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아이템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2018.11.28

by VOGUE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취향 좋은 이들의 화장대 한쪽엔 어김없이 이 향수가 놓여 있다.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을 이끄는 당대 제일의 ‘코’와 나눈 대화.

    에디션 드 퍼퓸(Editions de Parfums). 프랑스어로 향수 출판사를 뜻한다. 도미니크 로피옹, 장 클로드 엘레나, 피에르 부르댕, 올리비아 지아코베티를 비롯해 톱 클래스 조향사 13인으로 구성된 이 향기로운 출판사의 지휘자는 프레데릭 말(Frédéric Malle). 출판사 대표가 소속 작가에게 집필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프레데릭 말은 현존하는 최고의 조향사들에게 향기 제조의 자율권을 부여한다. 지난 10월 30일, 프레데릭 말이 서울에 들렀다.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이하 프레데릭 말)의 베스트셀러 7종을 리패키징해 선보이는 ‘리미티드 보틀 컬렉션’ 론칭을 기념해서다. <보그 코리아>가 그와 예정된 대화시간은 40분. 촬영을 제외하면 30분쯤 대화를 나눠야 했다. 하지만 아이폰 음성메모에 남아 있는 그날의 녹음 파일 분량은 57분 48초. 프레데릭은 누구보다 근사하고 낭만적인 답변을 쏟아냈다.

    오전에 뿌리고 나온 향수는 뭔가요?
    베티베 엑스트라오디네르’죠.

    가장 좋아하는 제품인가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프레데릭 말의 남성 향수 중에는 훌륭한 제품이 아주 많거든요. ‘제라늄 뿌르 무슈’나 ‘비가라드 꽁쌍뜨레’ , ‘무슈’도 애용합니다. 오늘 뿌린 베티베 엑스트라오디네르는 제가 제작에 참여한 첫 향수죠. 오늘 저는 향수를 사용했지만 셰이빙 크림과 애프터셰이브 밤도 훌륭해요.

    ‘퍼퓸 퍼블리셔’는 당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직역하면 향수 편집장이죠. 프레데릭 말의 핵심 ‘코’로서 어떤 일을 하나요?
    제가 프레데릭 말을 ‘출판사’라 칭하는 이유는 조향사가 일종의 아티스트임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예요. 저와 조향사들이 일하는 방식은 출판사 편집장과 소속 작가들의 상황과 흡사해요. 갤러리 오너와 아티스트의 관계와도 비슷하고요. 이곳에서 저는 스파링 파트너이자 비평가예요. 물론 제 역할은 함께 작업하는 조향사의 성격이나 목적에 따라 달라집니다. 작업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제 역할을 축소할 때도 있죠.

    현재 조향사 13인과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테마로 향을 제작한다고 가정해보죠. 어느 조향사와 매치할 건가요?
    아마 도미니크 로피옹? 프레데릭 말 향수 중 절반가량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으니까요. 저와 도미니크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중요하죠. 만약 제가 서울을 테마로 만든다면 작업 시작에 앞서 서울이란 도시와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서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거예요. 현재로서는 서울에 대한 제 시각이 피상적인 측면이 없지 않아 있거든요. 관광객처럼요. 저는 호기심이 많아요. 도시의 미술관 방문을 즐기고 예술품을 감상하고 이해하죠. 어디선가 봤던 음식을 먹어보기도 하고요. 하지만 겨우 닷새쯤 머무른 후에 그 도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만 가능하죠. 지금껏 이러한 과정을 저와 함께해온 사람이 도미니크예요. 둘 사이의 코드로 소통이 가능하고, 서로를 굉장히 잘 알기에 각자 받은 느낌이나 감상을 공유하기도 쉽죠. 가까운 친구이자 기술적으로 세계 최고의 조향사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서울 향수를 제작한다면 도미니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군요. 그렇지만 한국을 저보다 더 잘 아는 신예 조향사가 나타나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한다면 그와 함께 작업할 가능성도 열려 있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굉장히 독특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사실 아직 한국에 대해 아주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물며 알아갈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요컨대 여러 요소가 독특한 방식으로 혼합된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한국인들의 향수에 대한 애정 또한 감동적이에요. 제게는 더없이 설레는 일이죠. 또 열정과 젊음이 강렬하게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 느낌도 들고요. 지금까지는 아주 좋은 느낌만 받았어요. 하지만 뭔가 많이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싶진 않아요. 한국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솔직하군요. 프레데릭 말 하면 드리스 반 노튼, 알버 엘바즈 등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들과 특별한 협업작이 연관 검색어처럼 따라옵니다.
    모두 저와 각별한 친구들이에요. 피에르 아르디와도 일한 적 있었는데 스프레이 시리즈를 디자인해줬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수많은 아티스트와 협업했죠. 스티븐 홀이나 제이콥+맥팔레인, 안드레아 푸트만, 파트릭 니거, 제이콥 그렌지 등 건축가들과 손잡고 매장을 새로 디자인했고 훌륭한 패션 디자이너 여러 명과도 협업했죠. 자연스럽게 저도 팀의 일원으로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요. 파리에서 자랐고 지금은 뉴욕에 살고 있어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요. 종종 이들과 제가 같은 감각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런 순간이 협업의 시작이 되곤 해요. 아주 캐주얼하고 자연스럽죠. 협업이 성사되려면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해요. 결혼과 같죠. 함께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맞아떨어지면 다음은 모든 게 쉽게 진행돼요. 지금껏 모든 협업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됐어요. ‘공동의 바람’이 핵심!

