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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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광장

2018-07-02T10:25:08+00:00 2018.07.02|

뜨거운 한 달이었다.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여자들은 멈추지 않는다!

시작은 카톡 단톡방이었다. 업계 뒷얘기, 프레스 세일 정보, 맛집 추천이 대화의 주를 이루는 잡지기자들끼리 나누는 잡담 창구. 누군가가 5월에 여자들의 시위가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는 얘길 꺼냈다. 마감하느라 불법 촬영 편파 수사에 대해 전혀 모르던 동료들을 위해 한바탕 소란스럽게 현황 업그레이드 토크가 이어졌다. 누군가 시위에 나가보자고 했다. “어디다 불 지르고 싶다” “화염병 만들자” “패션지 연합회 깃발을 만들면 어때?” “옷 맞춰 입자” “누구 디올 티셔츠 없냐?” “마르니 핑크 캣 이어 모자는?” 하면서 히히덕거렸다.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나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촉구 시위가 불꽃처럼 일어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조용히 사무실에서 잡지 마감을 했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2주기였던 지난 5월 17일. 트위터에서는 신논현역 6번 출구 앞에서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추모 행진이 예고됐다. 그날따라 유난히 ‘강남역’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20대 시절 숱하게 데이트하던 곳, 셀 수 없이 자주 밥을 먹던 곳, 매일 버스를 타고 내리던 곳. 하루 종일 입안에서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문장이 까끌까끌했다. 드레스 코드는 블랙. 단톡방 멤버와 함께 강남역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교보문고 강남점 앞에 도착하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동 인구 100만 명에 육박하는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지역은 여자들의 광장이 되어 있었다. 투둑투둑 비가 내리는 강남역 한복판, 여자들은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쓴 채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존재하는 듯 질서 정연하게 모여 있었다. 뉴스로만 현상을 보고 잘난 입으로 떠들 때는 보이지 않던 진짜 현실이 나를 덮쳤다. 트위터를 들여다보니 같은 시각 부산, 창원, 전주, 대구에서도 ‘여성이 안전하고, 성차별·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집회’ 인증샷이 올라오고 있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무대에 오른 뮤지션 오지은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말을 잇지 못해 정적이 흘렀다. “여자라고 우는 법도 없고 여자라고 울지 말라는 법도 없고 감정이 넘칠 수밖에 없는 날인 것 같습니다.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죽임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고 싸우고 있고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어서 8년 차 간호사가 무대에 올라 의사 몰카범을 폭로했고, 한 학생은 성추행 교수를 고발했다.

그리고 우리는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에서 강남역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쇼핑하러 걷던 길을, 영화 상영 시간에 맞추기 위해 뛰던 길을 “여성 폭력 중단하라” “여성도 국민이다 안전한 나라 만들어라”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구호를 외치며 걸었다. 찰박찰박 빗물은 도로에 차올랐고 늘 그렇듯 온갖 버스와 행인들로 넘쳐났다. 여자들은 혼잡한 강남역 주변 질서를 추가적으로 흐트러뜨리지 않고도 커다랗고 하나 된 목소리를 냈다. 염산 테러 협박이 있었지만 어떤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 킬로 넘게 이어지는 행렬 속에서 속도를 맞춰 걸으며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겹겹이 늘어선 여자들의 줄이 보디가드처럼 느껴졌다. 주최 측은 #MeToo라고 적힌 열쇠고리를 나눠주었다. 뒷면을 뒤집었더니 #WithYou라고 적혀 있었다.

