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생 로랑의 수장 안토니 바카렐로와 <보그>의 만남

2018.05.08

by VOGUE

    생 로랑의 수장 안토니 바카렐로와 <보그>의 만남

    안토니 바카렐로는 패션계의 전설적 하우스 중 하나인 생로랑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갈까. YSL의 대표적 관능미를 되살리고 아주 큰 그림을 그리면서 꾸뛰르와 스트리트 감각을 믹스하는 디자이너를 〈보그〉가 만났다.

    MASTER OF THE HOUSE 지난해 12월 생로랑의 레프트 뱅크 아틀리에에서의 안토니 바카렐로.
    직접 디자인한 에비에이터 가죽 재킷을 입고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한 주 앞둔 금요일 오후, 어둡고 추운 파리는 텅 비어가고 있었다. 생제르맹데프레의 위니베르시테가(Rue de l’Université)에 있는 생로랑 스튜디오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는 힌트는 안뜰에 넓게 자리한 거대한 전나무뿐이었다. 2층 아틀리에의 통유리를 통해 반짝이는 전나무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생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Anthony Vaccarello)는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이자 디자인 파트너 아르노 미쇼(Arnaud Michaux), 막강한 스튜디오 팀 다섯 명, 재봉사들과 함께 하루 종일 2018 F/W 컬렉션(지난해 9월 심장을 멈추게 한 스펙터클한 2018 S/S 컬렉션의 후속작)을 위한 피팅에 전념하고 있다.

    자그마한 체구의 바카렐로는 자신의 유니폼인 검정 진과 낡은 흰색 스니커즈, 녹색 YSL 위니베르시테(Université) 티를 입고 있었다. 시퀸이 박힌 컬러풀한 꽃무늬 원단을 가위질한 다음 그 천 조각을 피팅 모델 몸 위에 핀으로 고정하고 이어서 더 많은 가위질과 천 배치가 이루어졌다. 모델은 멋지게 각진 1940년대 벨벳 삼각 필박스 햇을 뽐냈다. 바카렐로는 그 모자를 최근 뉴욕 리서치 여행 때 발견했다(쇼에선 그 모자를 다른 것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그녀가 워킹을 할 때 바카렐로의 귀여운 프렌치 불독 강아지 니노가 휙휙 움직이는 샌들의 프린지를 물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아틀리에는 완벽하게 우아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고요했고 모든 것이 밝았다. 휴가 전에 많은 것을 끝내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별로 놀랍지 않았다(바카렐로와 미쇼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하루 정도 고향인 브뤼셀로 돌아갔다가 며칠간 스키를 타러 스위스에 갔다). 스튜디오 안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 많지 않았다. 바카렐로의 전임자였던 에디 슬리먼은 아틀리에의 아름다운 18세기 골격만 남기고 모든 것을 벗겨낸 후 20세기 중반에 디자인한 선이 간결하고 검은 가죽을 씌운 정교한 몇 점의 작품을 설치했다. 그런 장식은 관능적인 수도원으로 묘사할 수 있는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가볍고 낙관적이었지만 살짝 중얼거리는 코멘트(주로 바카렐로와 미쇼 사이의) 이외에 아무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아 보인다(바카렐로는 YSL 아틀리에에 하루 종일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결국은 늘 두 사람만 있게 된다고 말한 적 있다). 그날 오후에 거의 묵음에 가까운 아이폰이 울렸고 알림 문자가 떴다. 피비 파일로가 셀린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10년을 보낸 후 사직한다는 내용이었다.

    오늘날 패션계, 다시 말해 문어발식으로 뻗어나간 글로벌 업계(정의하거나 이해하는 게 늘 쉬운 것은 아닌, 새것을 위해 옛것을 과격할 정도로 제거하는 과정인)에서조차 파일로의 사직은 엄청난 충격이다. 그녀는 자기 세대의 가장 혁신적 디자이너 중 한 명일 뿐 아니라 셀린에서의 재직 기간에 한 하우스가 21세기 패션 스토리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즉 유서 깊은 어제의 무게, 오늘 그것을 이끌어가는 재능 있지만 종종 변덕스러운 디자이너의 인지도, 그리고 더 많은 변화가 있을 내일이라는 감질나는 약속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다. 파일로가 셀린을 이끈 10년 동안 많이 유명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다. 뉴욕에선 캘빈 클라인의 라프 시몬스, 밀라노에서는 마르니의 프란체스코 리소, 발렌시아가에선 알렉산더 왕과 뎀나 바잘리아, 지방시의 클레어 웨이트 켈러, 끌로에의 나타샤 램지 레비,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 그리고 슬리먼에서 현재 바카렐로로 바뀐 생로랑.

