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컬처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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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컬처 클럽

2018-07-15T16:59:49+00:00 2018.07.17|

평양에서 영화 페스티벌이 열리고,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다. 우리가 알 듯 모르는 북한 영화, 문학, 음악, 음식, 건축에 관한 근거 있는 설.

MOVIE
김일성과 김정일은 영화인 북한의 ‘3대 혁명 영화’가 있다. <피바다>(1969), <한 자위단원의 운명> (1970), <꽃 파는 처녀>(1972)다. 여기에 <성황당> (1969)과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1979)까지 더해 ‘5대 혁명 영화’로 부르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3대 혁명 영화의 원작자가 (물론 집단 창작의 대표자 격이지만) 김일성이라는 것. 또한 김정일은 영화 이론가로서 1973년에 <영화예술론>을 발표하는데, 영화의 연출부터 연기, 음악, 촬영 등 모든 분야에 걸친 대원칙을 담은 일종의 ‘영화 백과사전’이다. 한편 ‘수령형상영화’라는 용어가 있다. 김일성 혈통의 혁명 역사를 담은 영화나 수령의 저서를 영화화한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담은 10부작 <조선의 별>(1980~87)이 대표적이다.

평양엔 세계적 규모의 필름 라이브러리가 있다 김정은이 농구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면, 김정일은 내향적 취미를 즐기는 청년이었고 영화광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수집벽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졌다. 1960년대는 북한 경제력이 남한을 능가하던 시절. 북의 공작원들은 금괴를 자금으로 사용했는데, 아시아 지역에 수출하던 남한 영화의 프린트를 금괴 하나씩을 주고 사들였다는 후문이다. 안타까운 건 당시 충무로의 열악한 환경. 영화를 팔 땐 수출용 프린트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데, 원판 프린트를 외국에 내보냈고 제대로 회수하지 않은 경우 그 영화는 결국 유실되고 말았다. 1960년대 수많은 영화가 이렇게 사라졌는데, 어쩌면 상당수 북한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일설에 의하면 이만희 감독이 만든 전설적인 걸작 <만추>(1966)가 북한에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영화를 아우르는 라이브러리의 규모는 약 1만5,000편이다.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 개인 컬렉션 개념이지만, 양적으로만 보면 프랑스의 시 ‘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능가한다.

영화배우가 지폐 모델 북한의 1원짜리 지폐 모델은 <꽃 파는 처녀>(1972)의 주인공 홍명희다. 지폐엔 영화 속 장면이 재현되어 있다. 과거 1원 지폐 모델은 문정복이었는데, 바로 배우 양택조의 어머니다. 인민배우였던 문정복은 68세였던 1990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양택조는 어느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어머니가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레 언급했다. 여기서 북한의 배우 시스템을 잠깐 살펴보면, 크게 11등급으로 나뉜다. 가장 위는 ‘인민배우’로 대부분 원로 배우들이며 남한으로 치면 차관급 대우를 받고 당에서 아파트를 지급한다. 아래는 ‘공훈배우’로 국장급 대우이며, 주로 중견 배우들이다. 아래에 1~8등급까지 나뉘고, 신인급은 ‘무급배우’이다.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 북한 영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6ㆍ15 남북 공동선언을 하면서 남한과 북한 사이의 교류는 거대한 변화를 맞이했다. 영화 쪽도 마찬가지인데, 공동선언 약 한 달 후인 2000년 7월 22일 <불가사리>(1985)를 개봉한다. 남한에서 개봉한 첫 번째 북한 영화이며 지금까지는 유일한 북한 영화 <불가사리>는 신상옥 감독이 제작을 지도했으며, <고질라> 시리즈에서 작업한 일본의 특수효과 팀이 참여한 작품. 민중에 의해 봉건제가 무너질 때 괴수 불가사리가 앞장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은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 채 탈북했고, 정건조 감독이 마무리했다. 한편 신상옥 감독은 미국으로 건너가 루마니아와 손을 잡고 <불가사리> 리메이크에 참여해 1996년 <천하 무적 갈가메스>를 만든다. 감독은 숀 맥나마라. 신상옥은 원안자 겸 기획자였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2003)와 전주국제영화제(2005)에서도 북한영화를 상영했다.

