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크레이지 쿨 아시안

2018.09.25

by VOGUE

    크레이지 쿨 아시안

    크레이지 쿨 아시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예고편을 처음 봤을 때 할리우드에서 부자 중국인들을 풍자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며 피식 웃고 말았다. ‘아시안’보다는 ‘크레이지 리치’라는 자극적 수식어가 영화의 방향인 듯 보였다. 관음적 재미나 주는 동양 버전 ‘카다시안 가족’ 같은 영화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동양인이 가득한 스크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되리라곤 1%도 상상하지 못했다.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주간지 <뉴요커>를 비롯해 각종 매체의 동양계 기자와 칼럼니스트들이 일제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를 보고 울게 된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영화는 한순간도 슬프지 않다. 초지일관 명랑한 톤을 유지하는, 근래 보기 드물게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동양인 집단 눈물 사태의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그 원인을 캐기 위해선 너무 유명해져서 이젠 암기할 정도가 된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잠깐 가져와야 한다. 우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조이 럭 클럽> 이후 25년 만에 나온 등장인물이 모두 동양인인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다. 이민자의 드라마를 다룬 <조이 럭 클럽>과 달리, 씩씩한 보통 여자가 멋진 남자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신데렐라’ 스타일의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다. 보통 이 장르에서 동양인 캐릭터는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척하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구색 맞추기용 소품과 같은 존재였다. 여자가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 액션 영화의 주인공은 남자가 당연했던 것처럼, 메이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은 당연히 백인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모두 동양인으로 채우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대성공이다. 이전에 이런 영화가 없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승승장구하며 흥행 중이고, 무명 배우였던 남자 주인공 헨리 골딩은 최근 톰 포드의 패션쇼에서 톰 행크스와 안나 윈투어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슈퍼스타로 부상했다. 자, 그래서 나는 왜 울게 되었느냐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여자 주인공이 엄청난 부자인 남자 친구 집안에 처음 인사를 가게 되면서 마주하는 계급, 문화, 세대 차이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여자들 관계를 부각시키며 지리멸렬한 신데렐라 스토리를 비껴간다. 가족을 위해 개인적 성공을 포기한 시어머니 세대와 자존감과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 세대의 여자가 공감대를 찾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관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동양계로서 감정 이입이 분출한다. 가족과 여자라니, 동양 사회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테마가 아닌가. 그다지 새로운 결론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할리우드 영화를 동양인으로서 100% 공감하고 감정 이입하면서 보는 것. 관객으로서 당연한 경험이 이 영화의 존재를 값지게 만들었다. 그 깨달음의 순간,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더불어 영화의 힘은 동양인을 넘어 세상 모든 인종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동양인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 모든 이들이 공감의 포인트를 찾았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블랙 팬서>와 <겟 아웃>처럼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 경제학을 무너뜨리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잇따른 동양인 주인공 영화의 성공으로 미국 관객들은 베를린 장벽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축제 분위기다. 한국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서치>는 인도계 미국인 감독이 연출하고 한국계 미국인 배우가 주연을 맡은 한국인 가족의 이야기다. 감독과 배우는 홍보할 때마다 “왜 동양인이 주인공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둘은 아주 쿨하게 “왜 안 되나?”라고 되물었다. 인종이 이야기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스릴러인 <서치>는 캐스팅을 백인으로 한정 지을 필요가 없다는 선례를 남겼다. 넷플릭스의 자체 제작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또한 쿨한 동양인 영화로 사랑받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쓴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동양인 배우가 지극히 평범한 10대 미국 소녀 ‘라라 진’을 연기한다.

    <서치>

    미국 10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은 언제나 백인이었으나 이제 그 자리에 동양인이 들어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을 세상이 목격하는 중이다. 주인공 라라 진의 영화 속 90년대 레트로 패션을 따라 하는 인터넷 붐을 보면서 동양인 ‘스웩’을 좀 부려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따라붙는다. 시대정신 같은 구호 ‘Representation Matters(어떻게 대표되느냐가 중요하다)’에 따라 세상의 시선이 변하고 있다. 동양인이 가장 쿨한 존재인 양 부각되는 2018년, 눈물을 흘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 홍수경(영화 칼럼니스트)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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