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모리슨의 기발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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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모리슨의 기발한 디자인

2018-11-27T10:07:51+00:00 2018.11.26|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THINGNESS>에 들어서면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의 ‘슈퍼 노멀’한 물건(Thing)들이 지닌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피크닉의 드라마틱한 진입로

‘디자인’만큼 이 시대와 밀접한 것이 또 있을까? 디자인의 개념, 그것의 프로세스가 낳은 수많은 제품들과 삶에 미치는 시각적 영향력 등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디자인은 삶에 더욱 정교한 층을 구축하고 더욱 구석구석 스며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 가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디자인과 접촉하며 살아간다.”는 릭 포이너의 표현은 더욱 절묘하다.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는 그 의미를 일상적인 차원에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자리다.

 

감각적인 전시 포스터의 모티브가 된 의자는 Plywood chair © Sebastian Fehr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 © Elena Mahugo

영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은 지난 30여 년 동안 비트라, 카펠리니, 알레시, 무인양품 등 유수의 브랜드와 함께 하며 의자, 테이블, 시계, 조명, 주방용품 등 전방위적인 제품들을 디자인해왔다. 무엇보다, 단순하고 기능적인 일상의 사물들에 집중하며 선보인 제품들은 ‘평범함의 위대함’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을 보여준다. “디자이너는 사람들 누구나 가진 철저한 실용적 사고와 상식적 논리가 없다면 애초에 펜을 들지 않는 편이 낫다.”는 그의 언어처럼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소한 이미지나 짧은 텍스트, 일상의 순간 같은 모티브에서 출발한 재스퍼 모리슨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좋은 ‘물건(Thing)’으로 탄생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THINGNESS> 전시장.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재스퍼 모리슨 레퍼토리로 가득하다.

피크닉을 운영하고 있는 글린트 김범상 대표는 이번 재스퍼 모리슨의 <THINGNESS> 전시를 실현시킨 장본인으로 오랜 시간 그가 가장 좋아해 온 디자이너였다고 한다. 어떤 물건이 눈에 띄어 리서치를 하다보면 재스퍼 모리슨 디자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그는 재스퍼 모리슨 디자인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존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을 변형하고 차용하면서 결국 그 용도에 딱 맞게 떨어지는 물건으로 내놓는 그 자체가 굉장히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디자인을 보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어요.” 누구나 집에 디자이너의 의자를 하나씩 갖고 사는 시대, 디자이너의 트레이와 접시, 커트러리를 식탁 위에 올리는 저녁이 일상이 된 지금 ‘디자인 전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맥락으로 이 물건을 만들고, 어떤 공정으로 새롭게 시도되는지를 안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소비자 입장에서 물건을 살 때 한번쯤 고민을 해보지 않겠어요? 단순히 과시가 아니라 더 중요한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에서 디자인 전시가 의미가 있다고 봐요.” 전시 오프닝 이틀 후, 김범상 대표는 <보그>의 독자들을 위해 기꺼이 전시 도슨트가 되어 주었다. 김범상 대표와 함께 살펴 본 열 개의 재스퍼 모리슨 셀렉션을 통해 디자이너의 사고와 감성에 좀 더 가까이 닿을 수 있기를!

 

Thinking Man’s Chair, Cappellini, 1986 우연히 쿠션이 없는 앤티크 의자를 본 재스퍼 모리슨은 구조적인 요소만으로 의자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러 장의 스케치 끝에 양쪽 팔 받침에 음료수를 올릴 수 있는 동그란 판을 붙이고, 철제 곡선이 유려한 의자를 만들었다. 원래는 ‘마시는 사람의 의자 The Drinking Man’s Chair’라고 이름 붙이려 했으나 우연히 ‘생각하는 사람의 담배’라는 포장의 문구를 본 후 ‘생각하는 사람의 의자’로 결정했다고. 김범상 대표는 “이 의자를 보면 디자이너의 야심이 느껴져요. 견고하고 비례도 잘 맞는 이후의 제품들보다 더 치기어린 젊은 시절의 디자인으로 보이거든요.”라고 말한다.

 

 

Three Green Bottles, Cappellini, 1988 세 개의 초록 와인병은 1988년 베를린에서의 전시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당시 재스퍼 모리슨은 손으로 잡고 불어서 만드는 유리 가공방식으로 제작하고 싶었지만 베를린에서는 그 방식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결국 평범한 와인병을 가져다가 병 입구 부분을 열로 눌러 납작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단순하고 간결한 세 개의 병은 마치 모란디의 정물처럼 원형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Plywood Chair, Vitra, 1988 김범상 대표는 이 의자를 보고 자코메티의 조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최대한 군더더기를 없애고 원형만 남기려는 듯한 디자이너의 의지가 느껴진다고. 합판 조각 몇 개로 이루어진 플라이우드 체어의 심플하고 적확한 구조는 이번 전시의 감각적인 포스터가 되었다. 전기 실톱과 제도용 곡선자, 두 가지 장비와 합판만으로 완성된 단순하고 실용적인 의자는 1980년대 말, 멤피스 그룹을 위시한 화려하고 과장된 디자인의 유행에 대한 재스퍼 모리슨의 재치 있는 응수가 아니었을까.

