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제주시 디지털구 노마드동

2023.02.21

by VOGUE

    제주시 디지털구 노마드동

    디지털 노마드를 원했다.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의 <보그> 사무실을 떠나 제주도 서귀포시의 호텔에 머무르며 일했다. 깨달은 바가 있다.

    디지털 노마드는 철 지난 유행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가 꾸는 꿈이다. 세계 곳곳에 혹은 좋아하는 어딘가에 머물며 원격으로 일하는 방식 혹은 그러한 사람을 디지털 노마드라 한다. 노마드(Nomad)는 유목민을 뜻하는 라틴어다. 풀이 자라는 곳을 찾아 이동하던 유목민이 21세기에 말 대신 디지털을 타고 이동한다. 1995년 프랑스의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는 저서 <21세기의 승자>에서 “사람들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디지털 시스템하에서 정착을 거부하고 유목민으로 변모해간다”라고 했다.

    5년 전에 디지털 노마드를 취재한 적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발리는 디지털 노마드의 부락 같은 곳이다. 풍경은 대략 이렇다. 리조트의 차양 아래서 사람들이 노트북으로 일한다. 탁자에는 빈탕 맥주가 있고, 누군가는 수영을 한다. 그런데 라탄 체어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노트북을 올려놓은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저들은 하루에 얼마만큼 일할까? 발리에서도 할 수 있는 저 일은 뭔가? 이들은 원격 근무가 가능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 프리랜서로 그래픽 디자이너나 게임 개발자, 작가 같은 부류였다. 커리어만 생각하면 차라리 전 세계 코워킹 스페이스를 돌며 일하는 스타트업 CEO의 사례가 더 와닿았다.

    얀 지라드라는 블로거는 ‘디지털 노마드라는 거짓말’에서 이렇게 썼다. “모래 해변에서 노트북을 펼치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노트북이 고장 나니까요.” 나 역시 디지털 노마드란 일보다는 휴식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세계라 여겼다.

    하지만 디지털 노마드의 신봉자들은 견고하다. 길 위에 버리는 출퇴근 시간, 억지로 맺어야 하는 회사 내 인간관계, 배를 채우는 데 의의를 두는 점심 비용, 내 의지가 아니라 회사 의지대로 돌아가는 업무 시스템… 이들에서 해방되어 내가 원하는 공간에서 시간의 주인이 되어 일하는 꿈. 이것은 욜로일 뿐 아니라 업무에서도 능률적이라는 거다. 나는 이 실험에 참가하기로 했다. <보그>는 흔쾌히 3주의 시간을 주었다.

    ‘욜로’다운 지역으로 떠나고 싶었다. 시차 때문에 미주, 유럽은 제외다. 새벽에 가수면 상태로 일하고 싶지 않다. 동남아시아는 너무 덥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적당히 고립되고, 출장이 용이한 제주도를 선택했다. 연세(1년에 내는 세)가 50만원이던 시절부터 꿈꾸던 제주살이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거나, 집을 빌리고 싶진 않았다. 음식을 해 먹을 수 있으면서도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는 레지던스 호텔이 좋았다.

    서귀포의 ‘체이슨 호텔 더 스마일’을 선택했다. 세계 유수의 부티크 호텔이 가입한 마이 부티크 호텔의 멤버이자, ‘부킹닷컴’에서 10점 만점에 9.9점의 평가를 받은 곳이다. 제주 출신 스태프, 아티스트와 함께해 지역 상생을 도모하는 가치관도 마음에 들었다. 제주의 유명 베이커리 봉주르마담의 크루아상을 조식으로 내고, 호텔 캐릭터와 자체 상품 디자인은 제주 출신의 아티스트 갑빠오(고명신)가 작업했다. 무엇보다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워라밸’을 지향해 스마트오피스를 운영하고 있어서다. 일정 비용을 내고 객실 외에 스마트오피스를 이용할 수 있다. 스마트오피스에는 밀라노에서도 주목받은 디자인 스튜디오 움직임(Umzikim)의 높이 조절이 가능한 책상과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대형 모니터, 프린터, 유선전화 등을 갖췄다. 싱크대, 냉장고, 서랍장, 화장실이 있으며, 한쪽에는 정수기와 캡슐 커피 머신까지 있다. 나만의 작업실이 생긴 기분이었다. 객실은 기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냉장고, 싱크대, 세탁기, 전자레인지가 있고, 장기 거주자가 원하면 인덕션을 대여할 수 있다. 렌터카 대여, 헬스클럽 이용권, 조식 룸서비스도 지원한다. 이 호텔은 휴식 공간과 업무 공간을 결합하면서도 분리한 형태인 것이다. 이전에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이자 디자이너 하라 겐야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제 꿈은 호텔을 짓는 것입니다. 일과 휴식을 결합한 호텔이 트렌드가 될 것입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제게 꼭 필요하고, 현대인에게도 마찬가지죠.” 지금은 ‘호텔=휴식’의 개념이지만, 시공간의 분리가 무의미해지듯, 일과 휴식이 공존하는 수순이 될 거라는 거다.