    바카렐로는 그들 중 가장 힘든 과제에 직면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있는 곳은 이브 생 로랑이라는 신 같은 존재가 1961년에 설립한 하우스다. 이 38세의 이탈리아계 벨기에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신이 YSL을 알든 모르든 그는 당신 삶의 일부인 디자이너였어요. 그것은 당신 어머니가 재2018킷을 입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신이 패션에 대해 배울 때 떠올리는 그 모든 이미지였어요.” 이브 생 로랑은 실제로 앤드로지니를 비롯해 빈티지, 보헤미안 로맨티시즘, 냉철하고 지독하게 과한 글래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친근한 모든 패션 비유를 처음 시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카렐로는 똑같이 존경받는 인물인 에디 슬리먼의 전철을 따르고 있기도 하다. 슬리먼의 영광스럽고 도발적인 재임 기간은 그가 LA에서 주로 활동하던 2012년부터 2016년까지 4년간이었다. 슬리먼은 고상한 그런지 시크와 르 스모킹 같은 아이콘에 스트리트 감각을 가미한 옷을 디자인했다. 그 모든 옷을 자신의 디자인을 입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의 흑백 포트레이트를 통해, 그리고 눈부신 록 쇼 런웨이에서 선보였다. 물론 이 하우스의 충실한 팬들-베티 카트루, 카트린 드뇌브, 한때 생 로랑의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제, 그리고 보다 최근 그의 절친이 된 인물들이 맨 앞줄에 앉았다. 그들은 슬리먼이 두려움 없이(알랑거리는 존경심 없이) 이 레이블을 오늘날에 맞게 살려내고 숨 쉬게 하는 방식에 전율을 느끼면서도 약간 안달이 났다. 바카렐로 자신은 YSL의 과거, 현재 혹은 그 무엇의 무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저는 컬렉션을 시작할 때 생로랑의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로랑 컬렉션을 만들기 위해 시작하는 건 아닙니다”라고 그는 몇 주 전 아침 뉴욕에서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이 하우스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면 막힐 수 있어요. 어쨌든 이 하우스에 있을 때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람들의 눈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생로랑이 어떠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비전을 갖고 있어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제가 무엇을 하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할 거라는 걸 알았어요. 에디도 마찬가지였고 에디 이전에 스테파노(필라티)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사실 그런 상황이 싫지 않으니까요.”

    그것이 생로랑 같은 하우스의 다른 점이다. 당신은 엄청난 자신감을 모으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어딘가에 훨씬 더 많은 자신감을 비축해두어야 한다. 당신이 참여하기로 결정했다면 말이다. 바카렐로의 대중적인 요란한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조용하고 절제력이 있는 그에게 그렇게 큰 자신감이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조용함은 강철 같은 뚝심을 거짓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아요. 하지만 그런 수줍음은 보호막이 될 수 있어요”라고 가수이자 배우 샬롯 갱스부르는 말한다. 그녀는 처음 바카렐로의 레이블을 입은 후 자신의 애정을 그가 디자인하는 YSL로 옮겨갔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습니다. 그저 조용히 그렇게 할 뿐이죠.” 액세서리 디자이너 래티샤 크라헤이(Laetitia Crahay)와 파리의 모델 에이전시 사이프 마디(Saif Mahdhi)와 함께 처음부터 바카렐로의 절친이었던 애냐 루빅(모델, 환경 운동가 그리고 정치 행동가)은 이렇게 말한다. “안토니는 강해요. 그가 생로랑으로 간 후 저는 그의 놀라운 성장을 지켜봤어요. 일하는 방식, 결정을 내리는 방식 등 말이에요. 그는 YSL에 시크함과 세련됨을 다시 가져왔어요. 그것도 세 시즌 만에요. 에디 이후에 이 하우스의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런 성과는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2017년 봄을 위한 바카렐로의 데뷔 무대는 벨샤스가(Rue de Bellechasse)에 있는 생로랑의 미래 본사(현재 리노베이션 중이고 크레인에 매달린 거대한 YSL 네온 로고가 빛나는)에서 열렸다. 상징주의가 풍부한 환경이었다. 옷은 검정 가죽 칵테일 드레스와 빛바랜 블루 진, YSL 캔틸레버(Cantilever) 메탈 힐 샌들(곧 인기를 끌게 될 롤러스케이트에 부착된 스틸레토 펌프스와 어깨까지 올라오는 에비에이터 시어링 장갑 그리고 디스코 볼 크리스털이 박힌 롱부츠만큼 인스타그램 친화적이라는 것이 증명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 디테일)의 믹스였다. 생로랑을 이끌었던 다른 디자이너들이 이곳에서 어떤 한 특정 순간에 집중하는 것을 선택했다면 바카렐로의 방식은 특정 드레스, 예를 들어 2017년 봄 컬렉션에서 그가 극도로 짧게 표현한 1982년의 검정 벨벳 퍼프 숄더 드레스를 가져다가 그것을 출발점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로랑 컬렉션은 자신의 레이블(보통 조각한 듯한, 길게 트림이 들어간 검정 실루엣에 대한 애정을 결합하고, 날카롭게 커팅하고, 종종 메탈 디테일을 장식한)에서 구축한 미학에 치우치기도 했다. 어떤 하우스를 현시대에 맞게 변신시키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곳의 가장 위대한 히트작에 대한 애틋한 향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YSL을 위한 바카렐로의 비전(사치스러운 꾸뛰르적 장식과 실용적인 가죽과 진의 믹스)은 지금 이 순간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세계 어디서나 제품 구입이 가능하고, 소셜 미디어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시대는 극단적 하이패션의 현실도피와 일상생활을 위한 장식 없는 옷의 리얼리즘을 모두 갈망한다.

