정동진이건, 한강공원이건, “같이 가자”는 말에 군말 없이 따라 나선다.

아니, 정희 씨는 거절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혹은 원래 그랬는지 변했는지는 모른다. 육아를 부탁하는 나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던 그녀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육아를 결심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짐작도 못한 채, 그저 함께 걸어주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자신의 시간을 내주는 것이 엄마가 된 딸을 지지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정희 씨의 가장 솔직하고 뜨거운 방식이었음을, 10년 전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길은 정희 씨의 삶을 바꾸어놓았지만 동시에 바꾸지 못했다. 정희 씨는 여전히 여행을 가지 못했으니까. 평생 내던지지 못한 ‘며느리 사표’를 ‘할머니 사표’로 바꾸어 품고 있을 뿐이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어때?” 일평생 횡재수라고는 지독하게 없었던 내가 에디터 생활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럭키 드로에서 기적처럼 건져 올린 행운을, 그녀와 나누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단둘이’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정희 씨는 딱히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나 아이들은 어쩔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함께 간 미용실의 사장에게 딸과 함께 여행을 가게 됐다고 자랑하는 걸 보고서야, 정희 씨가 침묵으로 나의 제안을 승낙했음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파마하는 내내 정희 씨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예순여덟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딸과 여행을 가게 된 정희 씨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나는 서둘러 쿠알라룸푸르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정희 씨는 세련된 여자가 아니다. 내가 이제껏 다른 친구들처럼 정희씨에게 등짝 한 번 얻어맞은 적 없는 걸 보면 드세지도 않다. 차라리 수줍고 소박하며 순수하다. 자타 공인 무뚝뚝함의 화신인 나의 유전자도 온전히 정희 씨의 것이다. 정희 씨는 중학교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딸 자랑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시원하게 칭찬 한 번 한 적도 없었다. 그런 그녀는 손녀 진료를 봐준 의사에게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하루 종일 친구의 자식 자랑 레퍼토리를 싫은 내색 없이 들어주는 할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종종 나를 못 견디게 했다. 호텔에서도, 식당에서도, 손님이 아니라 직원처럼 구는 걸 볼라치면 부아가 치밀었다. 그 화가 ‘친절한 정희 씨’가 아니라, 정희 씨의 촌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삶 전체를 겨냥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곤 했다.

여행 첫날, 호텔 VIP 라운지에서 밥을 먹으며 말했다. “엄마, 딸이 참 어이없고 서운할 때도 많았겠어.” 정희 씨는 꼬치 요리인 사테를 먹으며 말했다. “이제 알았어? 지가 좀 배웠다고, 좀 안다고, 이렇게 면박을 주나 싶었다.” 인정한다. “왜 그렇게 해?” “왜 그런 것도 몰라?” “왜 이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해?” 같은 말. 하지만 정희 씨는 이를테면 아니 에르노가 쓴 책 <한 여자> 속 엄마처럼 “네가 다른 애들에 비해 넉넉하지 못하다고 입에 오르내리는 건 싫어”라는 식의 직언을 한 적도 없었다. 다만 그녀들의 공통점이라면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 전부를 내게 주는 것”을 가장 깊은 욕망으로, “딸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강한 희망으로 삼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날도 정희 씨는 딸이 ‘좀 배우고 잘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본인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그저 양고기가 생각보다 입맛에 맞는다고 했다.

정희 씨와의 여행은 우리를 가족 구성원의 일부가 아니라 한 엄마와 한 엄마, 여자와 여자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했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도, 사진을 찍다가도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 왜 아빠랑 결혼했어?” “넌 왜 정 서방이랑 결혼했어?” 스무 살 무렵인가, 난 정희 씨와 그녀의 남편이 정말 어울리지 않음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자부했다. 얼마 전에 만난 점쟁이가 하는 말이, 워낙 나의 아버지가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분이라, 엄마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이마저도 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덮어놓고 점쟁이를 신뢰해버렸다. 하지만 눈물 바람까지 하고(점술가와 상담 중에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그 점괘는 정희 씨뿐 아니라 거의 모든 엄마들에게 해당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그늘에서 자라, 더한 시집살이를 하면서, 당신의 딸은 당신처럼 살지 않게 하겠다고 이 악물고 살았지만, 그렇게 키운 딸은 저 혼자 잘났고, 급기야 그 잘난 자식의 자식들까지 도맡게 된, 근대의 가치관과 현대의 현실 사이에서 완벽하게 자신을 불태우며 없애야 했던 세대의 삶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정희 씨가 그렇게 사라져버릴까 두렵다.