    나는 3주간의 디지털 노마드 생활 동안 두 번, 이틀 동안 서울에 갔다. 대면이 필수인 인터뷰와 화보 촬영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기간엔 계속 제주도에 있었다. 인터넷과 서적으로 자료 조사를 하고, 전화 취재를 하고, 메신저와 메일로 스태프들과 상의, 공유했다. 업무 시간은 준수하려 애썼다. 프리랜스 에디터 시절에도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나갔고,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귀가했다. 그렇지 않으면 잔변이 남은 느낌으로 일하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닌 기묘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주에서의 디지털 노마드는 복병이 있다. 제주가 몹시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일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올레를 걷고, 서핑도 해야 하며, 제주도 힙스터들이 가는 가게에서 맥주도 마시고 싶었다. 그렇기에 더 ‘가열차게’ 일을 하면… 좋았겠으나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조식을 먹으며 내적 갈등에 시달린다. 오늘 중문에 서핑을 나가느냐, 2층 오피스에 가서 기사를 쓰느냐. 때론 서핑이 이겨, 웨트수트를 입다 말고 업체와 전화 미팅을 했다. “이거 파도 소리인가요?” 업체 직원이 물었다. “아뇨, 그냥 외근 중이에요.” 나는 내용을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파도에 밀려 나올 때마다(서핑을 잘하지 못한다) 백사장에 가서 업무 전화와 카톡을 확인했다. 디지털 노마드에서는 ‘규칙’이 중요하다. 일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철저히 분리하고, 매일 같은 패턴으로 생활해야 한다.

    나는 저녁을 제주와 함께 보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에 더 엄격해졌다. 허비하는 시간을 없앴다. 택시 타고 가로수길에 가서 런치 겸 미팅을 하거나, 오후의 티타임 같은 것들. 체이슨 호텔 더 스마일은 일을 끝낸 후 즐길 수 있는 여행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아침에는 호텔 뒤에 자리한 오름인 고근산에 오르고, 저녁에는 올레시장에 가서 군것질을 하고, 달빛에 부서지는 천지연폭포를 본 뒤에는 쇠잔한 서귀포항을 산책하는 식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보그>의 조소현 기자도 제주에 왔다. 여섯 살 아들과 부모님도 함께였다. ‘과연 가족과 함께 디지털 노마드가 가능한가’라는 엄청난 도전을 위해서였다. 싱글인 나와는 다른 허들이 있지 않을까. 그녀는 일단 호텔에 머물며 집안일, 특히 청소에서 해방된 것에 행복해했다. 돌아와 문을 열면 마법처럼 정리된 하얀 침대 시트! 또한 가족이 머무는 객실과 오피스가 물리적으로 분리된 것에 만족했다. “출근하고 올게요”라고 8층 객실에서 2층 스마트오피스로 이동하면, 가족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오히려 저는 일과 가족 양쪽에 더 집중할 수 있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요! 게다가 1시간 30분씩 걸려 출퇴근하지 않아도 됐지요.” 다만 제주도의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에서 서울의 복잡한 일을 처리할 때 힘들어했다. “업무적으로 일이 발생하면, 타격을 더 크게 받았어요. 서울의 사무실이라면 금방 대처할 일도 제주에서는 뭔가 더 속상해져서 일 처리가 늦어졌죠.” 나는 반대였다. 남원포구에서 한치 건조장을 지날 때 업체의 컴플레인 전화를 받았다. 태양이 청순하게 한치를 비추지 않았더라면 나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화를 내는 수화기 너머의 중생이 안타까웠다. 이제 한치 철인데, 얘는 그것도 모르겠지.

    디지털 노마드에서는 근육이 필요하다. 내 시골 친구는 서울에 올라올 땐 근육을 재정비한다. “지하철을 환승하며 서울 사람들의 속도와 거침없음에 당황하지 않게 마음 근육을 정비해.”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제주에서 디지털 노마드를 하기 위해선, 일하는 시간만큼은 서울에서의 근육을 잊어선 안 된다. 희망이 있어 근육은 더 견고해진다. 이따 저녁에는 바다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실 수 있다!

    한 달, 1년, 평생 동안 디지털 노마드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보그> 편집부의 아량으로 3주간 머물렀지만 앞으로는 쉽지 않을 것아다. 하지만 삶의 윤택을 위해 1~2주라도 ‘간헐적 디지털 노마드’를 할 요량이다. 다음엔 다른 제주에서 단행본 작업을 해도 좋겠다.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체이슨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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