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미식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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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미식 축제

2018-06-08T18:49:13+00:00 2018.06.11|

오직 미각에 집중하며 싱가포르에서 사흘을 보냈다. 음식은 세계적인 공감대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났다. 싱가포르 현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여행이기도 했다.

유튜브 검색창에 가보고 싶은 나라명과 키워드 ‘Food’ ‘Movie’를 함께 검색해보는 취미가 있다. ‘싱가포르’를 입력한 날은 영화 가 검색되었다. 치킨라이스집 가문 자제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싱가포르판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는데, 과장된 대사와 스토리라인과는 별개로 싱가포르의 치킨라이스만 뇌리에 깊숙이 남았다. 토실토실하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닭을 펄펄 끓는 물에 삶아 쌀밥과 소스와 곁들여 먹는, 실로 단순한 음식이었으나 입안에서는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싱가포르 음식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가 확장되던 순간이기도 했다. 단순한 재료와 레시피로 다양한 결의 맛을 내는 자가 진정한 고수 아니던가.

여행객들에게 싱가포르는 칠리 크랩의 나라지만 싱가포르 미식의 세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언어만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 네 가지를 사용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중국, 영국, 말레이시아, 인도, 아랍 등 여러 국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들 국가는 음식 문화에도 뚜렷한 존재감과 흔적을 남겼다. 금융과 무역의 허브라는 타이틀은 세계 각국의 셰프를 불러 모았으며, 몇 년 전 마리나베이 샌즈의 등장은 또 한번 싱가포르 미식의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 꺼풀 더 속내를 들여다보면 ‘요리를 해 먹기에 너무 바쁜 싱가포르 사람들’이 있다. 세계 노동시간 조사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한국보다 바쁘게 사는 나라다. 대부분 서비스업, 금융업에 종사하는 싱가포르 사람들은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가장 손쉽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인 ‘외식’으로 일상의 고단함을 해소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외식으로 매 끼니를 해결하는 라이프스타일은 미식의 발달을 가져왔고, 미슐랭 가이드북은 주저 없이 아시아에서 도쿄, 홍콩·마카오에 이어 세 번째로 싱가포르판을 발행했다. 싱가포르에서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미슐랭 식당’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상위권’ 같은 타이틀을 찾는 건, 머라이언 과자 찾기만큼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푸드 블로그 미스 탐 치악(Miss Tam Chiak, misstamchiak.com)의 로컬 푸드 투어는 싱가포르 일상의 맛을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처음 찾아간 곳은 리틀 인디아에 위치한 인도 레스토랑. 싱가포르의 흔한 아침 식사중 하나로 소개한 메뉴는 갓 구운 난과 카레 소스였다. 이처럼 싱가포르에는 여러 문화가 김밥 속 재료처럼 조화를 이룬다. 로컬 푸드 투어의 핵심은 역시 호커센터(Hawker Centre). 페라나칸, 광둥, 베트남 등 다양한 식당이 모여 있어 어떤 음식이든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야외 푸드 코트다. 티옹 바루 마켓을 방문, 싱가포르 국민 소울 푸드인 치킨라이스, 당근과 무관한 캐럿 케이크(무가 주원료다), 코코넛 밀크 수프 누들 락사, 달콤한 사탕수수 음료, 버터 커피 등을 맛보았다. 로컬푸드 투어 디렉터 모린 아우(Maureen Ow)는 치킨라이스 먹는 법을 전수해주었다. “처음에는 닭고기만 드세요. 그다음에는 밥에 닭고기를 얹어 스파이스 칠리소스를 곁들여 드세요. 마지막엔 블랙 스위트 소스, 진저 소스까지 세 가지 소스를 모두 곁들이세요!” ‘봇’처럼 따라 먹은 치킨라이스의 맛은 영화 에서 집안 싸움이 나고도 남을 맛이었다. 담백한 평양식 찜닭이 떠오르기도했다. 호커센터에는 활기찬 리듬이 있었고 풍성한 맛이 있었으며 그 어느 곳보다 음식값이 저렴했다. 페라나칸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싱가포르에는 달콤한 디저트 역시 가득했다. 청 웬 게 카페(Chong Wen Ge Café)에서 맛본 논야 쿠에는 우리나라 떡이나 전병과 식감이 비슷했고 색감은 무지개보다 예뻤다.