정희 씨는 충실하고 부지런한 관광객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유난 떠는 트윈 타워는 신경질이 날 정도로 속 빈 강정이었지만 실망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 더운 날, 시내를 가로질러 우버를 타러 가는 와중에도 투덜거리지 않았다. 잘 시간이 훌쩍 지나도 야시장에 가자면 선뜻 따라나섰고, 아무리 향이 강한 락사(말레이식 우동)도 맛있게 먹었다. 이런 정희 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평소 나라면 절대 거들떠도 안 봤을 반딧불 투어를 신청했다. 다른 일행과 함께 미니버스로 왕궁이나 사원 같은 데를 다니다가 밤에 나룻배를 타고 반딧불을 보는 코스였다. 정희 씨는 아이 넷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와도, 대체 여기에 왜 왔을까 싶은 청년 네 명과도, 나보다 훨씬 빨리 친해졌다. 이동 중 힌두교의 수많은 신에 대한 투어 가이드의 강의를 열심히 듣던 정희 씨는 깜짝 퀴즈 답까지 맞혔고, 상품으로 받은 아이스크림을 옆에서 내내 졸고 있던 내 입에 넣어주었다.

요즘도 20년 전에 만난 어느 기획사 대표의 말이 종종 떠오른다. “에스테틱에서 관리를 받고 있으면, 시골에 있는 엄마 생각이 나요. 미안하죠. 가장 미안한 건 엄마의 삶과 내 삶이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에요.” 정희 씨의 삶도, 같은 집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과 달랐다. 나는 정희 씨와 함께 산 지난 10년 동안 ‘미안함’이라는 감정의 원형이 무엇인지 경험했다. 좋은 데 출장이라도 간 날이면 어김없이 정희 씨 생각이 났지만, 반쯤 쓰다 만 엽서는 번번이 호텔 방에 버려졌다.
둘만의 여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고 생각한 건, 1년 6개월 전 그녀가 심한 어지럼증으로 쓰러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에 다녀왔더니 정희 씨가 누워 있었다. 아픈 게 아니라 술을 마신 거였다.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에 취한 정희 씨가 말했다. “니가 어른이 되면, 우리 둘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자.” 어른이 된 나는 현대사회를 구동하는 충실한 일꾼으로 사느라, 정희 씨는 그 일꾼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피차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몇 달 전 정희 씨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시골 작은 교회에 다니던 소녀는 독실한 불교 신자의 아들을 만나 절에 다녔다. 그러다 시어머니가 돌연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때, 정희 씨는 일종의 환멸을 느꼈다. 그런 정희 씨가 돌연 성당에 가겠다고 했을 때, 식구들은 멋모르고 그 결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느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던 날, 장미를 사 들고 간 나는 어쩌면 그녀가 남은 생의 평온과 위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후 대책을 자식들에게 제안하고자 성당에 다니기로 한 것임을 깨달았다(정희 씨는 매년 열 번 정도의 제사를 지낸다). 여전히 정희 씨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희 씨는 이슬람 사원에서 히잡을 뒤집어쓴 채 열심히 사진을 찍었고, 시원치 않은 허리와 무릎으로도 힌두 사원의 수백 개 되는 계단을 끝까지 씩씩하게 올라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정희 씨는 영화 <신과 함께>를 봤다. 울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그 영화를 보고도 정희 씨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소설과 영화를 지독하게 좋아하는 정희 씨도 어느덧 세상에 울 일이 얼마나 많은지 너무 잘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과 함께>의 순진무구한 효심 역시 매일매일 자식 손자들과 전쟁을 치르며 사는 입장에서는 와닿았을 리 만무하다. 한편 그 옆에서 나는 <보디가드>를 보고 있었다. 1992년에 개봉한 바로 그 영화. 그때 나는 열여덟 살, 정희 씨는 마흔두 살이었다. 내가 당시 케빈 코스트너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희 씨 몰래 영화를 보러 갔다가 그녀의 뒷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여자를 봤던,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날의 사건도 잇따라 기억났다. 그때 서둘러 극장을 빠져나가던 그녀는 정희 씨였을까, 아니었을까.

여전히 묻지 못했다. 다만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고 예뻤던 그날의 정희 씨를 떠올릴 뿐이다.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하고, 권태로운 희망으로 그 시절의 하루하루를 살던 51년생 정희 씨. 여행의 끝에서야, 나는 내 시간의 한가운데 정희 씨를 두었다. 내 삶의 조연이 아니라 그녀 삶의 주연으로서의 정희 씨를, 내 기억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했다. 어째서 나는 정희 씨의 삶을 공감하는 척 이해하거나 납득하려고만 했을 뿐, 그녀의 자리에 나를 온전히 대치시켜본 적은 없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우리 딸 덕분에 내가 이렇게 좋은 구경을 다 하는구나!”라는 식의 입에 발린 소리를, 정희 씨는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이번 광주 출장, 우리 둘이 같이 갈까?” —윤혜정(국제갤러리 에디토리얼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