    개성 강한 아티스트와 작업하다 보면 처음 의도한 방향성이 흐트러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브랜드의 톤 앤 매너를 유지하는 비결은 뭔가요?
    프레데릭 말 조향사들이 작업할 때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가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잘 알 뿐 아니라 일종의 언어를 공유하는 거죠. 사실 향수와 관련된 전문 용어집이 따로 존재하지는않아 조향사들이 서로의 의중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요. 우리 조향사들과 오래 함께했기에 그들이 말하려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아울러 저를 비롯한 모두가 향수 원료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죠. 덕분에 제작 초기 단계에서 만들려는 향수에 대해 묘사했을 때 모두가 그 제품의 방향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공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1차 스케치를 통해 제품의 지향점이나 목표를 보다 명확히합니다. 스케치는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죠. 자, 이제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돼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처음 계획을 끝까지 유지하는 거예요. 제작 중간에 이런저런 아이디어나 요소를 중구난방으로 더하면 결과적으로 영혼도 근간도 없는 제품이 되고 말거든요. 테마를 잃는 거죠. 지금까지 최종 단계에 이르렀을 때 초반에 채택된 아이디어에서 멀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최종 제품을 1차 스케치와 비교했을 때도 흡사한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이렇게 탄생한 제품은 완벽해요. 프레데릭 말의 구성원들은 모두 계획을 유지하는 데 아주 능하죠. 이들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제 일이고요.

    편집장이니까요. 사견이지만 예술에 조예가 깊어 보여요. 미술사를 전공한 배경 외에도 2017년 오픈한 LA 부티크 매장 디자인은 콘스탄틴 카카니아스가 맡았고, 당신의 인스타그램 피드엔 정기적으로 #ArtEdition 게시물이 올라오죠.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란 어떤 건가요?
    아름다움은 어디나 존재해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바닥, 박물관 등 곳곳에서 찾을 수 있어요. 몬드리안 작품에 있는가 하면 렘브란트 안에도 있죠. 누군가에겐 고대 그리스의 무언가, 다른이에겐 아시아의 것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저는 세상에 한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게 아름다움이란 일종의 균형이에요. 아티스트가 찾아낸 균형 속에서 아름다움이 탄생하죠. 아름다움을 위한 전제 조건 두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방금 말씀드린 균형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에너지예요. 피카소나 마티스의 작품을 보면 굉장히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하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나오죠. 엄청난 훈련, 습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고요. 거장의 붓질 뒤에는 그 아티스트에 의해 응축된 에너지가 숨어 있어요. 서예 작품의 한 획 한 획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비슷해요. 향수도 마찬가지예요.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느껴지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혼신을 다하죠. 이렇게해야 에너지를 지닌 제품을 만들 수 있어요. 완벽함과 각고의 노력으로부터 탄생한 에너지죠. 저는 이런 에너지가 주는 힘을 믿습니다. 여기에 아티스트의 피땀과 재능이 더해지죠. 재능이란 앞서 말한 균형을 찾는 특출한 능력이에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는 획일적인 레시피나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죠.

