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아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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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아트 여행

2018-06-14T15:29:16+00:00 2018.06.13|

루트비히의 양혜규부터 콜룸바의 페터 춤토어까지, 쾰른에서 경험한 다양한 예술적 사건을 토대로, 이 사연 많은 도시를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낯모르는 도시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계기가 있다. 내게 쾰른은 하인리히 뵐이 1953년에 쓴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에 묘사된 풍경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전후, 1950년대 쾰른에 사는 어느 가난한 부부의 48시간을 담은 소설은 쾰른에서의 삶을 날카롭고 차가운 회색빛 문체로 표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 하인리히 뵐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유년의 기억, 세계대전 때 징집된 후 6년 동안 탈영을 반복하던 기억, 전쟁으로 파괴된 쾰른에서 첫아들을 잃은 기억 등을 남자 주인공에게 여과 없이 대입한다. 가난의 고통, 종교적 딜레마, 불합리한 사회문제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이들의 삶터인 쾰른은 물론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60년이 지나도 별반 다를 게 없기에 여러모로 안갯속의 도시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 오래된 소설이 틀리지만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실제로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못생긴’ 이 도시의 풍경이 당황스럽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쾰른의 풍경은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느 도시와는 다르다. 거리를 걷다 보면, 독일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라는 쾰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순간에 무너져버렸음을, 다급히 도시를 재건하느라 건물을 마구 쌓아 올렸음을, 그래서 유럽식 전통 건물과 시카고에서나 볼 법한 무미건조한 건물, 로마 시대 성벽과 전위적 구조물 등이 마구 뒤섞여 충돌하고 있음을 이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쾰른은 예상과 완전히 다르기도 했다. 어리석게도 쾰른에는 맑은 날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올해 4월 중순의 쾰른은 이상기후라 할 정도로 날씨가 좋았고, 나는 고작 날씨 때문에 현지인들로부터 ‘행운아’ 대접을 받았다.

사동 ’30번지’를 구성한 작품이었던 시계 ‘Dispersion in Sadong 30’(2006), 앞의 작품은 초기작 중 하나인 ‘싱크 위드 와이어(Sink with Wire)’(1995/2017).

쾰른 대성당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가난한 남편은 쾰른 시내를 돌아다니다, 폐허 더미 사이에 솟아 있는 고딕식 성당 앞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저 안은 어쩌면 따뜻할지도 몰라…’ 실제 그가 들어간 성당 안이 따뜻했을 리는 만무하다. 정확히 어떤 성당인지와 상관없이, 그가 마음으로 내뱉은 모순적 문장은 쾰른 대성당이라는 존재의 역설을 드러낸다. 연 6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독일 최고의 관광 명소’라는 사실 이면에 지난한 역사가 있다. 1248년부터 시작해 완성까지 630여 년이 걸린 이 성당은 중세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낸 인간 군상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완성되는 그날까지 쾰른 대성당은 각 시대의 ‘마천루’를 자처하며 한없이 올라갔다.

기원전 38년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쾰른(Cologne)은 그 이름부터 ‘식민지(Colonia)’를 어원으로 하고 있고,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를 수차례 경험했다. 언젠가 쾰른에서 활동하는 한국 건축가 이은영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쾰른 대성당의 고딕 양식을 “수직적 상승을 통한 표상”으로 본다고 했다. 도시 집단을 결집할 거대한 건물이 필요했고, 그래서 종교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지배하에서 쾰른 대성당이 마구간과 창고로 사용되는 수모를 겪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쾰른이 타 도시에 비해 더 심하게 폭격당한 이유가 독일 역사, 문화의 중심지인 쾰른을 심리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해서였음을 안다면, 검은 표면의 쾰른 대성당이 이곳 사람들의 정신적 랜드마크임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적 문화유산’이라는, 최소한의 인류학적 명분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것이다.

