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가는 시곗바늘을 잠시 멈춘 찬열의 망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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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가는 시곗바늘을 잠시 멈춘 찬열의 망중한

2018-09-26T10:23:13+00:00 2018.09.26|

찬열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달려가는 시곗바늘을 잠시 멈춘 찬열의 망중한.

스파이크 존즈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 <그녀>를 상하이에서 촬영한 건 꽤 그럴듯한 결정이었다. 고집스러운 전통과 맹렬한 변화가 대륙의 스케일로 교차하는 이 메트로폴리탄의 풍경은 종종 SF의 한 장면처럼 거창하고 낯설다. 동방명주탑을 비롯한 랜드마크를 잔뜩 품고 있는 황푸강의 야경이 대표적인 예다. 한껏 불을 밝힌 고층 빌딩 숲은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고 과시적이어서, 좋든 싫든 이곳에 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멈춰 서서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지난 9월 4일 저녁만큼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 건너편으로 향했다. 아메리칸 스타일을 대표하는 브랜드 타미 힐피거는 2018년 가을 시즌의 ‘타미나우(TommyNow)’ 컬렉션을 발표할 장소로 상하이를 선택했다. 뉴욕과 LA, 런던과 밀라노에 이은 다섯 번째 도시. 전 세계에서 날아온 취재진과 관람객은 해가 저물 무렵부터 황푸강 서쪽에 설치된 런웨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도시의 야경 이상으로 화려한 게스트 목록 가운데서도 특히 이목을 집중시킨 건 머리를 밝게 염색하고 나타난 찬열이었다. 그는 거대한 팬덤을 몰고 수시로 국경을 넘는 K-팝 스타이자, 한창 급부상 중인 패션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리고 타미 힐피거와 특별한 인연은 이 재능 많은 뮤지션의 스타일과 감각이 새삼 주목받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1년 전, 그러니까 지난 2017년 9월의 타미 힐피거 쇼는 런던에서 개최됐다. 라운드하우스 공연장에서 열린 쇼의 프런트 로에 초대받은 찬열은 스타일리스트와 브랜드의 논의에 따라 새로운 가을 컬렉션 의상을 착용하고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쇼장으로 출발하기 직전 발견한 타미의 90년대 빈티지 점퍼가 패기 넘치는 K-팝 스타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결국 그는 컬러 블록 디자인의 윈드브레이커와 산뜻한 플래드 셔츠 차림으로 쇼장에 입장했다. 90년대 무드를 재해석한 예상 밖의 스타일링과 쿨한 아티스트의 시너지에 미디어는 신속하게 반응했다. 미국판 보그닷컴은 그날 밤의 베스트 드레서로 한국에서 온 뮤지션을 꼽으며 “어느 누구도 엑소의 찬열보다 타미를 더 근사하게 소화하지는 못했다”는 제목을 붙였다. 이 기사의 크리틱은 이날 찬열의 의도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과하게 애쓴 느낌이 없이 패셔너블하다.’ 런던쇼와 지난해 <보그 코리아>를 통해 화보를 선보인 이후 찬열에게는 ‘타미 보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랩 네임으로 써도 될 만한 패셔너블한 별명인 셈이다.

‘애쓰는 느낌이 없다’는 건 어쩌면 스타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대 아래의 찬열은 좀처럼 넘치게 구는 법이 없다. 억지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기 때문에 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상하이에서 선보인 타미 쇼 이후, <보그>와 재회한 촬영 현장에서도 그는 노련한 프로인 동시에 평범한 20대일 뿐이었다. 요란한 자의식으로 꽁꽁 싸맨 스타는 그 자리에 없었다. 무리하지 않는 담백한 태도는 찬열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성은 그의 취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이 아티스트는 힘을 적절히 덜어낸 차림일 때 특히 제 옷을 만난 것처럼 돋보이고, 촬영할 때도 레이어드해서 스타일링한 아이템이 있으면 벗어서 옆에 놓거나 손에 들거나 하는 식으로 ‘진짜’를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이건 결국 다시 한번 찬열만의 편안한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입는 사람의 캐릭터는 옷이나 액세서리 이상으로 패션에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스타일은 아이템의 단순한 덧셈만으로 답을 내는 수학보다는, 누군가의 개성과 아이템 사이의 반응으로 완성되는 화학에 가깝다.

찬열과 타미 힐피거의 조합은 썩 이상적이다. 두 해에 걸쳐 연달아 쇼에 초대하고, 특히 올해는 가장 마지막에 입장하도록 배려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중요한 앰배서더로 대접받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뮤지션 특유의 쿨한 무드는 타미 힐피거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게다가 사소한 정보를 하나 덧붙이자면, 180cm를 훌쩍 넘는 장신인 탓에 브랜드의 라지 사이즈를 맞춘 듯이 소화한다. 이번 촬영은 상당히 신속하게 진행된 편인데, 찬열이 워낙 모델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스타일링 과정에서 딱히 의상 길이를 수정할 필요가없었던 덕분도 크다.

‘타미 보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아티스트 역시 타미힐피거라는 브랜드에 깊은 이해와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듯했다. 촬영용 의상을 훑어보던 중, 그가 ‘가장 타미답다’고 생각한다는 아이템을 골랐다. 브랜드의 색깔을 정확하고 담백하게 보여주는 흰색 후디와 데님 팬츠, 빨간 캡 차림이었다. 뮤지션이 탈의실에서 나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때만큼은 그도 엑소의 멤버 찬열보다는 스물다섯의 청년 박찬열에 훨씬 가까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