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채소의 기분

2018.06.14

by VOGUE

    채소의 기분

    바삭바삭한 햇살 아래 사시사철 채소가 무럭무럭 자라는 땅. 로스앤젤레스 채식 레스토랑을 투어하며 적극적으로 맛본 채소의 맛에 대하여.

    로스앤젤레스(이하 LA)에 채식 레스토랑 투어를 간다고 했을 때 지인들 반응은 한결같았다. “응? 왜?” 우리 머릿속 이미지처럼 LA는 여전히 치즈 버거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가 미국 내 비건 도시 2위로 선정한 도시기도 하다. 오랫동안 육식과 패스트푸드를 사랑한 만큼 건강하지 않은 음식의 해로움에 노출되어 있었고, LA에서 채식은 지구촌 그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정착되었다. LA는 분명 채식을 하기에 축복받은 땅이다. 여름에 건조하고 겨울에 따뜻한 기후 조건, 비옥하고 드넓은 평야, 선글라스 없이 눈을 뜨기 힘든 LA의 햇살은 채소와 과일이 1년 내내 자라는 자양분이 되어준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주는 미국에서 채소와 과일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다. 1년 내내 제철 채소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채소는 당근, 양파 외에도 수두룩하다. LA 셰프들은 자연스럽게 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했고 LA 채식 테이블의 확장을 가져왔다. 태양광으로 조리한 케이크라든지, 끓이지 않은 수프, 버섯 육포 등 LA 채식 레스토랑에서는 매일 흥미로운 메뉴가 쏟아진다. LA는 여전히 폴 맥카트니가 주장한 ‘고기 없는 월요일’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지만 이제 환경이나 윤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맛있어서 채식 메뉴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 고기 대신 채소가 메인 디시로 오르고, 채식 메뉴를 구비해놓은 일반 레스토랑도 많아졌다. 채식 레스토랑은 비건 손님과 비건이 아닌 손님의 비율을 2:8로 꼽는다.

    덕분에 지난 4월 방문한 LA에서는 맥도날드보다 오가닉 주스 바를 찾기가 더 쉬웠다. 물론 실버 레이크, 브렌트우드 등 트렌디한 문화가 집결된 지역 위주로 돌아다녔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우연히 들른 마트 트레이더 조에서 라벨도 보지 않고 집어 든 음료수는 오가닉 콤부차와 민트 말차였고,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 앞 아이스트림 트럭에도 비건 메뉴가 있었다. 심지어 망망대해 말리부 피어 초입에 위치한 유일한 식당도 ‘Farm’ 컨셉이었다. ‘Fresh Organic Local’이라고 적힌 간판이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동물보호소 개들에게 비건 사료를 급여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기사가 흘러나왔다. LA에 거주하는 지인은 얼마 전 비욘세가 다녀갔다는 베지테리언 멕시칸 레스토랑에 가보자며 주소 링크를 보내왔다. 추천하고 싶은 미식 축제로는 비건 거리 축제(Vegan Street Fair)를 들었는데 참여한 레스토랑 숫자만 200개, 방문객은 3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물론 지인은 떠나는 날 인앤아웃 버거를 꼭 먹고 가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LA는 여전히 햄버거가 맛있는 도시고 지금은 채소 요리도 맛있는 도시다. 누군가 LA를 두고 육식주의자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채식 레스토랑에서 오가닉 비건 버거를 먹는 도시라고 했는데 나는 이보다 절묘한 비유는 듣지 못했다.

    ‘카페 그래티튜드(Café Gratitude)’는 LA의 채식 레스토랑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는 곳이다. 다른 비건 레스토랑이 여러 선택지를 두는 데 반해 고집스럽게 100% 비건, 100% 유기농 재료 사용을 고수한다. 콩으로 만든 비건 버거, 찹 샐러드, 나초, 켈프 국수로 만든 타이 누들, 프렌치토스트가 유명하다. 메뉴명은 음식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Brave’ ‘Gifted’ ‘Thriving’ 등 음식에 대한 느낌이자 평소 좀더 자주 들으면 좋을 긍정적인 단어를 메뉴명에 붙여두었다. 손님이 ‘Open hearted’라는 메뉴를 주문하면, 서버는 ‘You are open hearted’라고 말하며 주문을 받고, 주방에서는 ‘Open hearted’를 떠올리며 음식을 조리한다. 레스토랑에 머무는 동안 손님은 자신이 ‘Open hearted’라고 몇 번씩 확인하는 셈이다.