뒤라스의 사적 공간을 재현한 ‘상 브누아 가 5번지’(2008)와 뒤로 보이는 ‘접힐 수 있는 것들의 체조(Gymnastics of the Foldables)’(2006).

예전의 성당이나 교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종교적 보물을 보관하는 것이었다. 쾰른 대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도 세 동방박사의 유해를 담은 성유물함을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스탄불에서 가져온 서유럽 최초의 대형 십자가인 게로 십자가, 쾰른 출신 미술가 슈테판 로흐너(Stephan Lochner)의 제단화(1450년) 등도 있다. 특히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72가지 색의 사각형 조각 1만1,500개를 사용해 제작한 트랜셉트(본당과 부속 건물을 연결해주는 공간)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보는 이의 말문을 막는다. 종교가 애지중지하던 보물은 현대에 들어 미술품으로 대체되었고, 종교적 가치와 역할, 믿음 역시 예술이 나누어 가졌음을, 쾰른 대성당은 보여준다.

삼각형 파티션으로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 바젤 7광 七光’(2007)의 길을 만들었다.

양혜규와 루트비히 미술관 “성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쾰른 대성당은 좋아해요. 루트비히 미술관이 1976년에 지어졌는데, 그때 이미 쾰른 대성당과 일종의 대화를 시도한 거라 봐요.” 양혜규는 항상 본인의 전시 장소를 둘러싼 문화 지형도를 그리길 좋아하는데, 특히 교회의 역할을 일부 물려 받은 루트비히 미술관은 흥미롭다. 일단 여느 현대미술관처럼 중성적이지 않다. 바닥은 벽돌을 연상시키는 붉은색과 나무 형태가 혼합되어 있고, 긴 방부터 높은 방까지 전시장 구조도 다양해 다루기 쉽지 않다. 재미있는 건 전시장 입구였다. 매표소가 위치한 로비와 도입작이 놓인 첫 번째 전시장(원래 전시 용도는 아닌 것 같다)은 어떤 문턱도 없이 연결되어 있고, 출입문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위로는 난간과 조명이 화려한 기하학적 구조를 드러내는 식인데, 이만큼 주관적으로 존재감을 발언하는 미술관을 본 적이 없다. 양혜규는 “이번 회고전에는 어떤 뷰포인트도, 예술적인 설치도 없다”고 했는데, 그녀가 옳았다. 다만 매표소 앞에 젓갈 통, 간장 통, 동치미 통 등으로 구성된 작품 ‘바람에는 팔이 없다’를 슬쩍 놓아두었을 뿐이다.

매표소 앞 출구에 놓인 ‘바람에는 팔이 없다’(2015).

오는 8월 12일까지 열리는 양혜규의 회고전 전의 유일한 키워드는 ‘양혜규’다. 개인과 공동체를 둘러싼 역사·정치·문화적 대화를 풀어낸 25년 동안의 작업 세계를 맥락화한 전시다. 오는 길에 나는 검은 쾰른 대성당과 전시 포스터를 전면에 내건 루트비히 미술관을 휴대폰 카메라로 한 컷에 담으며 이미 어떤 대화의 서문을 목격했다. 양혜규 역시 2006년 작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 위트레흐트편(Series of Vulnerable Arrangements – Version Utrecht)’을 이 미술관에서 유일하게 열린 공간에 둠으로써, 외부(세상 혹은 쾰른 자체)와의 대화를 자연스레이어간다. 블라인드를 중심으로 향 방출기, 적외선 램프, 가습기, 전등 등이 ‘배열’되어 있는데, 통창을 관통하는 햇빛과 창으로 보이는 스케이트보더들의 존재, 주변 건물 등도 모두 작품의 일부가 된다. 양혜규가 처음으로 감각장치를 사용한 블라인드 작업인 데다, 블라인드 안에 놓인 ‘비디오 삼부작(Video Trilogy)’이 늘 다른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느낀 감상을 읊조리고, 여기에 내 기억까지 더해져 공감각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말하자면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개입해 ‘한국 작가 양혜규’와 공감을 나누는 만큼, 이번 전시에 대한 힌트를 많이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작업이 망라된 양혜규의 웹 페이지를 살펴보다가 Haegue Yang, Heike Jung, 양혜규, 梁慧圭 등으로 나뉜 카테고리를 새삼 발견했다. 편의상의 분류겠지만,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1994년 양혜규가 처음 독일에 갔을 때 그 이름은 발음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누군가가 Heike Jung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예술가가 되면서부터 Haegue Yang으로 불렸을 테지만, 어쨌든 그녀는 양혜규다. ‘도착 예정 시간’을 의미하는 제목 ‘ETA’에도 도착하고, 이동하고, 떠나고, 다시 도착함을 반복한 그 모든 양혜규와 그녀가 대면한 상황, 경험하고 느낀 것, 이룬 것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러므로 ‘노매드 예술가’라는 수식어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물리적 이동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 즉 정체성 사이를 오간 ‘양혜규들’의 움직임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녀(의 미술적 위상)를 잘 아는 이들에게는 역설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예고로 다가오는 제목이다.