    그의 미학은 생로랑 시대(디자이너 자신이 수트의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운 섹시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던)에 이 하우스를 특징지었던 그런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다시 불어넣었다. 바카렐로는 자신의 디자인을 ‘섹시하다’고 묘사하는 걸 싫어한다. 종종 그의 옷의 헴라인과 그것을 입는 사람의 허벅지 사이의 짧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중요한 건 도발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긴 다리는 모든 것을 좀더 모던하고 스포티해 보이게 만듭니다. 스포츠를 잘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것은 몸에 대한 밀레니얼 세대의 태도를 반영한다. 이들은 감추는 것만큼 드러낼 권리를 소중하게 여긴다. 노출이 심한 아주 짧은 쇼츠를 입고도 편안해 보이는 젊은 여성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밖이 따뜻하기 때문에 그렇게 입습니다. 날이 더운데 왜 몸을 가리죠?”라고 바카렐로는 말한다. “그들은 스틸레토에 쇼츠를 입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니커즈에 그것을 입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아주 쿨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바카렐로의 친구들(루빅, 갱스부르, 케이트 모스, 조 크라비츠, 앰버 발레타)이 그의 옷을 섹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게 안토니의 의도는 아니라 해도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라고 지난해 12월 런던에서 열린 패션 어워즈에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 박힌 생로랑의 짧은 가죽 드레스를 입고 간 발레타는 말한다. “그것은 해방과 끌림, 둘 다를 느끼게 합니다. 저는 순진하지 않아요. 하지만 안토니가 만드는 건 절대 천박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현재 분위기를 무시하고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성들은 자신이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행동하고, 그리고(가장 중요한) 어떻게 대우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현 상황에 도전하고 있다. 생로랑 자신이 패션계와 그 밖의 세상에 영향을 미친 모든 변화 중 지금도 지속되는 건 그의 옷이 60년대와 70년대 페미니즘이 주도하는 성 혁명을 반영한 방식이다. 성 역할의 교활하고 은근한 전복 말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지휘하는 하우스의 설립자를 많이 닮은 바카렐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젠더 유동성이 아니다. 대신 그는 여성들에게 역사적으로 남성복으로 여겨지던 옷을 입히는 방식에 충실하다. 바카렐로에게 이것은 YSL의 아이콘인 턱시도뿐 아니라 가죽 항공 점퍼, 카고 팬츠, 유틸리티 재킷으로 작업하는 걸 의미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생 로랑과 작업해온 호리호리하고 요정 같은 베티 카트루는 지금도 이 하우스의 중성적인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와 바카렐로는 함께 어울리기에 바빴다(최근에 마라케시 YSL 뮤지엄 오프닝에 함께 참석한 것을 포함해서). 최근 케이트 모스를 캐스팅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베아트리스 달과 과거 이 하우스의 아이콘이었던 래티샤 카스타(몇 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바카렐로의 초대장을 받고 보금자리로 돌아온)의 그것처럼 카트루의 존재감은 바카렐로가 모든 여성들을 위해 이 하우스의 비전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카렐로가 생활하고 일하고 있는 프랑스가 멋지고 시크한 64세의 브리지트 마크롱의 노예라는 걸 감안하면 특히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모두 젊은이들은 아닙니다”라고 바카렐로는 말한다. “우리는 쇼에 젊은 사람들을 기용하지만 여전히 근사해 보이고, 여전히 멋진 직업을 갖고 있고, 흥미로운 일을 하면서 가족을 돌보고 있는 30대와 40대, 그 이상의 여성들과도 함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제게는 10대를 사진에 담는 것보다 그것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저는 늘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는 여성들을 찍는 것 같습니다”라고 그는 비꼬는 듯 웃으며 말한다. “저는 그들의 팔로워가 2,000만인지 아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턱시도 재킷, 버터플라이 디테일 홀터 브라 톱, 레이스 시스루 가죽 팬츠, 펄 스네이크 귀고리와 크로커다일 브레이슬릿은 생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그렇다고 그의 생로랑 개혁에 디지털의 존재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YSL IG 계정은 현재 팔로워가 340만이다. 그것은 한 계정만 팔로잉하고 있다. 바카렐로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 예를 들어 LA의 햇살 가득한 풍경이나 디페쉬 모드의 80년대 일렉트로팝 같은 것을 기록하는 그의 계정 말이다. 그것은 슬리먼 시대와 대비를 이룬다. 슬리먼 시대에는 소셜 미디어 참여가 없었다. 바카렐로는 매달 이네즈 앤 비누드나 콜리어 쇼어 같은 사람들이 찍고 그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모델, 셀러브리티, 괴짜들이 등장하는 캠페인을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선보이는 것 같다.