    세이잔 드뢰 엘리스(Seizan Dreux Ellis) 셰프는 다른 레스토랑과 차별점으로 의식과 문화를 전도하는 점을 꼽았다. 그에게 채식의 미래를 물었을 때 앞으로는 단순히 깨끗한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프로세스도 생각하며 먹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했다. 어떤 땅에서 어떤 거름을 써서 자랐는지 점검하고 먹은 음식의 재활용 여부까지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카페 그래티튜드의 음식은 파인다이닝의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거칠게 말하면 투박하기도 하다. 음식을 먹으며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쉽지 않은데 카페 그래티튜드의 음식이 그랬다. 생명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겠다는 다짐이 느껴졌고, 이런 음식을 꾸준히 먹는다면 불필요한 자극이 정돈될 것이란 기대가 생겼다.

    물론 재미도 있었다. 더블 치즈 버거가 연상되는 더블더블 버거랄지, 과거 11세기 콩을 옮기던 배가 바닷물에 빠진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스토리가 있는 키시가 그랬다. 이는 셰프의 소신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손님이 집에서 먹는 것처럼 건강하고 푸짐하게 먹고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비건 셰프로서 깨끗한 식물성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어떻게 사람들이 비건 음식을 더 좋아하게 할 수 있을지 연구한다. 비결을 물었을 때 셰프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려줬다. “콩은 소금물에 담가 마리네이드를 하는 식으로 맛에 레이어링을 많이 하려고 한다. 버섯은 오븐에 마늘, 올리브 오일, 후추 등을 넣고 구운 후 멕시칸 소스에 넣어서 24시간 동안 숙성시키면 쫀득해진다. 가공한 뭔가를 쓰는 게 아니라, 우리 주방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레이어링을 조금씩 빼기도 한다.”

    그가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재료는 역시 버섯이다. 개발 중인 메뉴는 치킨 와플. 치킨 대신 오이스터 버섯을 넣는다. 차가버섯으로 루트 비어도 만든다. 카페 그래티튜드는 한 음식에 많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주방에서 가까운 지역 농장에서 모두 재료를 가져오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어떤 농장에서 생산해 어떤 공장에서 포장하고 레스토랑까지 오는지 모든 과정을 점검한다.

    성분이 가득 들어간 케첩 대신 공기로 구운 프렌치프라이를 비트 케첩을 찍어 먹어봤다. 신기할 정도로 괜찮았다. 마젠타 컬러도 식욕을 자극했다. 비트 케첩만 있다면 비건으로 삶도 가능할 것 같았다. 겉모습이 거의 흡사해서일까. 바이 클로에의 음식은 비건이 떠오르기보다 조금 다른 맛을 가진 햄버거, 타코, 아이스크림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바이 클로에 홍보팀은 “맛있게 먹었는데, 먹고 나서 보니 비건 요리인 식당으로 여겨지고 싶다”고 했다. 발랄한 시도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CBD 오일을 사용해 비건 브라우니를 만들었고 1시간 반 만에 400개가 넘게 판매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바이 클로에는 런던, 보스턴, 뉴욕에도 꾸준히 지점을 확장하는 중이다. 비건 테이블에 바이 클로에가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캘리포니아 땅에서 그날 수확한 채소로만 요리하는 레스토랑도 찾았다. 다운타운 한복판에 위치한 레스토랑 ‘P.Y.T.’ 벽면에는 커다란 롤 종이가 걸려 있었다. 롤 종이에는 옐로 왁스 빈, 프렌치 포테이토, 콜맨 농장 양배추 등 그날 레스토랑에 들어온 채소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모두 근처 농장과 로컬 파머스 마켓에서 공수한 재료였다. 때로는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35파운드가 넘는 토마토가 들어올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럴 때면 주방에서는 토마토 타르트를 만든다. 식재료는 농장을 운영하는 사립학교에서도 공수해온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직접 키우고 돌본 채소로 요리해 음식을 내놓는 건, 채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매일 도착하는 식재료가 다르기 때문에 P.Y.T.는 매일 새로운 메뉴판을 출력한다. 분쇄되거나 변형되어 끊임없이 무슨 재료가 들어 있을지 퀴즈를 맞혀가며 식사해야 하는 채식 레스토랑도 있지만 이곳 메뉴는 대체로 채소 본연의 모습을 유지한다. 채소를 로스트한 요리가 많은데 그 맛은 단순하지 않다. 그저 신선한 콩을 사용한 듯 보였던 콩 요리(Bincho Grilled Fava Beans with Lemon and Tomatillo Cream)는 짜다, 달다 같은 표현으로는 부족한 복합적인 맛이었다. 레몬과 크림이 더해지니 시큼하면서도 부드러운 맛도 났다. 조세프 센테노(Josef Centeno) 셰프는 파바콩을 구우면 엄청나게 다양한 맛을 끌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바코 머켓(Bäco Mercat)을 비롯해 여러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지만 채소를 메인 재료로 삼는 P.Y.T.에서 가장 많은 창의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재료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다양한 시도를 거쳤기에 나온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나는 순무를 조리할 때 오하 산타 잎(Hoja Santa Leaf)에 말아 소금을 쳐서 느리게 굽는다. 여기에 허브로 향을 더하면 쌉쌀하고 신맛이 난다. 과정은 복잡하지만 채소에 완벽하게 맛이 들도록 조리한다. 모든 메뉴를 이런 식으로 준비한다. 한 가지 재료를 충분히 연구하고 그 맛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한다.” 95%는 비건 메뉴지만 한두 개 정도는 생선이나 해조류 등을 재료로 삼은 메뉴도 준비한다. 채소를 많이 먹고 약간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식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관심 있는 재료로 꽃을 꼽았다. 아루굴라 블로섬, 머스터드 그린 플라워 등. 셰프의 창의력으로 꽃은 바라보는 존재에서 입속에 들어가는 존재로 정체성이 확장될 것이다. 레스토랑 이름 P.Y.T.에는 한 가지 의미만 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채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고 했다. ‘Pretty Young Turnip’ ‘Pretty Yellow Tomato’ ‘Pretty Young Thing’… P.Y.T.의 요리는 빈칸을 채울 수 있는 상상력을 동원하기에 충분히 창의적이었다.