JW 메리어트가 ‘테이스트 오브 JW’ 개최지로 싱가포르를 선택한 건 당연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테이스트 오브 JW는 아시아퍼시픽 전역 여섯 개 도시 메리어트 셰프가 선보이는 열정 가득한 미식 축제다. 티켓을 예매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이틀에 걸쳐 압축적으로 미식에 대해 굉장히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JW 메리어트 글로벌 브랜드 리더 미치 개스킨은 “고객들의 컬리너리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행사 주최 이유를 밝혔다. 올해 테이스트 오브 JW는 3월 24~25일 JW 메리어트 싱가포르 사우스 비치에서 열렸다. 1930년대 군대 본부와 소셜 클럽 건물을 포함하고 있는 JW 메리어트 싱가포르 사우스 비치는 문화 지구 중심에 위치, 미식도 예술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기에 부족함 없는 장소였다.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실내는 고급스러웠고 때로는 아티스틱했다. 호텔을 드나들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이이남의 비디오 월 또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함을 예고하는 신호 같았다. 세계 각국의 요리에 한국적 터치를 더해 혁신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 아키라 백(Akira Back), 진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바 토닉(Tonic) 등 F&B 시설만으로도 여행지로 삼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호텔 건물 사이 정중앙에 위치한 안뜰과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그랜드 볼룸에 테이스팅 부스와 테이블이 속속 채워졌고 ‘축제’는 시작되었다. 미식 축제 티켓을 획득한 행운의 고객들은 저마다 무엇을 먼저 먹을지 행복한 고민에 휩싸였다. 중앙 테이블의 주인공은 역시 치즈, 햄, 소시지, 와인이었다. 트러플 페코리노, 론칼 디오피, 무르시아 알 비노 등 이름을 나열하기 버거울 정도로 다양한 치즈가 도마 위에 올라왔고, 코파, 파스트라미, 로제트, 모르타델라, 산 다니엘레 같은 햄과 소시지는 주문 즉시 척척 절단해 함께 맛보기 좋은 꿀, 잼, 빵, 과일 등과 함께 제공했다. 제철을 맞은 무화과와 꿀, 브리 드 모 몇 조각은 이 세상에 ‘절대 맛’이있다면 단연 1위에 올라야 할 조합이었다. 싱가포르의 락사와 프라타, 일본의 모찌, 한국의 빙수 부스는 미각 탐험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생명력마저 느껴지는 미식 축제장 주변 건물에서는 흥미진진한 워크숍을 시시각각으로 진행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다이오나 리로부터 배우는 인생 음식 사진 찍는 법, 뛰어난 등급을 받은 와인의 차별점을 분별해내는 와인 시음법, 사운드 디자이너 사라 렌지로부터 배우는 음식과 소리의 연관성 등.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많은 수업은 스테파노 디 살보 셰프의 트러플 워크숍이었다. 트러플에 대한 역사와 이론 강의에 이어 그는 직접 트러플 리조토 요리를 시연했고, 참석자들은 한 솥 가득 끓여낸 향긋한 트러플 리조토를 온화한 싱가포르 공기 속에서 맛볼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테이스트 더 모먼트’ 오픈을 앞둔 볼룸 앞은 마치 영화제 포토월 같았다. 참석자들은 적당히 긴장감을 주면서도 화려한 옷차림으로 만찬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테이스트 더 모먼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리어트 셰프 세 명이 선사하는 다섯 코스로 이루어진 디너쇼. 음식 재료와 셰프의 스토리가 담긴 비주얼 아트와 라이브 퍼포먼스를 함께 선보임으로써 음식에 담긴 스토리를 전달하는 진정한 의미의 디너‘쇼’다. 중국 요리의 잠재력을 창의적으로 끌어내는 셰프로 유명한 셰프 토마스 리앙이 준비한 코스는 두 가지. 어린 시절 바람과 나무, 시냇물 등에 대한 기억에서 영감을 얻은 킹크랩, 30년 전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생선 수프를 맛본 어느 여름날을 기억하며 만든 더블 보일드 수프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배경으로 서빙되었다.

음식을 맛보는 사이 홀을 덮을 만큼 거대한 스크린에서는 싱싱한 식재료가 생생하게 움직였고, 미각은 더욱 섬세하게 감각했다. 피터 피츠 드레이어 셰프는 해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식재료를 찾은 즐거움을 ‘구운 홋카이도 관자 요리’로, 14세에 정육점 도마를 씻으며 요리와 인연을 맺은 경험을 ‘숯불에 구운 와규 등심과 우설, 골수 그라탱 요리’로 표현했다. 식사 중간 작은 가위가 서빙되었는데 이는 테이블 중앙에 장식처럼 놓여 있던 풀이 사실 음식의 일부였음을 보여준 작은 퍼포먼스였다. 사람들은 가위로 자유롭게 풀을 잘라 먹으며 미식의 유머러스함을 즐겼다. 다섯 번째 코스 ‘코코넛 티라미수’를 선보인 주인공은 셰프 지(Gee)로 잘 알려진 초티팟 라이수완 셰프. 태국의 전통 요리를 서양의 클래식한 요리에 접목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그는 어린 시절 이모가 전통 타이 커스터드를 만들어 시장에 팔 때마다 첫 시식을 도맡은 기억으로부터 페이스트리를 만드는 열정이 시작되었다고 전했다. 벌집의 달콤함과 망고와 포멜로의 새콤함이 입안 가득 퍼질 때 스크린에서는 꽃을 가득 실은 배가, 물 위에서는 꽃이 피어올랐다. 백화만발 후 사그라지는 꽃처럼 디저트는 치명적인 달콤함을 선사했다. 그 사이 어깨에 싱가포르 전통 소쿠리를 짊어진 서버들은 마지막 선물을 접시 위에 올렸다. 금빛 가루를 뿌린 초콜릿이었다.

우동 투어, 커피 투어 등 한동안 유행처럼 성행하던 미식 투어를 두고 한 가지 본능에 충실한 여행이라고 생각한 적 있다. 그 생각은 틀렸다. 미식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미각은 문화적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 인생의 경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각자의 미각의 제국을 형성한다. 싱가포르 미식이 다채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배가 꺼지지 않는 도시 싱가포르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잘 먹는 기술은 결코 하찮은 기술이 아니며, 그로 인한 기쁨은 결코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