    에펠탑 그림자 속에서 선보인 그의 2018년 봄 컬렉션은 이 반짝이는 랜드마크가 올해의 모든 밤을 밝힐 때처럼 황홀하고 강렬하게 소셜 미디어를 밝혔다. 그 특별한 행사에서 에펠탑의 조명은 첫 모델이 등장한 바로 그 순간 반짝이기 시작하도록 맞춰졌다. “그래서 정말 겁이 났어요. 너무 과할까 봐 걱정했습니다!”라고 갱스부르는 말한다. 그녀는 로빈 라이트, 레니 크라비츠, 모스와 함께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너무 거창하게 느껴졌어요. 당신은 안토니가 그날 밤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룩 91벌을 선보인 이번 컬렉션은 모로코에서 영감을 얻은 물결치는 셔츠, 작은 가죽 쇼츠, 비즈를 장식한 턱시도 재킷, 그리고 가죽을 수놓은 짧지만 화려한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를 타조 깃털 약 10톤으로 거품을 낸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피날레와 믹스했다.

    다양한 모델들이 옷을 입기도 했다. 그것은 바카렐로가 생로랑에 도착했을 때부터 중점을 두어온 부분이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이안드라 마르티네스(Hiandra Martinez)가 그의 첫 쇼의 오프닝에 등장하거나 멋진 케냐 모델인 아두트 아케치(Adut Akech)를 내세운 것 등등.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YSL이 유색인종 여성들을 기용한 첫 하우스였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는 게 기뻐요.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러진 않습니다. 그냥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봄 쇼에선 많은 일이 있었다. 파리라는 도시와 이 하우스 사이의 잊을 수 없는(지울 수 없는) 관계를 강조하는 파리에 보내는 러브 레터, 계획하지 않은(하지만 완전히 적절한), 몇 주 전 세상을 떠난 피에르 베르제에 대한 추모, 그리고 바카렐로에게 획기적인 순간, 그가 이 하우스를 완전히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야망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성명 말이다. “저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컬렉션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저는 생로랑을 위해 그것을 크게 성공시키고 싶었습니다. 저는 모두에게 그곳이 최고의 유산과 최고의 모든 것을 가진 최고의 하우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 큰 쇼를 원했습니다.”

    바카렐로는 기념비적 쇼를 무대에 올리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의 레이블을 위한 쇼에는 주로 메이저 모델들이 가득했고 극적으로 동굴 같은 곳을 패션쇼 장소로 선택했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세계적인 랜드마크의 그늘에서 선보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생로랑의 엄청난 가능성은 늘 그를 두렵게 하기보다 흥분시켰다. 자신의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하우스 디자이너 자리를 제안받는 다른 많은 디자이너들과 달리 바카렐로는 자신의 레이블을 닫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제 브랜드를 닫은 것에 대해 어떤 불만도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저는 생로랑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 안토니 바카렐로에서 밤 10시까지 일하고 싶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요? 아프고 지치기 위해서요? 아르노와 저는 운이 좋았고 모든 것이 정말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사교 생활을 많이 희생했어요. 함께 학교를 다닌 이후로 우리는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제가 두 개의 컬렉션을 한다면 우리 관계가 순조로울 거 같지 않았어요. 저는 정말 우리가 평범한 삶을 살길 원했습니다.”

