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쓴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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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쓴 아나운서

2018-06-15T10:51:31+00:00 2018.06.18|

임현주 MBC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했다. 그러고 보니 공중파에서 생경한 화면이다.

오버사이즈 흰색 셔츠와 넥타이, 실버 펜슬 스커트는 푸시버튼(Pushbutton),
리본 장식 펌프스는 버버리(Burberry), 팔찌는 셀린(Céline), 반지는 버버리, 얇은 테 안경은 더블러버스(Double Lovers), 안경 줄은 스테판 크리스티앙(Stephane Christian).

안경 내러티브가 있다. 첫 손님으로 안경 쓴 여자는 재수 없다고 태우지 않는다는 택시 괴담. 여성이 안경을 쓰면 못생긴 상태고, 안경을 벗으면 숨겨진 미모가 폭발해 남자 주인공에게 사랑을 얻는다는 드라마와 만화. 옛말일까. 임현주 아나운서가 공중파 뉴스 프로그램인 에서 안경을 쓰고 등장해 일으킨 파급력을 보면 이 내러티브는 지하에서 여전히 활동 중이었다. 안경을 쓴 첫 방송이 끝나고 임현주에게 미디어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고, 일본의 한 저널리스트는 관련 칼럼을 썼고, 태국의 뉴스 프로그램은 이 ‘뉴스’를 보도했다. 임현주 아나운서의 SNS에는 “언니 덕분에 안경 쓰고 출근했어요” 같은 응원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나 역시 ‘그러고 보니 공중파 뉴스 프로그램에서 안경을 쓴 여성 아나운서는 없었구나’라고 뒤늦게 자각했다. 그녀의 안경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관행을 생각하게 한다. 대중과 미디어는 임현주에게 “왜 안경을 쓰셨습니까?”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었고, 그녀는 대체로 “새벽부터 렌즈를 끼고 방송하려니 눈이 피로해서”라는 신체적인 어려움을 답으로 꺼냈다. 임현주는 오전 6시에 방송하는 를 진행하기 위해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난다. 3시 10분에 회사에서 보내주는 차를 타고 3시 30분까지 출근한다. 보도국에 가서 기사를 정리하고, 멘트를 수정한 뒤에 4시 30분에 헤어와 메이크업을 한다. 이전엔 속눈썹을 붙였다. 눈이 피로하지만 왠지 ‘더 좋은 모습’으로 비쳐야 할 것 같아서다. 마지막으로 상황을 다시 한번 점검한 뒤 생방송에 들어간다. 매일 수면 시간은 4~5시간이 채 안 된다. 늘 긴장하면서 자기에 중간에 많이 깬다. 아침 뉴스는 잠과의 전쟁이고, 그녀의 과제 중 하나는 컨디션 관리다. “매일 눈물 약을 다섯 통씩 샀어요. 속눈썹을 붙인 눈으로 기사를 읽고 조명을 받으니 눈이 점점 건조해졌거든요. 안경을 낀 뒤로는 괜찮아요. 사놓은 눈물 약은 분양하려고요.(웃음)”

그래피티 터틀넥 톱과 체크 패턴 재킷은 버버리(Burberry), 검은 테 안경은 셀린(Céline).

“눈이 아파서 안경을 꼈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도출하기까지는 단계가 있다. JTBC를 거쳐 MBC에 입사한 그녀는 파업을 맞는다. 2017년 11월 MBC 파업이 끝나고 복귀한 뒤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저는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었어요. MBC에 입사할 때만 해도 유명한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꿈도 꿨죠. 그런데 망가진 MBC 안에서 하기 싫은 뉴스를 해야 했고 아무런 보람이 없었어요. 파업이 끝난 뒤에는 제가 하고 싶은 본질을 생각하게 됐어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청자, 동료, 돌아온 선배에게 자랑스러운 앵커가 되고 싶었죠. 저도 경력이 있지만 선배들에게 찾아가서 처음부터 교육을 해달라고 했어요. 파업 전과 지금의 저는 조금이라도 달라졌을 거예요.” 그녀는 공부하고 생각하는 시간도 늘렸다. 를 끝내고 오전 8~9시에는 무조건 카페에 가서 글을 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편을 쓰기로 결심했어요. 아침 출근하면서 든 고민, 신문 기사를 보며 떠오른 생각, 제 일상 등 무엇이든 쓰기로요. 힘든 시절에 혼자 여행하면서 글을썼어요. 그때보다 더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의 글을 쓰고 있어요. 안경에 대한 고민도 그렇게 나왔죠. 뉴스의 본질에 불필요한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안경 쓰는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결심이 섰죠.”

입사 후 렌즈만 끼다 보니 시력에 맞는 안경이 없었다. 안경점에서 안경을 새로 맞춘 뒤 를 함께 진행하는 박경추 선배에게 운을 뗐다. 그 역시 “괜찮지, 그러고 보니까 안경 낀 사람은 없었네”라는 반응. 남자 아나운서에게 ‘안경’은 생각해본 적 없는, 생각할 필요 없는 문제였던 거다. 임현주는 방송 시작 20분 전에 상사에게 “저 오늘 안경 쓰고 하겠습니다. 반응이 좋지 않으면 무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간단히 보고했고, 안경에 의문을 제기한 조명팀에겐 “남자 앵커도 끼니까 괜찮죠?”라고 넘겼다. 생방송을 몇 분 앞둔 상황이다 보니 다들 의아해도 어찌어찌 넘어갔다. 물론 이제는 ‘강제 안경행’을 해야 할 정도로 대중의 열렬한 관심은 물론 MBC 내부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보도국이나 방송국이 여자 아나운서에게 바라는 역할도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어요. 제 작은 실천이 그 흐름에 도움이 되길 바라죠. 요즘엔 의상이 고민이에요. 여성 아나운서는 왜 화사하고 계절감을 표현하는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의상의 간소화를 실천하려 해요. 남자가 그러니까 여자도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뉴스를 하는 아나운서의 본질을 생각하다 나온 결심이에요.” 가끔 편협한 공격을 받기도 한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란 책의 리뷰를 올리기만 해도 ‘이럴 줄 알았다’는 DM을 받는다. “사실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러워요. 하지만 여성이 받는 억압을 고민해요. 남녀 간의 분쟁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관행을 깨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