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새로운 멋을 전파하는 파리의 디자이너

2018.08.06

by VOGUE

    새로운 멋을 전파하는 파리의 디자이너

    패션으로 시를 쓰는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사라 린 트란. 현실의 여성을 향해 들려주는 그들의 조언.

    파리지엔의 멋을 전하는 르메르의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사라 린 트란.

    영국 작가 제이디 스미스(Zadie Smith)는 소설 <온 뷰티> 속에서 아이티 부두교에 등장하는 한 여신을 언급한다. 정확히는 아이티 출신 화가인 헥토르 이폴리트가 그린 여신 에르줄리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 이폴리트는 ‘메트레스 에르줄리(Maitresse Erzulie)’라는 이름의 작품 속에 “부두교의 위대한 여신, 검은 성모, 난폭한 비너스”를 대담한 붓질로 그려냈다. 그리고 그 작품을 자신의 거실 벽에 걸어둔 극 중 칼린은 그 여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 여신은 사랑, 아름다움, 순결, 이상적인 여성, 달을 상징해요. 또 질투, 복수, 불화의 여신이기도 하죠. 그런가 하면 사랑과 아낌없는 원조, 선의, 건강, 아름다움, 부의 여신이기도 하죠.”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5년 전 파리 패션 위크 출장길에서였다. 일정이 끝난 호텔에서 혹은 쇼가 시작되길 기다릴 무렵 틈틈이 페이지를 넘기던 중 이 구절이 들어왔다. 순간 ‘파리의 수많은 디자이너 중 과연 누가 에르줄리 여신과 가장 어울릴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며칠 전 봤던 ‘르메르’ 쇼를 떠올리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쇼는 주말 아침 이른 시간 센 강변의 메종 드 라 라디오(프랑스의 국영 라디오 건물)의 햇살 가득한 복도에서 열렸는데 난 미처 몰랐던 르메르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지적이고 실용적인 트렌치 코트, 목덜미에 묶은 크림색 캐시미어 스웨터, 은근히 센슈얼한 모직 랩 드레스 차림의 여성은 차분하고 당당하게 텅 빈 복도를 거닐었다. 섬세하지만 연약하진 않았고 여유로움을 지니고 있지만 사랑 앞에서는 질투로 불타오를 듯 보였다. 쇼가 끝나고 모델 31명이 한꺼번에 둥그런 복도를 따라 걸어 나올 땐, 근사한 숙녀를 만난 듯한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 쇼는 우리가 처음으로 ‘오피셜 캘린더’에 이름을 올린 쇼였어요.” 이태원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스타벅스 커피와 피지 워터를 두고 나와 마주 앉은 르메르의 디자이너 사라 린 트란(Sarah-Linh Tran)이 당시를 추억하며 조용히 말했다. 오묘한 블루 팬츠 수트를 입은 그녀 곁에는 비슷한 컬러의 셔츠를 입고 턱수염을 기른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가 있었다. 사라 린의 대답을 듣던 크리스토프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덧붙였다. “사라 린이 우리 브랜드와 여성복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저와 비슷한 철학과 여성, 세계를 많이 나누긴 하지만, 그녀만이 지닌 감각이 있어요. 그 쇼야말로 진짜 사라 린의 세계였어요.” 그의 말에 사라 린이 조용히 웃었다.