북한에서 상영한 남한 영화 이두용 감독의 <아리랑>(2003)은 나운규의 <아리랑>(1926)처럼 무성 영화 스타일로 제작했다. 이 영화는 2003년 남한 영화인들이 방북했을 때 상영했는데, 이때 변사가 바로 양택조였다. 이두용 감독은 사극 판타지 액션 <월광무>를 북한에서 찍고 싶어서 관계자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주었는데, 6개월 후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왔다. 100여 명의 제작 인원이 들어올 경우 대민 접촉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게이유였다. 북한에서 촬영한 첫 한국 영화는 <간큰 가족>(2005)이다. 금강산 관광 부분을 일부 촬영했다. 최재은 감독의 <길 위에서>(1999)엔 판문점 앞에서 한 소녀가 시를 낭독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중학생 시절의 문근영이다. 그리고 소설 <임꺽정>(1948)으로 유명한 작가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이 쓴 <황진이>(2002)는 2006년에 남한에서 출간되어 송혜교 주연으로 2007년에 영화화되었다. 이때 홍석중과 정식으로 판권 계약을 맺었다. 한편 2004년엔 남북한 공동 개발 모바일 게임인 ‘독도를 지켜라’를 만들기도 했다. 휴대전화 게임으로, 독도를 침입하는 왜구를 막아내는 슈팅게임이다.

국제영화제 개최지 1987년 9월에 열린 ‘평양영화 축전’은 북한 영화를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기획했다. 그 주기는 2~3년인데, 마침 오는 9월에 16회 축전이 열리며 남한의 영화인들도 참석을 추진 중이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최초의 북한 영화는 <춘향전>(1959)으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했다. <꽃 파는 처녀>(1972)는 체코에서 열린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고, 배우 최은희는 <소금>(1985)으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4년 후 배우 강수연도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로 모스크바의 히로인이 된다.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영화 <살아 있는 령혼들> (2001)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7,500명을 싣고 오다가 의문의 폭발 사고로 침몰한 우키시마마루호의 실화를 소재로했다. 1만 명이 넘는 엑스트라를 동원한 대작이며, 러닝타임은 3시간이 넘는다. 컴퓨터 그래픽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북한 영화이기도 하다. 디지털 애니메이션도 있는데, 10부작 TV 애니메이션인 <고주몽>(2017)으로 꽤 괜찮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틀에 한 편씩 영화를 보던 주민 해방 후 전쟁 전까지 북한은 자체 영화 제작이 힘들었다. 그래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200여 편의 영화를 수입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에선 1년에 200편 가까이 되는 영화를 제작했고, 주민들은 1년에 150편 정도의 영화를 보았다. 대중 선전용 순회 상영으로 이틀에 한 편씩 영화를 본 셈이다. 지나치게 많은 영화를 강제적으로 보게 되자, 이에 관련된 은어가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건 ‘벌잠’인데 ‘잠을 벌충한다’는 뜻. 영화 상영 시간에 주로 잠을 자기에 만들어진 용어다. 수령형상영화는 ‘벽보 그림’이라고 불렀는데, 각 가정의 벽에 우상화 관련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네 종류의 영화가 있는 북한 북한에서 영화는 크게 네 종류로 나눈다. ‘예술영화’는 흔히 우리가 극장에서 접하는 장편 극영화다. ‘기록영화’는 다큐멘터리이며, ‘과학영화’는 과학교육 및 기술과 연구 등에 관한 영화다. 최초의 기록영화는 <우리의 건설>(1946), 최초의 예술영화는 <내 고향>(1949)이다. 이 영화는 양말 공장 자리에 촬영소를 차리고 찍었다. 이 외에 북한 영화에 대한 간단한 상식을 살펴보면, 북한에선 시나리오를 ‘영화문학’이라고 부른다. 북한 영화의 대사는 후시 녹음을 통해 북한의 표준어인 평양 중심의 말 ‘문화어’로 더빙한다. 몇몇 성우가 목소리 연기를 도맡는데, 이것은 1960~70년대 한국 영화를 연상시킨다. 북한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대부분 흡사한데, 주인공은 진취적이고 밝고 선하지만 갈등과 장애를 겪는다. 여기서 주인공은 혁명 과업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며 결국 목표를 이룬다. 그러기에 북한 영화는 거의 모든 작품이 해피 엔드다. 북한에선 코미디를 ‘경희극(輕喜劇)’이라고 한다. 웃음이 있는 낙천적인 서민극으로 <명랑한 무대>(1966)가 효시 격이다.