도입작인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 위트레흐트편’(2006)의 전경.

이번 전시는 루트비히의 관장이자 이번 회고전의 큐레이터 일마즈 지비오르(Yilmaz Dziewior)와의 예술적 우정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건이다. 2008년 함부르크 쿤스트페어라인, 2011년 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에 이은 이번 세 번째의 만남. 지비오르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다시 한번 놀랐다고 했다. “양혜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야 그녀가 기대 이상으로 훨씬 많은 작품을 부지런히 만들어왔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1990년대의 초기작을 되살린 건 이번 전시에서도, 그녀의 작가 인생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죠. 잘 알려진 블라인드 작업이나 광원 조각을 넘어 양혜규의 작업이 얼마나 개념적이고 플럭서스적인지 알게 해줄뿐 아니라 모두를 놀라게 할 겁니다.”

양혜규의 초기작 대부분은 그녀 자신의 말처럼 그녀의 분투에 관한 것이다. 살고, 일하고, 예술가가 완성되고, 낯선 사회에서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작가로서 예술적인 언어를 습득하기도 전에 일단 독일어를 먼저 익혀야 했고, 실존과 생존에 관한 두 가지 언어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좌절을 넘어서 정체성의 문제로 발전했다. 그리고 첫 번째 개인전을 연 친구네 집 창틀 위에 올려둔 파스타 담긴 병(Bottle with Pasta above the Door, 1995/2017)이나 학교에서 나눠준 석고로 뜬손(Hand-Made, 1995/2018), 패션 디자이너 서상영과 놀이처럼 한 작업, 석고 트레이 안에 엉킨 머리카락 같은 철사를 넣은 작업(Sink with Wire, 1995/2017) 등 그 시절의 초기작들은, 그러므로 양혜규의 젊고 미숙한 나날의 초상이다. 언뜻 소박해 보이는 초기작을 재현하는 데만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 건 형편없던 완성도를 얼마만큼 구현해낼 것인가의 문제보다 양혜규의 내적 갈등이 작업을 수시로 방해했기 때문이다.

전시 기간 동안 언패킹될 ‘창고 피스’(2004)와 뒤편에 보이는 ‘라커 페인팅’ 연작.

“그 흔한 포트폴리오 하나 만들지 않은 것도, 솔직히 내 작품들을 지우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없었으면 좋겠고. 부끄러운 게 있고, 연결시키지 못해서 부인했던 것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설명이 정 안 되어도 세상에 내보내고 싶어요. 이제야 덜 부끄러운 거예요. 25년 동안의 작업을 되돌아보며, 자기 객관화를 시도하면서, 겸허해진 느낌이에요. 정말 건강해진 것 같아요.

