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패션 생태계에서 목격되는 아시안의 존재감

2018.07.05

by VOGUE

    패션 생태계에서 목격되는 아시안의 존재감

    동양인 모델로 가득한 패션쇼, 아시안 모델이 표지에 등장하는 패션지. 패션 생태계에서 목격되는 아시안의 존재감.

    “잡지가 나오자마자 여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주류 패션지에 쌍꺼풀이 없는 여성을 위한 화보와 기사가 실렸다는 것 그리고 그 화보를 내가 찍었다는 것이 눈물 나도록 감동적이라고 말입니다.” 독자에겐 <보그 코리아> 커버 사진가로 익숙한 피터 애시 리가 동호대교 남단의 스타벅스에 앉아 말을 이었다. 지난 4월 중순 할머니 병문안을 위해 서울을 찾은 그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패션계 동양인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지난 1월호 미국 <얼루어>를 위해 그가 촬영한 이미지에 대한 반응을 전했다. 미국 일류 뷰티 매거진에서 쌍꺼풀이 없는 아시아 여성을 주제로 한 화보를 실은 건 무척 이례적인 일. “그 전화를 받고 깨달았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미디어에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요.”

    이 변화를 이끈 이는 미국 <얼루어> 새 편집장인 미셸리(Michelle Lee). 한국계로 2년 전 편집장이 된 그녀는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그 기획이 중요한 순간이 었다고 선언했다. “물론 유튜브나 블로그를 보면 ‘무 쌍꺼풀’을 다룬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얼루어>는 미국 메이저 매거진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 입니다.” 커버 라인에 ‘무쌍꺼풀을 위한 메이크업’이라는 문구를 더한 것도 큰 효과를 보았다. “표지에서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는 독자도 있었어요!” 그 촬영을 함께 한 한국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유미에게도 역시 그 촬영은 인상 깊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다 보면 동양인만을 위한 메이크업을 할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녀는 동양인만을 위한 기획이라는 사실에 놀랐다고 전했다. “저야 한국 출신이기에 눈에 익숙하지만, 미국 매체에서 이런 기획은 찾기 힘들죠. 그래서 최대한 단아한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한 메이크업을 했습니다.”