 

 

Atlas System, Alias, 1992

어느 화창한 아침, 재스퍼 모리슨은 오스트리아 빈의 카페에서 아름다운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탁자 다리 윗부분이 아래 부분보다 두꺼워 보이는 경험을 했다. 그건 빛이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생긴 착시현상이었다. ‘보는 것’의 주관적인 감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아틀라스 시스템의 다리 윗부분을 두껍게 디자인했다. 사소하지만 시적인 경험이 상식을 뒤집는 순간이 된 셈이다. 어떤 형태에서 인간적 면모를 발견할 때, 좋은 디자인으로 간주하게 된다.

 

Lowpad, Cappellini, 1999 덴마크 디자이너 폴 키에르홀름의 유명한 PK22 체어에 감탄해 온 재스퍼 모리스는 몇 년간 사용한 PK22에 편안함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항의 벤치에서 영감을 얻어 로우패드를 디자인 했다. 부피의 최소화, 압착된 패드를 통해 가벼움과 편안함을 동시에 획득한 로우패드는 김범상 대표가 처음으로 구입한 카펠리니 사의 제품이라고. “이 의자를 사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좋은 디자인이 우리 삶을 더 낫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Crate, Established & Sons, 2006

이 단순한 나무 상자는 디자이너가 파리의 아파트로 이사한 후 건축업자들이 사용하던 오래된 와인 박스를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로 사용한 일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와인 박스의 거친 못 대신 연결재를 사용하고, 나무의 결은 더 매끄러워졌지만 일상에서 존재해 온 물건들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재스퍼 모리슨의 철학이 느껴진다. 작은 수납장, 간이 테이블 등 용도도 다양하다는 장점도 지녔다.

 

Rotary Tray, Vitra, 2014

이 귀여운 트레이는 원래 ATM이라는 사무 가구 시스템의 책상에 고정된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가 이후 트레이 제품으로 생산되었다. 비용을 낮추기 위해 알루미늄이었던 기존소재를 플라스틱으로 바꾸었다. 사무실, 주방, 거실 등에서 여러 용도로 쓰임새가 좋고 귀엽고 다양한 컬러들 덕분에 비트라의 인기 아이템이 되었다. 피크닉 3층 아트숍과 4층의 라운지에 놓인 로터리 트레이를 보면 샘솟는 구매욕을 참기 힘들 것이다.

 

APC, Vitra, 2015

마치 나무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의자는 실용을 강조하는 재스퍼 모리슨답게 역시 플라스틱으로 제작되었다. 시트와 등받이를 의자 틀에서 분리해 편안함을 더한 APC의 묘미는 의자 틀과 시트의 컬러 톤을 살짝 다르게 한 디자이너의 재치에 있다. (컬러 톤의 차이를 알아채기 위해선 의자를 자세히 살펴볼 것!) 전시관람 후, 3층 팝업 스토어에 올라가 귀여운 노란색 APC 의자를 구경하고 4층 라운지에 마련된 그레이 컬러의 APC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남산을 만끽하는 건 어떨까?

 

Raami, iittala, 2019(1월 출시예정)

재스퍼 모리슨의 디자인 중 가장 최신의 제품인 라미 시리즈는 이딸라에서 곧 출시 예정이다. 김범상 대표는 “이 라미 시리즈처럼 친근하면서도 완벽한 형태의 디자인을 보면 감정적 울림을 느낀다.”고 말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늘 곁에 두고 있으면서 자꾸 손이 가게 만드는 물건들. 12월 중순부터 바 피크닉 에서는 라미 시리즈의 와인 잔에 내추럴 와인을 서빙한다는 반가운 소식. 게다가 카페 피크닉에서는 겨울을 위해 준비한 귤 주스를 역시 라미의 그윽한 잔에 담아낸다니 한껏 기대가 된다.

 

Cork Family, Vitra, 2004

와인 병 코르크 제작 공정에서 버려지는 코르크를 분쇄하여 블록으로 압축한 제품으로 재스퍼 모리슨이 스페인 세비야 남쪽의 코르크 참나무 숲을 지나며 아이디어를 구상했다고 한다. 방수성과 방부성 그리고 유럽의 흰개미들을 방어해준다는 코르크의 탁월한 기능에 디자인적인 효용도 갖췄다. “사이드 테이블로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툴로 생각한다.”고 재스퍼 모리슨은 말하고 있지만 그 무엇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단단한 내구성과 간결한 형태를 동시에 지녔다.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했거나 그의 감식안으로 선별한 다양한 제품들을 판매하는 팝업 스토어.

 

재스퍼 모리슨의 Soft Modular 소파와 Plate Table, 그의 여러 소품들로 꾸며진 라운지

 

재스퍼 모리슨 특별전
<Jasper Morrison:THINGNESS>
2018.11.16.-2019.3.24.
서울시 중구 퇴계로6가길 30 피크닉 Piknic
화요일-일요일 오전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오후 6시 입장 마감)
매주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