이번 전시의 ‘발견’이 초기작이라면, 하이라이트는 두 개의 블라인드가 병치된 풍경이다. 회고전을 계기로 루트비히 미술관에 소장된 ‘조우의 산맥(Mountains of Encounter)’(2008)과 ‘솔 르윗 뒤집기 – 1078배로 확장 ∙ 복제하여 다시 돌려놓은 K123456(Sol LeWitt Upside Down_K123456, Expanded 1078 Times, Doubled and Mirrored)’(2015). 블라인드를 활용한 이 두 작품의 태생과 원칙은 완전히 다르다. 붉은색의 ‘조우의 산맥’이 무정부주의자 김산과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 두 실존 인물의 만남과 관계, 서사를 다룬다면 흰색의 ‘솔 르윗 뒤집기’는 미니멀리스트 솔 르윗의 작품을 차용, 아래위를 뒤집고 크기를 확장하는 등 형태의 변화를 끝까지 밀어붙여 본래의 성질을 전복하는 작품이다. 서로 다른 블라인드를 한공간에 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래서 작가는 두 작품의 ‘기 싸움’이 어떨지 궁금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경쟁할 거라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조우의 산맥’과 ‘솔 르윗 뒤집기’는 서로에게 서서히 물들고 존재를 든든하게 받쳐주며, 양혜규가 제시하는 인간 보편의 감각과 언어의 관계를 성숙하게 펼쳐 보인다.

루트비히에 소장된 ‘조우의 산맥’(2008) 앞에 선 양혜규, 뒤편 작품은 ‘솔 르윗 뒤집기 – 1078배로 확장 · 복제하여 다시 돌려놓은 K123456’(2015).

“양혜규는 어제와 오늘, 동양과 서양, 모더니티와 고대, 산업과 민속,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추상, 형상화, 내러티브 사이의 이행과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의견과 사상이 다른 사람, 조직 사이의 협정)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중략) 그녀는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순의 동시성을 찾고, 또한 환영합니다.” 양혜규는 회고전의 개막식과 함께 열린 볼프강 한 미술상 시상식의 주인공이기도 했는데, 심사위원장 크리스티나 페그(Christina Végh)는 이 예술가를 정확히 정의한다. 양혜규가 아무리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또한 여기가 보수적인 미술 역사와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도시 쾰른의 대표 미술관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존엄을 지키며 생존한 땅에서의 회고전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학교다닐 때 전 루저였고, 그때 만난 사람들이 이 땅에 수두룩해요. 독일에서 회고전을 연다는 건 그래서 부끄럽고 겁나는 일이자, 기분 좋은 일이에요. 더 부끄러운 땅일수록, 그곳에서 회고전을 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쾰른의 건축가 웅거스 재단인 UAA에서 열리는 칸디다 회퍼 전시.

루트비히 미술관은 독일이 현대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전시로 증명한다. 같은 기간, 양혜규 회고전 외에도 영화 제작자이자 나치 영화의 전문가인 귄터 페터 슈트라셰크(Günter Peter Straschek)에 대한 전시 <Emigration–Film–Politics>와 마틴 루터 킹 작고 50주년을 맞이해 인종 갈등의 격동기였던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 풍경을 담은 사진전 가 열리고 있었다. 또한 여행자들에게 루트비히는 현대미술품, 특히 팝아트로 유명한데, 양혜규의 전시장 반 층 위에 전시된 이 쟁쟁한 작품을 등진 채 블라인드가 걸린 DC홀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양혜규의 작품은 걸작의 존재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일마즈의 말대로 잘 어우러지기까지 했다. 350여 점의 현대미술품을 기증하며 이 유서 깊은 미술관을 세운 페터 루트비히와 이레네 루트비히가 이 광경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피카소, 워홀, 리히텐슈타인, 칸딘스키, 로드첸코, 로스코, 폴락의 작품은 양혜규와 기꺼이 춤을 추었다. 아니, 꽤 진지한 대화라 해두자.