    두 사람을 만난 건 지난 5월이다. 현대백화점 본점에 단독 매장을 열며 한국 고객을 만나기 위해 직접 파리에서 왔다. 조금 예민한 듯한 그녀와 누구와도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듯한 크리스토프는 보기 좋은 균형을 이뤘다. 이미 라코스테와 에르메스에서 아티스틱 디렉터로 일한 그는 네 번째 방문이었지만, 사라 린은 서울이 처음이었다. “시간이 나지 않아 도시를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고요한 기운이에요. 사람들은 조용히 이야기하고, 서울 전체에 고요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녀가 사용한 단어 ‘Calm’은 르메르의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다. 그의 옷은 바라봐달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과도한 장식도, 이유 없는 노출도 없다. 현실의 여성을 위해 아주 잘 만든 일상복. 여기에 여성적인 우아한 매력을 살짝 첨가했을 뿐이다. “우린 삶과 연결된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크리스토프가 스스로의 옷에 대해 말을 이었다. “꿈과 현실을 오가지만, 여성의 삶을 떠나진 않아요. 그 속에서 우리만의 시적인 리듬을 찾고 싶습니다.” 사라 린에게 중요한 건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접근이다. “디자인할 때 최대한 자연스럽게 접근합니다. 어떤 법칙이나 레시피는 없어요. 모든 게 유기적으로 흐를 때 우리가 원하는 옷이 탄생합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전 세계 여성에게 고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14년 에르메스를 떠난 후 크리스토프는 삶과 일을 함께하는 파트너 사라 린을 본격적으로 내세웠다. 라벨 이름에서 크리스토프를 떼어낸 것도 같은 시기다. “크리에이티브 듀오가 이끌고 가는 라벨임을 나타내기에 더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더 서정적인 이름이죠. 더 여성적인 느낌이 들기도 해요.” 과거의 동양적 실루엣과 수도자 같은 분위기 대신 현실적인 여성 감각을 더한 옷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물론 현실적인 옷만 고집하진 않았다. 때로 과감한 디자인(여성의 가슴을 본뜬 핸드백)으로 화제가 됐고, 도전하기 쉽지 않은 색상과 형태의 옷도 등장했다. 현실을 배려하지만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은 디자이너의 작업은 그래서 더 호소력이 짙었다. 한국의 어느 여배우는 칸 영화제 레드 카펫에서 르메르 드레스를 입었고, 내 주위 멋쟁이들 역시 파리에 가면 마레에 자리한 르메르 매장으로 달려갔다.

    디자인과 이름이 바뀌었으니, 이제 르메르를 만나는 방식도 변해야 했다. “모델이 옷걸이 역할만 하는 패션쇼는 원하지 않습니다.” 크리스토프는 쇼를 선보이는 방식부터 바꾸었다. 모델들이 일자 무대를 거니는 대신 대각선으로 틀거나 원형 런웨이를 자연스럽게 걷는 식이다(런웨이 사진 역시 옆모습을 촬영했다). “새로운 스타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여성이 존재해야 하죠. 그래서 관객은 제자리에 앉아 있고, 멋진 여성이 그 옆을 지나가는 듯한 컨셉을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모습에서 더 큰 매력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사라 린 역시 동의했다. “정면에서 여성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는 경우는 현실엔 없잖아요. 다른 각도에서 옷을 바라보면 더 현실적으로 옷을 살펴볼 수 있죠.” 또 평범한 패션쇼 조명이 아니라, 영화 촬영을 위한 조명을 사용한다. “일종의 도전이었어요. 하지만 영화 조명이 훨씬 부드러워요. 모델의 피부와 옷도 더 부드럽게 표현해주죠. 아주 작지만 그런 미묘한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두 사람에게 영감의 원천이다. 하지만 영화 캐릭터의 옷차림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일차원적 영향은 피한다. 때로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에서 모델들의 워킹을 배우고,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 속 붉은 조명이 코트 위로 등장하는 식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러티브’. “캐릭터를 완성해야 그 옷에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만의 이야기를 떠올리려 합니다.” 사라 린의 말에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응했다. “좋은 컬렉션은 좋은 스토리를 가진 컬렉션입니다. 캐릭터와 스토리, 배경과 분위기 모두를 갖추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작업이 더 강한 호소력을 지닌 이유는 그 영향력이 런웨이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패션쇼는 중요한 정차역이지만, 종착역은 아닙니다. 마지막 목적지는 고객이죠.” 마레 매장에 가면 문 뒤에 숨어 고객들이 쇼핑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그들을 만날지 모른다. “우리 옷은 쉬운 옷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옷장에서 유난히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지닌 몇 안 되는 친구와 같은 옷 말이죠.” 온라인 쇼핑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직접 매장에서 조용한 옷의 맥락을 느껴보길 바라는 것도 같은 이유. “어제 저녁 갤러리아백화점에서 고객들을 만났어요.” 사라 린은 한국 여성들이 옷을 입는 방식이 매우 흡족하다고 전했다. “오래전부터 이번 시즌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아이템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믹스해 입었어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를 정도로 좋았어요.”

    온갖 소음의 시대에 고요하게 브랜드를 이끌어가는 건 쉽지 않다. 조바심이 나진 않느냐고 묻자, 크리스토프는 빠르게 답했다. “소리치지 않아도 우릴 알아봐주는 이들이 있었어요. 매우 운이 좋았죠. 작은 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말이에요.” 세상을 정복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좀 더 편안하게 만들고 싶다는 디자이너가 덧붙였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옷을 만져보고, 입어보았으면 좋겠어요. 그거야말로 우리에게 조용한 행복이에요.”_

      에디터
      손기호
      포토그래퍼
      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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