    로 푸드(Raw Food)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 매튜 케니(Matthew Kenney). 에보 키니에는 그의 요리 철학이 생생하게 담긴 레스토랑 ‘플랜트 푸드+와인(Plant Food and Wine)’이 있다. 이곳은 공간부터 환상적이다. 실내 다이닝 공간을 지나면 펼쳐지는 정원은 싱그럽고 안락했다. 올리브 나무가 정원을 채우고 있었고 나무 사이 텃밭에는 허브, 레몬이 자라고 있었으며 정원 한쪽에는 와인 저장고가 자리했다. 그리고 바비큐 그릴에서는 아스파라거스, 포테이토 브레드가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바람에 나무가 반응하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 모두 이곳에서만은 아름다움이 되었다. 상호에 담겨 있듯, 플랜트 푸드+와인은 제대로 된 다이닝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비건 레스토랑에 와인이 있느냐고 묻지만, 이곳에서는 여느 레스토랑과 마찬가지로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와인이 정제 과정에서 생선 방광을 사용하기 때문에 플랜트 푸드+와인에는 오가닉 비건 와인을 따로 준비해놓았다. 플랜트 푸드+와인의 음식 역시 메뉴판 이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치즈 플래터(Flora Artisanal Cheese Tasting), 라자냐(Heirloom Tomato+Zucchini Lasagna), 우동(Spicy Udon) 등 일반명사가 붙어 있었지만 섬세하게 다듬어진 맛을 가진 색다른 음식이었다. 치즈는 스프레드나 케이크 식감에 가까웠고, ‘꼬릿’하기보단 향긋했다. 라자냐는 고소하고 담백한 콜드 라자냐를 상상하며 만든 맛이 났다. 로 푸드를 연구하다가 비건 음식으로 확장된 매튜 케니의 음식다웠다. “라자냐는 초창기에 만든 메뉴다. 라자냐의 원래 맛을 알고 있었기에 그 식감이 최대한 살아나도록 할 수 있었다. 치즈 역시 언제 만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연구한 음식이다. 유산균을 베이스로 한다. 비건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음식이 치즈이기 때문에 가장 열심히 연구했다. 재료는 진짜 치즈와 다르지만 최대한 비슷한 식감으로 치즈를 대체할 수 있길 기대했다. 치즈를 만드는 발효와 숙성 방식은 똑같이 사용한 편이다. 나는 개스트로노미 식당에서 쓰는 기술을 쓰고 있다. 스모킹, 건조, 숙성 등 획기적인 기술을 시도하고 연구해 메뉴를 완성한다. 또한 글로벌한 메뉴를 만들지만 우리만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나는 한 메뉴에 다양한 문화를 섞지 않기에 ‘퓨전’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수준 높은 재료에 과학적인 기술을 더해 우리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신선한 재료는 기술을 대체하기도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곳에서는 정원에서 직접 키운 작물뿐만 아니라 직접 농장에 찾아가서 고른 재료를 사용하는데 레몬 타히니와 로메스코 소스를 섞고 렌틸 등 열두 가지 재료로 균형을 맞춘 ‘플랜트 볼’, 피스타치오, 아보카도, 토마토와 페퍼 등 최상의 채소를 넣은 ‘케일 샐러드’는 평범했지만 분명 놀랍도록 풍부한 맛이 났다.

    캘리포니아 관광청 홈페이지에서 “신선한 채소를 즐기기 위해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캘리포니아에서는 사실입니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는데 캘리포니아 땅에서 직접 확인하게 될 줄 몰랐다. 온 힘을 다해 고기를 먹어온 입장에서 느낀 바대로 밝히는 순수한 고백이다. 누군가 LA 채식 레스토랑의 현재를 묻는다면 ‘비건이 아닌 사람도 채식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LA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선택지라고도 덧붙일 것이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강남규
      스폰서
      로스앤젤레스 관광청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