아트 쾰른에 참가한 갤러리 바바라 빈 부스에서 선보인 양혜규의 또 다른 작품.

UAA(웅거스 건축 재단)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숙소로 걸어가던 길, 날 선 모서리가 인상적인 미니멀한 건물을 발견했다. 루트비히 미술관이 ‘현대미술의 성지’로 특화되었다면, 이곳은 모네, 루벤스, 고흐, 뭉크 등 근대 이전 미술에 초점을 맞춘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이다. 라인란트 지방에서 활약한 화가들의 종교화를 모아둔 곳으로도 유명하다. 1824년 철학자 페르디난트 프란츠 발라프가 소장한 회화 작품을 대거 쾰른시에 기부하며 시작된 미술관 건립은 사업가 요한 리하르츠의 기부로 현실화되어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미술관으로 탄생했다. 여기에 합리주의 설계와 입방체 형태로 유명한 독일 건축가, O.M. 웅거스(Ungers)가 2001년에 이 건물을 새로 지음으로써 현재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유명하다는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이나 독일의 대표 작가인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도 좋지만, 나는 웅거스의 존재가 더 궁금해졌다. 이 곳은 웅거스가 일흔이 넘어서야 건축가 인생의 고향인 쾰른에 지은 첫 미술관이자, ‘건축 근본주의자’가 믿는 미술관의 원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를 만나기 위해 서쪽에 위치한 UAA로 향했다.

쾰른조각공원에 위치한 애니시 커푸어의 작품 ‘Untitled’(1997).

현재 웅거스의 건축 과학을 연구하는 재단으로 사용 중인 이 집은 1958년, 32세의 건축가 웅거스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지은 집이다. 노출 콘크리트와 벽돌을 사용한 이 집은 완공되자마자 전후 현대 건축의 가장 중요한 증거로 회자되었고, 브루탈리즘의 초기작으로 알려졌다. 이 집은 당시 주류를 이룬 계단식 주택의 기존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완전히 독립적인 공간이다. 천장의 높이는 다양하고, 넓고 좁은 방이 교차되는, 닫힌 동시에 열린공간. 웅거스에게 이 공간은 ‘작은 우주’ 혹은 세‘ 상에 대한 생각을 반영한 곳’인 동시에, 절대 타협하지 않고 건축의 본성, 역사와 전통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주장한 웅거스의 실험실 같은 곳이었다. 웅거스는 1989년에 큐브 모양의 도서관 및 전시장과 정원을 추가로 지었다. 지금 이 공간에는 칸디다 회퍼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기하학적이고 정밀하며 명쾌한 웅거스의 건축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세로로 길게 늘어선 창 앞에 서니 웅거스가 들여놓은 현무암 덩어리들이 한눈에 보이며, 이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감으로 확장된다. 30년의 시간 차를 두고 지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구 건물과 신축 건물이 잘 어우러지고, 골목에서 집을 바라보니, 다른 집과도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있다. 웅거스는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기능이나 구조의 해석이 아니라 논리와 기하학적 체계의 결과로서 건축을 대했다. 이런 철학은 역사를 전복하는 데 세상의 모든 관심이 쏠렸던 1960년대에도 변함없이 꿋꿋하게 독일 근대 건축의 본성을 지켜냈다.

콜룸바 미술관에서 만난 야니스 쿠넬리스의 작품.

