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라파엘 로자노헤머

2018.08.12

by VOGUE

    라파엘 로자노헤머

    일방적 소통의 시대는 끝났다.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미디어 아트는 관객이 절대 결정권을 갖는다.

    관객의 심장박동에 맞춰 전구가 깜빡이는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 ‘Pulse Room, 2006’.

    용산의 새 랜드마크가 된 아모레퍼시픽 본사.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이자 (주)유현준건축사사무소의 대표 건축사 유현준은(<알쓸신잡> 시즌 2에 나온 그분) 이곳을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사옥”으로 꼽았다. 그의 책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이 사옥은 적절하게 공동체 의식을 만들 수 있게 중간중간 야외 중정이 있는 보이드 공간을 도입하였다. 사무 공간들을 적절하게 멀리 떼어 놓아 다른 층 사람들이 퇴근하는 모습을 가깝게 보기도 어렵다. 유리창의 수직 루버(햇빛 가리개)는 직사광선을 막는 동시에 적절하게 사무실 내부의 사생활도 보호해준다. 원활한 층간 소통을 위해 벽으로 둘러싸인 비상계단이 아닌 실내 개방형 계단을 평면 중간중간 배치시켰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마당이 있는 한옥을 3차원 오피스 사옥으로 잘 재해석한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관객의 심장박동에 맞춰 전구가 깜빡이는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 ‘Pulse Room, 2006’.

    그곳에 출근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쓴 내용이지만, 방문객인 나 역시 열림과 소통의 기운을 느꼈다. 인상적인 부분은 로비의 공중 연못. 천장의 물에 투과된 햇빛이 실내를 부드럽게 밝힌다. 1층부터 지상 3층까지는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공용 문화 공간 ‘아트리움’을 마련했다. 방문한 날에 ‘미쟝센 단편영화제’의 개막식이 열리고, 사람들은 라이브러리에서 책을 읽거나 유연하게 놓인 의자에서 쉬고 있었다. 이곳은 건설 당시부터 ‘안과 밖의 연결’을 중심에 두고 자연과 도시, 용산이란 지역사회와 회사, 소비자와 임직원이 소통하고자 했다. 야외 공원(포켓 파크)에 설치된 올라퍼 엘리아슨의 조형물 ‘Overdeepening’도 그 의미를 담은 듯하다. 거대한 고리가 거울에 반사되어 끊임없이 얽히고설켜 보인다.

    얼굴 인식과 형태 감지 알고리즘을 사용해 참여자의 모습과 관계를 기록하는 ‘Zoom Pavilion, 2015’.

    본사의 또 다른 화제 공간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Amorepacific Museum of Art, APMA)’이다. 지상 1층 전시장과 지하 1층의 여섯 개 전시장은 고미술과 현대미술, 건축, 디자인, 패션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 5월 3일부터 8월 26일까지 개관 기념 전시회 가 열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근래 본 전시중 작품과 미술관의 공간 구성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멕시코 태생의 캐나다 출신 작가 라파엘은 26년간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다양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이 전시는 신작 5점을 포함한 29점으로 구성된, 작가의 첫 번째 아시아 회고전이자 최초 한국 개인전이다. 라파엘은 공간과 어우러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축이 한창이던 APMA에 안전모를 쓰고 방문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 중 하나가 1층에 설치된 ‘Blue Sun, 2018’이다. 압도적이다. 나사와 협업한 작품으로, 태양 표면에서 포착되는 불꽃과 얼룩, 요동치는 움직임을 LED 전구 2만5,580개로 이뤄냈다. 11주기로 바뀌는 태양의 실제 색 변화를 감상할 수 있다. APMA의 큐레이터 김경란은 작가가 물리학 전공이어서 이런 접근이 가능한 것 같다고 말한다. “라파엘을 개관전 작가로 선정한 이유는 아모레퍼시픽 본사가 지닌 ‘열린 소통’ ‘상호작용’이란 가치를 추구해왔기 때문이죠. 그의 작품을 경험하면 굉장한 희열을 느낄 거예요.” 라파엘의 작품에는 움직임을 주요소로 하는 키네틱 아트·생체 측정 설치 작품·사진·VR·나노 기술 등의 첨단 문명이 등장한다. 여기에 일상을 둘러싼 뉴스·문학·취조실 거울·CCTV 등을 소재로 하며, 우리의 맥박·목소리·지문·초상·말할 때의 공기 파장·움직임을 주요 매개체로 한다.

    얼굴 인식과 형태 감지 알고리즘을 사용해 참여자의 모습과 관계를 기록하는 ‘Zoom Pavilion, 2015’.

    전시장의 마지막 작품 ‘Pulse Room, 2006’에선 눈물이 나왔다. 커튼을 열고 들어서면 어두운 공간에 백열전구 240개가 반짝인다. 지상엔 하나의 백열전구가 설치되어 있다. 거기로 다가가 심장박동을 기록하면 그 전구에 불이 켜진다. 내 심장이 뛰는 속도대로 전구가 깜빡이며, 강도만큼 빛을 낸다. 그렇게 240명의 심장박동이 모여 240개의 전구를 밝히고 있다. 누군가의 심장은 희미했고, 누군가의 심장은 갓 낚아 올린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라파엘의 작품은 작가의 따뜻한 시선, 콘텐츠, 기술의 삼합이다.

    ‘Airborne Newscast, 2013’은 벽면에 KBS, 로이터, AP 같은 언론 매체의 뉴스를 프로젝터로 투사한다. 관객이 다가가면 움직이는 대로 기사의 글자가 해체된다. 대부분의 관객은 처음엔 기사를 읽다가 점차 자신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라파엘은 작품을 통해 ‘보다 중요한 것의 가치’를 얘기한다.

    스피노자가 제작한 렌즈 형태를 차용해 그의 철학을 얘기하는 ‘Semioptics for Spinoza (Shadow Object 4), 2012’.

    또 하나 인상적인 작품은 ‘Sandbox (Relational Architecture 17), 2010’이다. 소형 모래 박스는 아래층 실내 해변을 거니는 사람을 작은 크기로 투사한다. 투사된 이미지에 손을 대면 카메라가 이를 포착해 영상으로 생중계해 해변 위로 손의 이미지를 투사한다. 내 손에 해변을 거닐던 관객이 담긴다. 그와 나의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관계’를 맺었다. 이 작품은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하루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를 재현한것이다. 처음엔 작가조차 실내에 작품을 들인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새로 지어진 APMA의 규모와 유연함 덕분에 산타모니카 해변이 용산에 자리할 수 있었다.

    APMA는 과거와 현재, 동서를 넘나드는 기획전을 1년에 서너 차례 열 예정이다. APMA의 큐레이터 김경란은 전시는 본사의 가치와 맥을 같이한다고 덧붙인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을 겁니다. 개관전이 인터랙티브 아트였지만, 올가을의 전시는 ‘조선 병풍전’이 될 수 있죠. 이곳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어요.”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김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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