    균형과 에너지라 심오한 답변이군요. 요즘 빠져 있는 작품 혹은 작가가 있나요?
    사실 최근 두 점의 작품을 구입했어요. 저는 옛 거장의 작품을 구매하곤 하는데, 최근 구매한 건 17세기 프랑스 화가 클로드 비뇽 그림이에요. 물론 현대적인 예술가들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죠. 최근 구입한 작품은 장 뤽 물렌이라는 프랑스 작가 작품이에요. 예술계에서는 상당히 주목받는 현대미술가 중 한 명이죠.

    작품은 집에 보관하고 있나요?
    네, 사실 저도 평생에 걸쳐 현대미술 작품을 구입해왔지만 제 가치보다 값이 비싸게 매겨지거나 허세만 가득하고 형편없는 경우도 많아요. 진정으로 훌륭한 현대미술가는 그리 많지 않죠. 반면 옛 거장의 작품은 굉장히 흥미로워요. 제가 예술사를 전공했다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제가 옛 작품으로 회귀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군요.

    불과 몇 년 사이 모든 브랜드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홍보와 마케팅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프레데릭 말 역시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죠.
    맞아요, 이제 시작이죠.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이에요.

    디지털 홍보나 마케팅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요?
    브랜드를 막 시작할 무렵 저는 그저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어요. 회사를 홍보하기 위해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할 필요가 없었죠. 그럼에도 유명인과 대기업이 향수업계를 점령하던 2000년을 잘 헤쳐나올 수 있었어요. 단 하나의 이미지도 없이 향수 회사를 성공시킨 거예요. 당시 프레데릭 말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매장’이 유일했어요. 보고 계신 책 곳곳에 등장하는 아주 심플한 디자인 하나가 우리가 가진 전부였지만 언론의 주목과 보도 덕에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죠. 최근 소셜 미디어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죠. 저희 역시도 변화를 꾀해야 했고 위층에서 보신 바와 같이 우리 향수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창조할 필요가 있었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광고하기 위함은 아니에요. 좀더 각 향수의 무드를 잘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것이 이미지 제작의 본 목적이죠. 이를 위해 많은 아티스트와 작업하고요. 오늘날 소셜 미디어는 브랜드와 고객 간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죠. 브랜드로 하여금 스스로 고객과 소통하도록 만들고요. 많은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는 점은 참 좋아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사람들이 프레데릭 말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절, 특히 그 사람들이 전문가일 때 아주 기뻐하던 기억을 갖고 있어요. 전문가를 통한 대화도 아주 즐거운 소통 방법 중 하나거든요. 하지만 우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갈 필요는 분명 있죠. 오늘날 언론 매체는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어요. 동시에 매체에서 스스로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훌륭한 잡지를 위한 자리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거든요. 이를테면 제가 사업을 시작하던 2000년 당시 사람들은 향수, 특히 럭셔리 향수의 시대는 끝났다고 믿었어요. 향수는 공항 면세점 한쪽의 셀프서비스 가판대 등으로 밀려남과 동시에 그저 유명인의 이름을 따거나 이벤트로 내놓는 제품으로 전락했어요. 그런 시대 분위기에도 통념에 반하는 선택을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어요. 오늘날 매체도 이런 성취를 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길 바라고요. 정리하자면 소셜 미디어의 부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정치부터 뷰티에 이르기까지 삶의 곳곳에 소셜 미디어가 개입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죠. 우리는 이제 소셜 미디어와 공생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우선 고객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야겠죠. 우리에게도 새로운 순간이고,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예요.

    브랜드를 알릴 때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제가 감추고 싶은 부분이요?