키스 신은 생략 북한 영화는 도덕적이며 금욕적이다. 극장에 개봉되어 흥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육이나 사상 전달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키스 신을 포함한 성적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신상옥은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물이다. 최은희가 1978년 1월에 납북된 후, 신상옥 감독도 1978년 7월에 북으로 가게 되어 1986년 3월에 탈북하기 전까지 북한에서 함께 영화 작업을 했는데, 1985년에 찍은 <소금>엔 겁탈 신이 있었다. 이런 ‘쎈’ 장면을 찍었다간 나중에 후환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스태프들이 모두 도망쳐서, 신상옥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메고 촬영했다고 한다. <사랑 사랑 내 사랑>(1984)은 <춘향전>을 각색한 작품인데, 옷고름 푸는 장면만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편 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에 대한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2016)에선 김정일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그의 육성은 결코 외부로 유출된 적이 없는데, 최은희가 핸드백에 몰래 녹음기를 숨겨 녹음한 목소리가 다큐멘터리에 담겼다.

언젠간 100부작 영화를 북한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시리즈가 많다는 것. 특히 <민족과 운명>은 1991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62부작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2000년대 초 100편까지 만들 계획을 발표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언급한 여러 북한 영화를 직접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북한 영화’를 검색하면 100편이 넘는 북한 영화를 접할 수 있다. —김형석(영화 평론가)

MUSIC
노래와 춤의 엄격한 구분 남한에서 가수는 춤과 노래는 물론 개인기 한두 가지는 필수다. 가수로 활동하다가 연기자로 데뷔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북한 가수들의 춤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삼지연관현악단의 축하 공연에서는 파격적 의상에 춤을 선보였다. 북한 가요 ‘달려가자 미래로’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검은색 짧은 팬츠에 붉은색 민소매를 입고 경쾌한 리듬에 맞추어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이 정도가 가수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율동이다. 춤 솜씨가 별로인 이유는 노래 부르는 가수와 춤을 추는 무용수의 구분이 엄격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출신이 다르다. 가수들은 음악대학, 무용수는 예술대학 출신으로 출발이 다르다. 공연에서도 노래와 무용은 구분이 분명한데, 대부분의 공연은 음악이 중심이다. 무용이 포함되는 경우는 종합공연이라고 한다. 가수는 무대에서 조용히 노래만 부른다. 최근에는 가수도 율동을 선보이는 경우가 생겼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대를 오고 가거나 몸을 가볍게 흔드는 정도다.