콜룸바 미술관 웅거스가 독일이 존경한 건축가라면, 페터 춤토어는 독일이 사랑한 건축가였다. 그 애정은 콜룸바 미술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터 춤토어가 모국인 스위스 아닌 해외에 설계한 단 두 개의 미술관 중 하나인 콜룸바 미술관 자리에는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은 성 콜룸바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에 반파되었고, 잔해만 남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난 1997년 ‘치유와 화해의 건축가’로 알려진 페터 춤토어가 콜룸바를 복원하겠다고 직접 나섰다. 지난한 역사 속 고통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그는 부서진 벽 위에 덴마크의 회사와 수공업으로 제작한 회색 벽돌을 쌓았고, 모던한 건물 사이를 옛 건물로 기워놓은 듯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는 건물로 완성했다. 실제 콜룸바 미술관의 관람은 성 콜룸바 교회의 잔해를 그대로 둔 1층에서 역사적, 고고학적 관심으로 시작된다. ‘새로운 단순함’을 추구하는 페터 춤토어는 부서진 돌 사이에 나무로 만든 길을 내서 시공간을 초월한 산책을 유도하고, 벽은 잔잔한 구멍으로 자연광이 은하수처럼 쏟아지게 하며 현대적인 명상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Tragedia Civiles’와 로마 조각상들. 재독 도예가 이영재의 도자기와 기원전부터 만들어진 도자기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지난 2007년에 문을 연 콜룸바 미술관에서는 오는 8월 20일까지 ‘콜룸 바의 10년’을 자축하는 전시 가 열린다. 흔히 발레에서 두 사람이 함께 추는 춤을 뜻하는 ‘파드되’는 콜룸바 미술관의 소장품과 로마 게르만 미술관 컬렉션의 협업을 은유한다. 큐레이터 여덟 명이 형식, 미학, 주제의 평행을 맞춰 신중하게 고른 옛 유물과 현대미술과의 만남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거대한 요소로서의 예술을 맞닥뜨리게 한다. 쾰른이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도시임을 기억한다면, 이들의 만남은 일상을 지배해 온 종교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일리 있는 고찰이다. 사실 성 콜룸바 교회 자체도 쾰른시의 기독교 예술품을 모아 전시하던 곳이었다.

현대미술가의 작품은 고대 유물에 가까운 작품과 하나의 프레임 안에 놓여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다. 이를테면 바우하우스 정신을 도예로 잇는 재독 예술가 이영재의 백자가 1~3세기에 만들어진 갈리아 지방의 도자기와 함께 전시되는 식이다. 야니스 쿠넬리스가 만든 황금색 벽 앞에 서서 가이드북을 살펴보았다.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드라마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데 심오한 관심을 가진 작가의 ‘Tragedia Civile(시민의 비극)’(1975)은 그림과 무대, 잃어버린 전통 서구 문화의 복기와 현재의 도전적대립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 황금색 벽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시(드라마)의 귀환을 원한’ 예술가의 무대라면, 1~3세기에 제작된 로마 황제들의 두상은 이 ‘비극’의 관객이 된다. 한편 요셉 보이스의 ‘Untitled’(1953)은 12세기에 제작된 십자가상과 함께 놓여 있었다. 탄약통 위에 쓰러져 있는 앙상한 나무는 세계대전에 독일 공군으로 복무한 요셉 보이스의 개인사를 떠안는다. 스타 현대미술가의 뼈아픈 자기반성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무너진 옛 성 콜룸바 교회의 잔해가 콜룸바 1층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콜룸바 미술관의 야심 찬 협업을 완성하는 건 다시 페터 춤토어가 만든 계단이다. 구도자적이고 편집증적인 재능이 발휘된 이 공간은 천국을 향한듯 사뭇 초현실적이다. 이 계단은 이동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상관없다. 이 고요한 계단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화려하고도 본능적인 드럼 비트로 한 세기를 축하하고자 한 이번 전시의 과거와 미래, 신화와 현실, 시간과 공간, 죽음과 평온 등의 상반된 주제가 나의 몸을 관통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콜룸바 미술관을 떠나면서야 나는 이것이 쾰른이라는 도시 전체가 주는 인상과 겹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콜룸바와 마주 선 디슈하우스, 건축가 브루노 파울이 1930년대에 지었다는 이 평범하고도 비범한 건물이 그제야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