    약점이라든가 숨기고 싶은 빈틈이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못했어요. 늘 들통났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여전히 거짓말은 잘 못해요. 우리 삶 곳곳에는 정치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거짓말이 난무하지만 거짓말은 위험해요. 그래서 진실만 말하려고 애쓰죠. 브랜드에 관해서라면 더 숨길 것이 없어요. 최고의 조향사들과 함께하는 최고의 향수 브랜드인걸요. 지금껏 이렇게 많은 최정예 조향사들을 모아 작업한 회사는 전무했어요. 최상의 원료는 물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제품을 만들어왔죠. 그러니 숨길 것이 뭐가 있겠어요? 제가 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지, 숨기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건 없어요. 어떤 질문에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죠. 프레데릭 말은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게요. 단 하나도. 덧붙이면 많은 향수 회사에서 자사 향수에 대해 말할 때 화려한 이미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느껴요. 하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향수병 속에 있어야죠.

    다른 향수에선 찾아볼 수 없는 프레데릭 말만의 미학이로군요.
    맞아요, 어느 브랜드와 비교해도 이 부문에 우리만큼 많은 예산과 시간을 투자하는 브랜드는 없을거예요. 원료, 아티스트만큼은 상한선을 두지 않거든요. 또 업계에서 향수 전문가인 동시에 경영을 맡은 사람은 제가 유일해요. 30년간 두 가지 역할을 해왔어요. 이런 여러 특성을 바탕으로 타 브랜드보다 좋은 향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브랜드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유형의 향수 회사는 세르주 루텐과 프레데릭 말뿐이었죠. 물론 이후로는 많은 이들이 이런 움직임에 합류했습니다만, 여전히 프레데릭 말 향수는 단연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고 있어요.

    심플하고 모던한 보틀 디자인은 프레데릭 말의 또 다른 인기 비결입니다.
    아주 심플하죠. 이는 패키지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외관은 흠잡을 데 없지만 실용적이고 균형감과 절제미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 중요한 건 내용물, 바로 향수니까요.

    고무로 만든 러버 인센스와 총을 겨누듯 분사하는 스프레이 타입의 퍼퓸 건은 참신한 발상으로 뷰티 월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이런 끝내주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비롯됐나요?
    과거 저는 ‘공간에 향기를 채우기 위해 꼭 캔들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당시 플라스틱에 향수를 입혀 ‘퍼퓸 카드’를 제조하는 이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 기술을 활용해 뭔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기에 더 많은 양의 향수를 더해 작은 공간을 위한 방향제를 만들어보자, 이런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것이 러버 인센스예요.

    멋진 발상이군요.
    덧붙여 퍼퓸 건은 특별한 탄생 비화가 있어요. 뉴욕의 더 마크 호텔 소유주인 친구로부터 호텔용 방향제를 제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아무 방향제나 골라 에어컨에 넣기 싫다더군요. 그래서 그의 호텔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것이 퍼퓸 건이었어요. 시간이 흘러 어느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그의 호텔 앞을 지나치는데 굉장히 좋은 향기가 나더라고요. ‘음, 좋은데’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 향을 제가 만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죠. 이날을 계기로 퍼퓸 건을 대중용으로 제작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처음에는 제가 사용하기 위해 제작했고 이후에 판매용으로 제작하기 시작했죠.