점점 대담해지는 공연 삼지연관현악단이 파격적 의상으로 부른 ‘달려가자 미래로’는 원래 모란봉악단의 노래다. 하지만 공연에서는 모란봉악단의 노래보다 북한식 칼군무를 선보이는 무용곡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 이 노래를 공연 음악으로 사용하는 예술단의 하나가 왕재산예술단이다. 왕재산예술단은 화려한 무용을 주특기로 하는 예술단이다. 왕재산예술단의 화려한 무용을 보여준 공연으로 2017년 7월에 있었던 ‘대륙간탄도로케트 시험발사 성공기념 음악무용 종합공연’이 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왕재산예술단은 여성 무용수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타이트한 흰색 바지와 상의를 입고, ‘달려가자 미래로’ 노래에 맞추어 시원한 칼군무를 펼쳤다. 정치적 색채가 짙은 무대였지만 예전에 볼 수 없던 화려한 모습을 연출했다. 왕재산예술단은 가요 ‘승리의 축배’에 맞춰 ‘타프춤(탭댄스)’도 무대에 올렸다. 군복을 입은 남성 무용수 8명과 빨강, 노랑, 파랑 원색을 입은 여성 무용수 8명으로 구성된 단원 16명의 탭댄스는 이색적인 볼거리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륜춤’이 이어졌다. ‘륜’은 ‘훌라후프’의 북한식 표현이다. 여성 무용단원 7명이 출연하였는데, 짧은 탱크 톱과 미니스커트를 입고 기계체조 동작을 응용한 무용을 연출했다. 지금까지 선보인 가장 파격적인 무대의상이었고, 가장 아찔한 퍼포먼스였다. 북한 공연도 점점 화려해지고 대담해지고 있다.

래퍼는 없다 남북의 음악은 역할과 기능이 다르다. 그중 하나가 랩이다. 북한에는 랩이라는 장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래퍼도 없다. 북한에서 음악은 가사 전달이 분명하고 리듬에 맞아야 한다. 북한의 모든 음악은 발라드풍이다. 형식이 제한되어 있고, 창법이 폭넓지 않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시조같이 노랫말이 4음절로 나뉜다. 노래가 대나무 마디처럼 나뉜다고 해서 절가라고 한다. 모든 가사가 절가화되어 있으니 짧은 시간에 많은 가사를 소화하는 랩은 존재할 수 없다. 노래를 절가로 만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암기에 유리하다. 창법도 복잡하지 않기에 새로운 노래도 쉽게 배우고, 여럿이 편하게 따라 부를 수 있다. 남한의 80년대식 발라드 가요가 북한 가요와 비슷하다. 2018년 4월 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한 예술단의 <봄이 온다> 공연을 직접 본 김정은 위원장은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백지영이나 최진희의 노래가 인기 있는 것도 발라드의 호소력 짙은 창법과 가사가 북한 가요 스타일과 맞기 때문이다.

특별 요청곡 ‘뒤늦은 후회’ 지난 2018년 4월 3일 남한 예술단이 평양에 있는 류경정주영체육관(1만2,000석)에서 남북 합동 공연을 했다. 삼지연관현악단의 방남 공연에 따른 답방 형식으로 이루어진 남한 예술단의 두 번째 공연이었다. 공연에서는 뜻밖의 노래 한 곡이 불려졌다. 가수 최진희가 ’사랑의 미로’에 이어 ‘뒤늦은 후회’를 불렀다. ‘뒤늦은 후회’는 최진희가 아닌 남매 듀오 ‘현이와 덕이’의 노래다. 최진희도 사전에 몰랐던 요청이었다. 대중적으로 그렇게 알려진 곡도 아니기에 사연이 궁금했다. 북한은 노래와 가수가 분명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좋은 노래는 누가 불러도 상관없다.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북측에서 ‘뒤늦은 후회’를 특별 요청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남한 가요가 상당히 많이 알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영선(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FOOD
함흥에는 없는 함흥냉면 여름이니까 냉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거의 예외 없이 평양냉면 이야기부터 꺼내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번엔 함흥냉면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사실 북한에는 함흥냉면이 없다. 따뜻하거나 미지근하게 먹는 감자 농마(녹말) 국수가 있는데, 이를 속초에 정착한 실향민이 발전시켜 함흥냉면으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함흥냉면의 고향은 속초, 특히 6·25전쟁 이전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바닷가 땅인 청호동이다. 전쟁통에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은 잠시 기다리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집을 짓기도 어렵고 식수 확보도 쉽지 않은 모래사장에 임시로 정착했다. 그리고 같은 고향 출신끼리 모여 살며 신포마을 등의 집단촌을 이뤘다. 함흥냉면뿐 아니라 아바이(‘아저씨’의 함경도 사투리)순대도 속초 실향민의 문화유산이다. 돼지 대창에 돼지고기, 선지, 마늘, 된장 등을 버무려 채운 뒤 쪄낸 것으로 갈 수 없는 고향의 맛을 재현했다. 돼지에서 많이 나오는 부위가 아닌 대창을 채워 크므로 왕순대라고도 불린다. 대창이 희귀한 탓에 겨울에는 명태, 여름에는 오징어에 속을 채워 또 다른 순대를 탄생시켰다. 요즘은 오징어순대만 대중 음식으로 남아 있다.