불법 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는 혜화역에서 열렸다. 참가 조건은 생물학적 여자여야 한다는 것 하나. 약속한 오후 3시에 가까워질수록 혜화역 인근에서는 페스티벌이라도 앞둔 듯 어딘지 들뜬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붉은 프릴 원피스, 레드 볼캡, 산타 모자, 붉은악마 머리띠 등 드레스 코드 레드에 맞춰 액세서리와 의상을 걸친 여자들끼리 ‘너도?’라고 말하듯 은밀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금세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생겼다. 리미티드 에디션 발매를 기다리는 줄도, 맛집 대기 줄도, 콘서트 티케팅 줄도 아닌 도로에서 시위 구호를 외치기 위한 줄이었다. 사람들이 늘어나는 속도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는데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혜화역부터 이화사거리까지 일대는 마스크를 쓴 붉은 여자들로 가득 찼다. “성차별 수사 중단하라!”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외치는 가운데 새롭게 줄에 합류하는 사람들을 향한 환대가 이어졌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하나 된 마음으로 모인 여자들은 서로를 자매로 불렀다. ‘자매’는 ‘자이루(자매님, 하이루)’ ‘자이스(자매님, 나이스)’ ‘자리가토(자매님, 아리가토)’로 끊임없이 응용되며 시위 현장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이날 나는 뜨끈한 열이 오르는 아스팔트에 앉아 목이 쉴 때까지 구호를 외쳤다. 응원의 제스처를 보내는 행인에게 환호로 화답했고, 몰카를 시도하는 행인에게 야유를 보냈다. 선창하겠다며 자발적으로 메가폰을 잡는 이에게 “상여자다!” 소리도 질렀다. 중간중간 얼음물, 목캔디, 에너지바, 젤리, 과자를 손에서 손으로 계속 전달했다. 태양이 뜨겁게 느껴지면 누군가 “자외선 차단제 필요하신 분?”이라고 외치며 자외선 차단제를 흔들었고, 카메라에 찍히는 게 아닐까 슬쩍 걱정되면 누군가 “마스크 없으신 분?”이라 외치며 마스크를 건네주었다. 여자들은 세심하게 동지를 배려했다. 낯선 호의는 놀라울 정도로 따뜻한 위안으로 찾아왔다.

몇몇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해온 피켓에는 당장 포스터로 만들어도 손색없을 카피가 여럿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우리는 계란이 아니며 너희도 바위가 아니다’ ‘나 혼자 한다고 바뀝니다’ ‘큰일은 여자가’. 불법 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는 진지하고도 유쾌했다. 성 역할 고정관념을 뒤집은 “여자는 울지 않는다!” 같은 외침에 눈물 나게 웃었고, 삭발 퍼포먼스에서 “열 살 어린 동생이 커가면서 입을 코르셋을 벗게 하기 위해 삭발합니다” 같은 진짜 속마음을 들으며 조금 울었다. 이날 많은 양의 땀과 눈물이 몸을 빠져나갔다. 마라톤을 뛴 것 같기도 했고, 록 페스티벌에서 몇 시간 동안 헤드뱅잉을 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개운하고 시원했다. 경찰은 참석 인원을 1만5,000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주최 측이 추산한 인원 3만 명이 맞을 것이다.

갑자기 대한민국이 여자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거나 몰카범이 모조리 잡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위 후 많은 언론사가 ‘여성들은 왜 거리로 쏟아져 나왔나’ 같은 기사를 쏟아냈다. 경찰청장은 편파 수사 여부를 묻는 국민 청원에 “앞으로 더욱 공정하게 수사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여성가족부 장관은 “보복성 영상물을 유포하면 벌금형을 아예 불가능하게 하고 5년 이하의 징역형만으로 처벌하게 하는 법률이 통과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남겼다. 변화를 기대라도 해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연대해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뿐임을 여자들의 시위는 또 한번 증명했다.

놀랍도록 뜨거운 한 달이었다. 6월 10일 런던에서는 여성참정권 쟁취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3만여 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녀들은 참정권 운동의 상징인 녹색과 흰색, 보라색이 들어간 옷과 스카프를 걸치고 거리를 행진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 운전을 금지하는 규정을 없애기로 했다. 운전을 한 여성 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이중적인 처사에 논란이 이어지긴 하지만 <보그> 아라비아는 붉은색 컨버터블에 탑승한 사우디 공주를 6월호 표지에 실었다. 비슷한 시기 아일랜드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해 임신중절을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국민투표를 하기 위해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아일랜드로 귀국하는 여성들의 사진은 전 세계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시위에 함께 참여한 친구에게 “뭐가 변하긴 할까?”라고 물었을 때, 친구는 “마음이라도 불편하게 해야 바뀌는 척이라도 하겠지”라고 대답했다. 나는 “운동 삼아 다음 시위에도 나가자”고 했다. 친구는 “자매님이 원한다면”이라고 답했다. 당장 세상이 바뀌진 않겠지만 어떤 순간에도 혼자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손을 잡을 것이고 더욱 강해질 것이며 함께 광장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켜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항상 나는 자매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내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