    향수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뭔가요?
    향수를 제작할 때 초기 아이디어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충실히 계획된 길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고 방향성이 바뀌는 경우는 흔치 않죠.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 제작 당시에도 도미니크와 저는 제라늄 뿌르 무슈의 잔향만 오리엔탈 계열 향으로 바꿀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향의 층위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어요. 작업도 진척 없이 계속 쳇바퀴를 돌았죠. 그러던 중 하루는 도미니크와 점심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장미를 더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그렇게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의 방향이 바뀌었죠. 마침내 장미 향을 더하는 순간 기적을 목도했어요. 둘 다 걸작이 탄생했다는 것을 직감했죠. 정말 기이한 느낌이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군요. 업계에 몸담은 세월만 30년이니 훌륭한 아이디어나 제품을 경험한 것이 처음이 아닌데도, 장미 향으로 완성된 향은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충격에 빠졌어요. 그 당시 파리에 사흘간 머물 계획이었는데 결국 일정을 바꿔 한 달 동안 머물며 하루도 빠짐없이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를 제작하는 데 몰두했어요. 최고의 걸작이 될 것임을 확신 했기에 그럴 수 있었죠. 사랑에 빠질 때와 같이 열정 가득한 순간이었어요. 프레데릭 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어린이를 위한 향수를 목격했어요. 이름이 뭐더라, ‘살 고스(Sale Gosse)’? 말썽꾸러기가 필요했죠. 프랑스어로 ‘살 고스’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말썽꾸러기 꼬마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어떻게 탄생했나요?
    젊은 조향사의 작품을 내놓자는 취지로 시작된 제품이에요. 향수 산업이 정체성을 잃고 대중적 시장이 되면서 우리는 많은 조향사를 잃었죠. 20년간 조향사들은 베스트셀러를 카피하라는 요구에 시달렸거든요. 아티스트가 아닌 모작자가 되어버린 거죠. 하지만 현재 업계에는 살 고스를 탄생시킨 패니 발을 필두로 한 젊은 세대 조향사들이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회사를 시작했을 때 패니는 열 살 정도였을 거예요. 패니처럼 우리가 만든 향수를 접하며 자란 아이들은 세르주 루텐이나 프레데릭 말 같은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를 꿈꾸곤 하죠. 아티스트가 되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거예요. 도미니크 수하에서 공부한 패니를 비롯해 많은 신예 조향사들은 기술적으로도 뛰어나고 포부도 갖고 있어요. 말하자면 향수세계도 변화를 맞고 있는 거죠. 사실 이 젊은 친구들이 향수업계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것처럼 저를 우러러볼 때마다 조금 두렵기도 해요. 저는 제게 향수 산업에 대해 가르쳐준 전임 조향사들의 족적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제 나름대로의 경험을 축적했고 이를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은 열망이 있어요. 이런 이유로 살 고스 작업을 시작했죠. 이후에 패니와 대화를 나누던 중 어린이용 향수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오 드 콜로뉴 제품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마침 도미니크와 막 ‘꼴론 앙델레빌’을 완성할 즈음이었어요. 우리는 이 제품을 조금 더 순수하고 장난기 어린 향수 버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패니가 여러 좋은 아이디어를 낸 덕분에 살 고스를 완성할 수 있었죠. 늘 어린이용 향수에 애정을 갖고 있어요. 엄마들도 가볍게 뿌릴 수 있죠. ‘봉쁘앙’이나 ‘타티네 쇼콜라’처럼 프레데릭 말도 어린이용 향수를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여겼어요. 대신 우리만의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죠. 이렇게 순수한 향수 계열을 다양한 버전의 제품으로 풀어낼 방법은 아주 많으니까요. 여기까지가 살 고스의 탄생 스토리예요. 프레데릭 말은 장난기도 있고 유머 감각을 갖춘 브랜드예요. 자연히 제 향수를 뿌린 아이는 말썽쟁이여야 하기에, ‘말썽꾸러기’란 뜻의 살 고스라는 이름을 붙였죠.

    지금은 유럽에서만 판매한다고 들었어요. 아시아 론칭 계획이 있나요?
    물론이죠.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말씀드리죠.

    기대할게요.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요?
    조향사들과 나누는 대화라고 답하고싶군요. 뮤지션의 즉흥연주를 떠올리시면 될 것 같아요. 우리의 대화도 아주 비슷하거든요. 2주 전 파리에서 도미니크와 저녁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평일인 데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했음에도 새벽 1시 30분까지 대화를 나눴어요. 그리고 이런 대화 속에서 영감이 떠오르곤 하죠. 그날 밤에도 수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지난 금요일 도미니크와 통화했을 때 그는 이미 우리가 나눈 아이디어에 대해 작업을 진행한 상태였어요. 저에게 질문도 던졌죠. 이렇게 의견을 반복적으로 교환하며 작업해나가는 거죠. 물론 아이디어가 우연히 떠오르는 경우도 있어요. 사례를 하나 말씀드릴게요. 아버지는 구강 청결제를 사용하곤 했어요. 아주 오래된 제품이었는데, 나중에 그 제품이 18세기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프랑스 왕실 제약사가 왕을 위해 제조한 제품이더군요. 워낙 오래되어 사실상 사라진 물건이었죠. 그런데 2년 전, 뉴욕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시차 때문에 꽤 고생한 걸로 기억해요. 정신이 혼미했죠.(웃음) 마침 약국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그 구강 청결제 ‘오 드 보토’를 발견했지 뭐예요. 늘 향이 참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바로 구입해서 스쿠터를 타고 연구소에 있는 도미니크에게 달려 갔습니다. “내가 샀다는 제품이 이거야. 이런저런 향이 있고,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 있어. 정말 좋은 아이디어가 될 것 같아”라고 말하기 시작했죠. 원료를 분석해 나열한 거예요. 도미니크는 향을 맡아보더니 첨가할 노트라며 바로 조향 공식을 적어 내려갔어요. 스케치하듯 말이죠. 그렇게 만든 제품의 향이 정말 훌륭했어요. 바로 제라늄 뿌르 무슈의 탄생 스토리죠.