평양에는 있는 평양냉면 올해의 음식이라면 평양냉면이 아닐까? 지난 4~5년 동안 일종의 컬트 음식으로 넓혀온 인기가 남북의 화해 분위기로 정점을 찍었다.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딸려온다. 일단 북한에서는 대체로 ‘냉면’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그저 ‘국수’로 일컫는다고 한다. 특히 평양냉면의 원형으로 통하는 음식이 동치미 국물에 만 국수이다 보니 차가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굳이 구분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유명한 백석이 시에서 언급하는 국수가 실제로는 냉면이며, 또 다른 메밀 바탕 면 음식인 막국수도 결국 평양냉면과 같은 뿌리를 나누는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메밀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최근 남북한 문화 교류단의 식사 등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진짜’ 평양냉면의 면은 왜 그렇게 색이 짙은 것일까? 남한에서는 태운 껍질의 가루를 섞어 색깔을 낸 메밀면이 유통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북한의 평양냉면이 색이 검은 것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흉작 탓에 메밀 비율을 낮춰 현재의 면이 되었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다. 젓가락에 딸려 올라오는 모양새부터 질겨 보인 것도 전분 비율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메밀은 일반 밀에 비해 수확량이 떨어지는 일종의 특용작물이므로 어려운 시기에 입지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쩌면 평양보다 이북 출신의 실향민을 통해 전파된 서울, 특히 우래옥의 평양냉면이 오히려 ‘진짜’ 평양냉면에 가깝다는 설이 있다. 박찬일 셰프가 이에 대해 여러 갈래로 글을 썼으니 인터넷을 검색해보시라. 일반인이라면 북한에 가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이지만 ‘진짜’ 평양냉면의 맛을 추측해볼 실마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중국 및 북한과 수교를 맺은 아시아 국가의 음식점에서 먹을 수 있고, 남한에도 탈북자 출신이 맛을 책임지는 평양냉면 전문점이 몇 군데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곳은 종로 탑골공원 근처의 능라밥상이다. ‘탈북 여성 국내 박사 1호’이자 북한의 음식 문화를 정리한 책 <북한식객>의 저자가 운영하는 북한 음식 전문점인데, 100% 메밀로 뽑았다는 ‘순면’과 동치미 바탕 국물의 시원함이 돋보인다. 단맛이 거의 개입하지 않으며, 화학조미료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철학 영향인지 현재 남한에서 먹을 수 있는 평양냉면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직선적인 맛이다. 딸려 나오는 백김치와 함께 먹다 보면 ‘긴 겨울밤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야식으로 먹는 차가운 국수의 맛’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평양)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라는 믿음으로 퍼진 실향민의 추억담 말이다. 그 밖에도 남한에서는 벽제갈비-봉피양, 남포면옥, 장수원의 평양 버냉면이 동치미 국물을 바탕으로 삼는다. 현재 남한의 음식이 그렇듯 남포면옥과 장수원의 국물은 단맛이 두드러지니 참고하시라.