    그와 미쇼(38세)는 2003년 브뤼셀의 라 캉브르(La Cambre) 아트 스쿨에서 만나 곧 데이트를 시작했다. 부모님이 시칠리아 사람인 바카렐로는 2년간 법 공부를 시도하다가 결국 아트 스쿨에 진학했다. “아르노는 저의 모든 복잡한 드레스를 바느질했어요”라고 그는 학교에서 둘이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아주 재능이 많아요. 제 것과 자신의 작품을 바느질하는 게 그에겐 쉬웠어요. 제게 그곳은 천국이었죠.” 바카렐로(슬리먼의 디올 옴므 재킷과 질질 끌리는 스카프 차림의)는 당시 지배적이던 개념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아방가르드 미학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학교에서 더 눈에 띄었다. 그의 동기생들은 점점 더 크고 정도가 지나친 의상을 만들었지만 그는 더 짧고 몸에 더 밀착되게 만들었다. 그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카렐로가 겨우 10대일 때 마돈나와 베르사체, 그리고 그들의 기괴하고 연극적인 팝과 바로크 패션의 결합이 지배하던 90년대 초는 지금의 그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졸업 후 바카렐로는 2년간 펜디에서 일하기 위해 로마로 갔고 그 후 브뤼셀로 돌아왔다. “저의 삶은 지루한 일상이 되었어요. 저는 파리에 있는 아르노(그는 랑방에서 일했다)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데 지쳤습니다. 그것은 피곤하고 돈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결심했어요. ‘알 게 뭐야? 세상엔 너무나 많은 디자이너들이 있는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바카렐로는 회상한다. “그래서 1년간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미쇼가 저를 압박하더군요.” 2008년 바카렐로는 꾸뛰르 드레스 다섯 벌을 디자인했다. 리테일러인 마리아 루이자는 그 옷을 자신의 쇼윈도에 걸었다. 그렇게 해서 안토니 바카렐로 레이블이 탄생했다. 애냐 루빅이 “서로를 완전하게 만들어주죠. 한 사람은 왼팔 같고, 다른 사람은 오른팔 같아요”라고 말한 이 커플은 2016년 10월 유타주 캐니언 포인트에 있는 아만기리(Amangiri)로 휴가를 가는 길에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얼마 후 뉴욕에서 두 사람은 결혼기념일인 10월 11일을 기념하며 로마문자로 문신을 했다. 반지도 있었다. 티파니에서 구입한 심플한 백금 반지였다. 그러나 바카렐로가 보석 착용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그의 반지는 체인에 걸어 진 주머니 안에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아르노는 결혼반지를 꼭 껴야 해요”라고 그는 웃으며 말한다.

    그 후 바카렐로는 현실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삶이 절대로 똑같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다음 컬렉션을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그와 미쇼가 가능한 한 그들이 과거에 살던 마레 지구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현재 그들은 생제르맹데프레에 있는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 이모의 소유인 천장이 높은 아티스트 로프트에 살고 있다. “저는 레프트 뱅크가 가장 시크한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이곳에 있으면 좀 낡고 별로 쿨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그것 이외에 절박한 욕심은 없다. 중요한 직책을 맡은 후 그의 유일한 사치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을 사는 것.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지금 그의 사무실 식기 진열장 위에 놓여 있다. “저는 메이플소프의 작품을 좋아해요. 하지만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모든 예술 작품을 사들이는 그런 사람들처럼 되고 싶진 않아요. 제게는 집을 사거나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아마 그는 에펠탑의 반짝임이 끝나고 한참 후에 있을 애프터 파티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쇼와 친한 친구들과 함께 바카렐로는 레니 크라비츠의 집에서 축하 파티를 열었다. 디제잉은 케이트 모스가 맡았다. 이틀 후에 나는 그에게 파티가 어땠는지 물었다. “그것은 90년대에 대한 저의 모든 꿈이 실현된 파티였어요. 저는 아주 운이 좋습니다”라고 그는 문자로 답을 보내왔다.

      에디터
      남현지
      포토그래퍼
      Craig McDean, 김영준
      모델
      차수민
      스타일 에디터
      손은영
      글쓴이
      Mark Holgate
      헤어
      김승원
      메이크업
      이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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