    정말 흥미진진한 뒷얘기군요.
    그간 제라늄 뿌르 무슈를 많이 애용했죠. 제라늄 뿌르 무슈 샤워 젤도 사용해요. 저와 도미니크는 오래 유지되는 따뜻하고 편안한 잔향을 더함으로써 제라늄 뿌르 무슈의 완성도를 높였죠. 그러다 문득, 그 잔향만으로 따뜻한 느낌의 여성 향수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딱 그 잔향만 분리해서 말이죠. 저는 도미니크에게 다시 돌아가서 “도미니크, 제라늄 뿌르 무슈말이야. 이 잔향만 가지고 향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프레시한 톱 노트를 빼보기로 했어요. 도미니크도 제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 했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죠.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장미 향을 첨가했죠. 그렇게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가 탄생했어요. 이처럼 선물처럼 우연히 찾아오는 것들이 있어요. 일상 속의 무언가일 수도 있고, 새로운 소재나 원료일 수도 있죠. 이미 존재하는 공식을 우연히 재조율할 때도 있고요.

    약간 비틀어 변화를 주는… 맞아요.
    비틀고, 변화를 주고, 잘라내죠. 조향을 콜라주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자르고 또 붙이고.

    예술이니까요.
    그렇죠, 그게 우리 일이에요.

    이쯤에서 프레데릭 말의 ‘넥스트 스텝’이 궁금해집니다.
    넥스트 스텝이라면, 이미 새 향수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젊은 조향사들과 작업도 꾸준히 해나갈 겁니다. 제 미션 중 하나거든요.

    뉴 페이스를 찾는 걸 의미하나요?
    그렇죠, 뉴 페이스를 등장시키려고 노력 중이에요. 아주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단답형 질문입니다.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본 책 혹은 영화가 있다면?
    프랑스 책을 한 권 읽고 있는데 썩 흥미롭지 않을 것 같군요. 즐겨 보는 것이라면 TV 시리즈도 즐겨 보는데요, 마지막으로 본 작품은 HBO 방영작 <석세션>이었어요. 루퍼트 머독에 관한 이야기인데 정말 훌륭한 작품이에요. 사운드트랙도 좋고요. 아, 또 최근 보기 시작한 프로그램이 있어요. 넷플릭스의 <보디가드>라는 시리즈예요.

    꼭 찾아봐야겠군요.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이탈리아를 사랑해요. 로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죠. 참, LA도 빼놓을 수 없죠.

    다음 주에 저도 LA에 갈 예정이에요.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도시예요. 특히 조명이 켜진 밤이 아름답죠. 아들이 살고 있기도 하고요. 정말 멋지죠.

    잊지 못할 미술관은?
    한 곳만 고르기는 어려운데요.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은 파리에 소재한 ‘이봉 랑베르’라는 아트 갤러리입니다. 제가 일을 시작할 무렵 이곳에서 작품을 사곤 했어요. 그 당시엔 가진 돈이 없어 몇 달에 걸쳐 대금을 지불하곤 했죠. 이 갤러리와 관련된 것들에 애착이 깊어요. 요즘 들어 특히 관심이 가는 갤러리를 꼽자면 뉴욕에 ‘미구엘 아브레우’라는 곳이 있어요. 제가 뉴욕에서 찾은 갤러리 중 단연 최고라고 생각해요. 규모가 큰 유명 갤러리가 아니라 신생 갤러리인데도 프로그램이 아주 훌륭해요. 한 곳 더 소개할게요. 제가 세계 최고의 앤티크 숍으로 꼽는 ‘갤러리 쿠겔’입니다. 파리 최고의 박물관 중 하나일 거예요.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샤토 라피트.