    미셸 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6월호엔 동양계 모델을 커버로 세운 것이다. 모델 수주, 페이 페이 순, 페르난다 리는 각각 금발, 흑발, 분홍색 머리를 날리며 커버에서 포즈를 취했다. 2000년 루시 리우 이후 18년 만에 두 번째로 동양인이 표지에 등장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에서는 소리 없는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지난 20년간 미디어, 특히 잡지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아주 편협한 시선이 존재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양성이 대두되었죠.” 그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메이저 매거진도 아시아인을 표지에 내세울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고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미국 <얼루어> 표지를 통해 패션계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몇 년간 활발하게 일어난 패션계 다양성에 대한 운동이 이제 동양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타사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로 6월 중순 서울을 찾은 디자이너 프라발 구룽은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에 대해 설명했다. 알렉산더 왕, 조셉 알투자라, 제이슨 우, 필립 림 등과 함께 뉴욕에서 활동 중인 동양인 디자이너 중 한 명인 그는 아시안 동료들과 이 같은 대화를 자주 나눈다고 덧붙였다. “만약 미셸이 편집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아시아 모델이 미국 잡지 표지에 등장하는 걸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제가 몇 시즌 전 지혜를 오프닝 모델로 선택한 것도 비슷한 일이죠. 결정권을 가진 동양인이 늘어나야 우리의 존재감도 커집니다.” 지난해 7월 파리에서 열린 남성복 컬렉션을 지켜보던 중 결정권을 가진 이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겐조의 움베르토 레온과 캐롤 림이 겐조의 올봄 컬렉션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다. 듀오는 남녀 통합 쇼에서 동양인 모델만 섭외했다. 여자 모델 47명, 남자 모델 36명은 중국, 일본, 한국에서 이 쇼를 위해 날아갔다. 오프닝을 맡은 박희정부터 남성복 쇼에 선 이봄찬과 박형섭 등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의도적인 캐스팅이었습니다.” 레온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다양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이야말로 저의 뮤즈입니다. 그걸 반영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백인 모델로만 가득한 패션쇼를 지켜봐온 패션 팬에게 동양계 모델로 꽉 채운 패션쇼는 분명히 새로운 충격이었다. 최근 2월과 9월이라는 고정적 패션 스케줄을 벗어나, 6월 초 ‘컬렉션 1’이라는 이름으로 게릴라 쇼를 선보인 알렉산더 왕도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받아들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미국으로 이민 온 후 동양계 미국인으로 살아간 경험을 자세히 들어봤어요. 내 브랜드를 새로이 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로 인지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쇼에 등장한 남자 모델은 모두 동양계였으며, 소라와 성희, 리우 웬 등 아시아 톱 모델이 죄다 쇼에 등장했다(동양적 그래픽을 활용한 옷차림의 벨라와 카이아 못지않게 멋있었다).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지켜봐왔지만, 스스로 변화의 주인공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해 커버 촬영을 위해 뉴욕을 찾았을 때 현지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친구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보그 코리아> 커버는 한국인만 촬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백인 모델을 찍지?” 패션에는 전혀 관심 없는 친구의 순수한 질문이었지만,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국 오디언스를 대상으로 하는 매체가 왜 푸른 눈의 금발 모델을 촬영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순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한혜진과 혜박부터 시작해 수주, 성희, 지혜, 소라, 현지, 윤영, 호연 등 특별한 성과를 이룬 한국인모델들은 계속해서 <보그> 표지에 등장했다”고 답했다. 또 “샤넬과 루이 비통, 프라다와 생로랑 등 최고의 패션을 다루는 매체로서 세계 정상급 모델을 커버 모델로 캐스팅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그> 콘텐츠는 한국 모델이 주로 등장하고, 동양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마음 한쪽이 개운치 않았다.

    “그렇기에 이미지 메이커로서 우리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최근 이 같은 주제 아래 뉴욕에서 열린 공개 토론에 패널로 참석한 피터는 한층 더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아시안을 위한 패션 매거진과 팟캐스트가 그것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스타일리스트, 저널리스트와 작가 등이 참여한 이 기획은 그동안 사이드라인에 머물던 동양인을 위한 콘텐츠로 채운다. “제가 성장할 무렵 이런 미디어가 존재했다면, 제 정체성과 자존감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저를 대상으로 하고, 저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했으니까요.”

    영화 <블랙 팬서> 개봉 후 <타임>지는 어느 저널리스트의 글을 실었다. 자밀 스미스(Jamil Smith)라는 작가는 이 영화가 남길 족적은 상상 이상이라고 평했다. 이미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나라에서 영화 한 편이 지닌 힘이 그 정도로 클까? 그는 대중문화의 힘은 결코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만약 백인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대중문화에서 당신을 닮은 사람을 본다는 경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매일 대중문화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버전의 당신을 비추고 있다. 잘나가는 상사, 시인, 환경 미화원, 군인, 간호사 등등. 그러한 세계는 당신에게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알려주고 있다.” 한 단어의 영어로 요약하자면 ‘Representation’ , 요즘 한글로 번역하자면 ‘존재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올여름 아시안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경험을 할지 모르겠다. 아시안이 주인공이 된 할리우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가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의 주연부터 조연은 모두 동양계 배우다. 그들이 사랑에 빠지고 질투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분명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한국 배우가 주인공인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한국 여성이 뷰티 브랜드의 모델이 되는 것이 당연한 곳에서 자란 우리에게도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올 수 있다. 동시에 패션계에서도 이렇듯 낯선 동양인의 존재를 더 자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그리고 패션계의 변화된 풍경은 우리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돌아올것이다.

      에디터
      손기호
      포토그래퍼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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