시원함이 돋보이는 김치와 백김치 이왕 꺼낸 김에 백김치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능라밥상의 백김치도 맛있지만 의외로 단맛이 살짝 깔려 있어 냉면의 솔직함이 살짝 죽는다는 느낌이 든다. 더 잘 만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단맛의 기미가 전혀 비치지 않는 능라도-상호도 비슷하다-의 백김치가 조금 더 맛있고 냉면과도 잘 어울린다. 비단 백김치가 아니더라도 북한의 김치는 추운 기후 영향인지 양념을 많이 쓰지 않아 짜거나 맵지 않고, 국물이 많아 시원한 한편 발효로 인한 감칠맛 덕분에 얄팍하다는 느낌이 안 드는 특색을 지닌다. 싱거운 것도 같지만 충분한 감칠맛으로 만족감을 주는 상태인 북한 사투리 ‘슴슴하다’도 이런 맛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형용사이다. 결국 젓갈이 핵심일 텐데 서해를 접하는 황해도나 평안도 지방은 새우젓과 꼴뚜기젓, 동해 쪽의 함경도나 강원도는 멸치젓 혹은 명태나 오징어를 쓴다. 내륙 지방은 마른 명태 대가리를 고아낸 국물이나 정어리를 젓갈 대신 쓰기도 한다. 또한 젓갈과 별도로 소고기나 돼지고기 국물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가 국수나 밥 말아 먹기 좋은 북한식 김치의 국물에 일조하는 것이다.

남한보다 북한 음식, 만두 백김치처럼 북한에 좀 더 강하게 뿌리를 내린 음식을 하나 더 꼽는다면 만두가 있다. 워낙 세계적인 음식이니 남한에서도 먹지만 한식에서 뿌리를 찾자면 아무래도 북한으로 향한다. 실제로 남한에서도 만두는 냉면처럼‘이북식’을 꼽는데, 다만 냉면 전문점 등에서 볼 수 있는, 아이 주먹만큼 큰 만두를 북한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변씨 성을 가진 이가 처음 만들었다고 해서 ‘변씨만두’라 불렸다가 ‘편수’로 굳어진 만두가 있는데, 사각형의 피에 소를 얹고 피라미드형으로 싸서 모양을 잡는다.

식혜 아닌 식해 평양냉면 말고도 남한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먹을 수 있는 음식 가운데 명태 혹은 가자미 식해가 있다. 남한에서는 엿기름으로 담그는 단 음료와 구분하기 위해 ‘식해’가 표준어이지만 아직도 북한에서는 ‘식혜’라고 불린다. 남한에는 6·25전쟁 당시 월남한 실향민들에 의해 전파되면서 좁쌀밥으로 발효시키는 조리법이 표준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조를 농사짓지 않으므로 쌀이나 강냉이밥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생선과 무, 고춧가루의 기본 재료로만 만드는 걸 가장 맛있는 식해로 친다.

또 다른 겨울 별미 어복쟁반 평양냉면 말고 어복 쟁반도 북한식 겨울 별미로 통한다. 낮고 넓은 냄비에 저민 소고기 편육을 빙 둘러 담은 것을 기본으로, 메밀국수를 더하고 국물을 자작하게 붓고 전골처럼 끓여 먹는다. ‘어복’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명이 조금씩 다른데, ‘편안한 가운데 배부르게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의 ‘어복’이라는 설명이 있는 한편 암소의 어복살, 즉 배받이살을 주재료로 만든 요리라는 의미에서 어복쟁반으로 불린다는 주장도 있다.

대표 길거리 음식 두부밥 탈북자를 중심으로 남한에도 알려진 북한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이 있다. 두부밥이다. 북한의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장마당’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이름처럼 두부한 모를 얇게 6등분해서 대각선으로 칼질해 삼각형으로 썰고, 기름에 튀긴 뒤 가운데를 반 갈라 주머니를 만든다. 그리고 볶은 채소, 멸치, 고춧가루, 들기름, 맛소금으로 간한 밥을 채운다. 두부를 튀긴 것이 유부이니 흡사한 음식이지만 유부가 머금은 단촛물의 단맛과 신맛에 기대는 유부초밥과 달리 밥에도 직접 양념을 해 매운맛까지 두드러진다는 점이 다르다.