    인생 최고의 음식은?
    최고의 음식이라, 최고급 프랑스 요리가 나왔다면 그 어떤 음식도 비교 불가죠. 하지만 프랑스 요리의 한계는 최상의 품질인 경우에만 맛있다는 거예요. 제가 사는 미국의 프랑스 요리만 해도 썩 만족스럽지 않아요. 좀더 쉬운 선택지는 이탤리언이죠. 비교적 요리하기도 쉽고, 뉴욕에서 좋은 프랑스 레스토랑보다야 좋은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찾는 것이 훨씬 쉽거든요. 하지만 현지에서 먹는 훌륭한 프랑스 요리라면? 이를 능가할 음식은 없어요.

    가장 매력적인 향은?
    향수 말고 향 말인가요?

    무엇이든지요.
    글쎄요. 음, 매일 밤 아내가 뿌린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 향을 맡으며 잠자리에 드는데, 아주 매력적인 향이라고 느끼곤 해요. 조향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만큼이요.

    향이 없는 삶이란?
    죽음과 같죠. 슬프고요. 시력이나 어떤 감각을 하나 잃는 것 같을 겁니다. 계속 살아갈 순 있겠지만 향기가 있을 때만큼 매력적인 세상은 아니겠죠. 제 생각에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모든 것이 화면을 통해 전달된다는 거예요. 심지어 화장하거나 화장품을 사고팔 때도 제품을 통해 셀피 속의 내가 매력적으로 보이게 될지가 기준이죠. 우리의 삶을 2차원 스크린 속에 가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에 맞서야 해요. 삶은 인류, 즉 사람들의 것이죠. 우리가 만지고, 보고, 냄새를 맡는 사람 말이죠. 진정 중요한 가치인 감각이나 분위기는 화면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어요. 특히 ‘향’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람임을 일깨워주는 요소예요. 그 어느 때보다 향의 중요성이 커졌다고 믿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보그>를 향으로 표현한다면?
    보그를 향으로요?(웃음) 음, 저는 파리 <보그>와 70년대를 함께하며 자랐어요. 제 삶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죠. 요새 많은 사람들이 헬무트 뉴튼이나 기 부르댕, 리처드 아베돈을 카피해요. 이들의 작품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죠. 저도 이들을 보며 자랐어요. 어머니가 동종 업계에서 일했으니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죠. 달리 표현하면 ‘프렌치 보그 차일드’인 셈이죠. 향수 작업을 할 때면 저 역시도 당대 특유의 관능적이고 우아한 느낌을 염두에 두곤 해요. 하지만 여타 많은 브랜드처럼 70년대 할스톤이나 <보그>, 이브 생 로랑 등을 오마주하여 빈티지 제품을 만들지는 않아요. 저는 그 시대를 경험한 세대예요. 그 당시의 경험은 저라는 사람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고 저는 그때 분위기를 재현하려는 노력을 해왔어요. 제가 재현해낸 버전의 제품은 당시 <보그>를 추억하게 해주는 기념품이라는 일면이있죠. 또 다양성을 대변하는 매체이기도 하죠. 이런 측면에서 제가 늘 하는 작업과도 접점이 있어요. 어빙 펜과 헬무트 뉴튼이라는 다른 두 세계가 공존했죠. 초현실주의 작가 기 부르댕 역시 일원이었고요. 제 생각에 <보그>엔 피에르 부르댕이나 모리스 루셀의 제품이 어울릴 것 같군요. 프레데릭 말의 세계 안에 있되 여전히 관능미와 우아함이라는 기본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 동시에 파리의 느낌 또한 담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시겠지만 콘데나스트가 <보그>를 파리에 들여옴으로써 프렌치 <보그>가 시작되었죠. 저는 이러한 여정에 함께하고 있고요. <보그>만의 스타일을 단 한 가지 향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웃음)

    지나치게 멋진 답변이군요. 거의 1시간이 지났어요.
    괜찮아요. 아주 즐거웠는걸요. 참, 뉴욕에 오면 꼭 연락 줘요.

    에디터
    이주현
    포토그래퍼
    김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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