175년 전통으로 빚는 대동강맥주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48배 앞서지만 그래도 맥주만은 북한산이 더 맛있다. 대동강맥주 말이다. 2012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대놓고 비교하며 남한의 맥주를 혹평했고 맥주 회사에서도 입장을 내놓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다(당시 기사를 쓴 다니엘튜더가 이후 한국에 맥줏집을 차렸다). 실제로 대동강맥주가 훨씬 더 맛있다. 2000년대 초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서 수입된 덕에 2010년까지는 남한에서도 사서 마실 수 있었다. 아직도 그 인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쌀을 쓰므로 특유의 뭉근함은 느낄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했고 자잘하고 부드러운 기포도 인상적이었다. 남한의 ‘국맥’은 언제나 재료와 비율이 의심스럽지만, 사실 대동강맥주 맛은 175년 전통의 영국 어셔 양조장 시설을 ‘분해한 후 재조립’해 빚어낸 덕분이다. 2000년 현재의 화폐 가치로 174억원을 들여 매입한 설비가 컨테이너 30대 분량이었다. 그 기계로 2002년 생산을 시작했다. 매각을 기억하는 전 어셔 양조장의 직원 게리 토드가 대동강맥주를 마셔보고는 “맛이 가볍기는 하지만 색깔 등이 대체로 만족스럽다”고 평가했다니 그만하면 성공적인시설 이전이라 볼 수 있겠다.

손가락 과자와 각종 후식 북한에서는 설날 등 명절에 후식으로 찐 감자나 단호박 등을 먹는다. 아니면 식용 소다, 설탕, 밀가루, 소금 등으로 손가락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름처럼 손가락 길이와 굵기의 반죽을 구워 설탕을 녹인 아이싱(Icing)을 바른 과자이다. ‘손가락 과자’로 검색하면 남한에서 만드는 것을 살 수 있는데, 밀가루 반죽을 오븐에 구운 뒤 가루 설탕에 굴리는 슈가볼 또는 러시안 티 케이크(Russian Tea Cake)와 꽤 흡사하다. —이용재(음식 평론가)

LITERATURE
유토피아를 꿈꾸는 SF 북한에도 SF가 있다. SF(Science Fiction), 이른바 공상과학소설은 과학의 미래와 진보와 발전에 수반하는 사회생활의 변천과 도덕의 변화와 인류의 진화 등의 문제를 다룬다. 즉 변화무쌍하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런 SF가 세상에서 가장 정적이고 진보, 변화, 발전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북한에 존재한다. <북한 과학환상문학과 유토피아>(서동수, 소명출판, 2018)에 따르면, 1950년대 중반부터 활발히 창작되어왔고 ‘과학환상문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해 국가정책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밀었다고 한다. 여전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SF가 서럽다. SF에는 과학의 발달이 인간 생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그리는 순수 과학소설과 황당무계할 수 있는 과학적 공상 설정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선사하는 공상과학소설이 있겠는데, 북한의 SF는 다분히 전자이겠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북한의 입맛에, 허황된 공상뿐 아니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유토피아를 그려낼 수 있는 SF가 잘 부합하지 않았나 싶다.

유럽에 진출한 소설 북한 소설이 유럽에 번역된 적이 있다. 최근 남한에서 재출간한 북한 작가 백남룡의 소설 <벗>(아시아, 2018)은 2011년 9월 22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11년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한 바 있다. 백남룡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간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다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로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여 북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북한의 대표적 현대 작가이다. <벗>은 북한 최고 베스트셀러이다. 당시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이 책을 “북한 문학이 사회 주의적 사실주의와 혁명적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주민들의 일상적 삶을 다루는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소개했고, 시사 주간지 <엑스프레스>는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창문”이라고 소개했다. 한 부부의 ‘이혼’을 중심으로 북한 주민들의 일상적 삶을 다룬 이 책은 프랑스 동양문화언어대 교수로 프랑스 악트 쉬드 출판사 한국어 컬렉션 총책임자이기도 한 파트리크 모뤼스가 번역했는데, 한국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저작권을 얻기 위해 두번이나 평양을 방문해 작가를 만났다고 한다.

교과서로 이미 접한 북한 문학 남한 문학 교과서에 북한 현존 작가의 작품이 실렸다. 지난 2012년부터 고등학교에서는 새 교육과정의 문학 교과서를 공부하고 있다. 14종의 문학 교과서가 존재하는데, 일찍이 해금되어 익히 알고 있는 백석, 정지용, 이태준, 박태원, 이용악, 오장환 등 월북 작가들의 작품 말고도 북한에서 80년대 나온 백남룡의 <생명>(천재(김))이나 2000년대에 나온 홍석중의 <황진이>(지학(최), 천재(정), 천재(김))가 실려 있다. 이 14종에서만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을 출제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생애 가장 치열하게 앎을 추구하던 시기에 알게 모르게 북한 문학을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전에 실린 리혼과 해빛 남한의 국어대사전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북한어(문화어)를 만날 수 있다. 남한에서는 과도하게 사용하고 북한에서는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두음법칙’ ‘사이시옷’ 등을 예로 들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리혼’ ‘해빛’을 찾아보면, 각각 ‘이혼의 북한어’와 ‘햇빛의 북한어’라고 나온다. 또한 표준어 ‘헤어지다’와 충분히 헷갈릴 수 있는 ‘헤여지다’는 ‘헤어지다의 잘못’이 아닌 ‘헤어지다의 북한어’로 나오는걸 볼 수 있다. 북한의 국어대사전인 <조선말대사전>에서도 남한어(표준어)를 만날 수 있을까?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남북 합작 사전 만들기 분단 이후 남북의 국어학자들이 함께 편찬하는, 남북 겨레가 함께 볼 사전<겨레말큰사전>을 만들고 있다. 남한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 그리고 발굴한 새 어휘까지 조사·합의하여 올림말을 선정해 집필한다. 민족의 언어 유산을 집대성하고 남북의 언어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남과 북이 공동으로 편찬하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라고 한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 따르면, <겨레 말큰사전> 편찬 사업은 1989년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통일국어사전을 편찬 하기로 합의하면서 출발했다. 2004년 4월 5일 남측의 (사)통일맞이와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가 의
향서를 체결하고, 2005년 2월 20일 남과 북의 편찬위원들이 금강산에서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 위원회’ 결성식을 가짐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6년 1월에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을 전담하는 기구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출범하였으며 2007년 4월에는 특별법을 제정해 사업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게 되었다. —김형욱(아시아출판사 편집장)

ARCHITECT
실용성마저 삼킨 우상화 건물 2018년 서울에서 장식 없는 직사각형 콘크리트 건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구 도심에서 간간이 보이는 오래 묵은 콘크리트 덩어리는 어김없이 그 표면에 가볍고 경박한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쪼가리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 반면 북한의 거리는 으레 그 회색빛 건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콘크리트 박스는 기교나 장식이 없다. 필요한 공간을 나누고 비바람을 막기 위해 놓인 콘크리트판의 조합이다. 그렇다고 실용성을 강조한 합리로 읽기에는 사용한 콘크리트의 두께와 크기가 쓸데없이 육중하다. 불필요한 거대함으로 그 지도부가 지키려는 우상의 허망함을 아는 이에게, 이런 직각의 잿빛 건물은 권위적이면서 애틋하다. 서구 모더니즘 건축 스타일을 변용해 복제한 콘크리트 건물은 산업화 시대의 남한에도 익숙한 풍경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젊은 부모님의 사진에 등장하고 내 유년기의 배경이었다. 그래서 난 이 차갑고 권위적인 콘크리트 벽 앞에서 아늑해진다. 곧 실제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거라는 전망으로 사방이 요란하다. 궁금하다. 그 묵은 잿빛 벽 위에 어떤 풍경과 기억을 투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난 그 앞에서 다시 아늑해질 수 있을까? —권민호(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