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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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

2018-12-13T12:12:12+00:00 2018.12.13|

‘퀸’만큼 보편적 메시지가 지닌 설득력을 가슴 뜨겁게 전달한 뮤지션이 있었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은 퀸 음악이 문화와 세대를 초월함을 증명한다.

17세의 아이콘 “프레디 머큐리 호모래!” 같은 반 친구가 말했다. 다른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인마. 프레디 머큐리가 왜 호모고!” 친구들의 표정은 충격과 분노로 가득했다. 모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거기서 나는 한마디라도 해야만 했고, 결국 말하고 말았다. “저놈 또 구라 친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프레디 머큐리가 게이라고? 대중음악 역사상 위대한 록 그룹 중 하나인 퀸의 리드 싱어가 동성애자라고? 두근두근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밤새 워크맨으로 퀸 노래를 들었다. ‘Don’t Stop Me Now’를 들을 땐 리비도가 터질 것만 같았다. “I am a sex machine, ready to reload(나는 섹스 기계야, 언제든 다시 쏠 준비가 되어 있지)”라는 가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가사가 “프레디 머큐리 호모래!”라는 친구의 말과 교향곡처럼 오버랩됐다. 91년이었다. PC 통신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프레디 머큐리에 대해 그 이상의 정보를 도무지 얻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의 한마디로 퀸은 메탈리카를 제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록 그룹이 됐다.

단순히 리드 싱어가 게이라는 이유 때문에 해당 그룹을 좋아하는 게 말이 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도리밖에 없다. 나는 게이이자 하드록, 헤비메탈 팬이었다. 마돈나만큼 건즈 앤 로지즈가 좋았고, 카일리 미노그만큼 메탈리카가 좋았다. 아바만큼 레드 제플린이 좋았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건 있었다. 90년대 한국 고등학교란 커밍아웃 하기에 가장 나쁜 장소로 기네스북에 올라야 마땅하다.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 당신의 청춘은 지옥으로 끌어내려졌을 것이다. 지금은 나아졌다고 굳게 믿고 싶지만 여전히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것에 집에 있는 퀸 LP 한 장을 걸겠다.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갖고 성장하던 나에게 게이인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을 듣는다는 건 소극적인, 그러나 드라마틱한 커밍아웃에 가까웠다.

세상의 모든 게이 소년들에게는 각자의 아이콘이 필요하다. 롤모델이 필요하다. 이성애자 아이콘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게이 소년들은 쉬이 길을 잃어버린다. 한번 생각해보시라. 당신은 록과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게이 소년이다. 록과 헤비메탈은 굳건한 이성애자들의 세계다. 술을 먹고 마약을 하고 여성을 낭비하는 것이 명성의 찬란함으로 포장되는 그 세계에서 당신은 대체 누구를 당신의 삶과 겹쳐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프레디 머큐리와 퀸의 음악은 내가 유일하게 정서적으로 온전히 동일시할 수 있는 록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나서 가장 좋아하는 퀸의 노래 ‘Good Old Fashioned Lover Boy’를 들을 생각이다. 후렴구의 가사를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 사랑, 오 사랑꾼. 오늘 밤은 뭐해? 내 알람을 맞추고 내 매력을 켜줘. 왜냐면 나는 착한 구식 사랑꾼이니까.” 이쯤 되면 당신은 91년의 어느날 밤에 이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아이콘을 비로소 새로이 발견한 17세 소년 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도훈(<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과거와의 조우 음악은 가사를 정확히 몰라도, 그래서 따라 부를 수 없어도 마음의 위안이 되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의 스토리를 투영할 수 있는 음악이라면 음악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결국 그런 음악이 위안이 된다. 고등학생 시절 레코드 가게에서는 카세트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해서 팔았다. (80년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작권 개념도 불분명했고 명백한 범법 행위였지만 누군가의 취향으로 엄선된 셀렉션 음반이었다. 퀸 음악을 들은 건 그 카세트테이프를 통해서였다. 프레디 머큐리의 성적 취향은커녕 그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처음 ‘Bohemian Rhapsody’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온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목소리는 다짜고짜 엄마를 찾다가 누굴 죽였다고 고백했다. 서정적으로 시작하던 노래는 갑자기 폭발할 듯 흘렀다. 그 당시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마음을 같이 고백하는 것 같았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정보를 찾기 힘든 시절이었다. 노래에 담긴 실제 스토리는 끝까지 몰랐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찾아올 때면 퀸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앨범 재킷이나 일본 음악 잡지를 통해 가끔씩 접한 프레디 머큐리는 충격적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콧수염을 길렀으며 항상 청바지에 아빠가 입을 법한 순백색 ‘난닝구’ 같은 슬리브리스를 입던 그는 뮤직비디오나 무대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분명 미성년자 관람 금지였을 뮤직비디오 ‘I Want to Break Free’에서 그의 모습은 그 시절 내 기억 속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가슴에 ‘뽕’을 넣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머리는 한껏 세웠지만 콧수염은 그대로였다. 타이트한 타이츠 같은 의상을 걸치고 나와 절도 있게 몸 을 흔들며 노래하는 그들은 마치 전위예술가 같았다. 어떤 무대에선 왕처럼 분장을 하고 나오기도 했다. 보이 조지처럼 예쁜 남자들의 시대였으나 퀸은 달랐다. 그 특이함,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개성에 빠져들었다. 패션 쪽 일을 하게 될 줄 몰랐던 때, 그가 내게 남긴 건 자신의 분야를 표현하는 거침없고 과감한 태도다.

지난 파리 패션 위크 준야 와타나베 쇼에서 오랜만에 과거를 조우했다. 이른 아침이었고 커피만 겨우 두 모금 마신 채 도착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퀸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런웨이에는 영국적 펑키한 느낌을 지닌 데님 컬렉션이 펼쳐졌다. 가장 영국적 의상에 가장 영국적 음악이, 가장 대중적 소재에 가장 대중적 노래가 더해졌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어릴 때 그 느낌이 떠올랐다. 잊힐 수도 지워질 수도 없는, 그냥 묻혀 있던 그 시절이. 퀸은 내 인생에서 드라마 같은 장면이다.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퀸 이후로 또 그런 존재가 있었던가. 없었다. 패션 위크 이후 매일 퀸의 음악을 듣고 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억을 되찾은 기분이다. —한혜연(스타일리스트)

사랑이라는 큰 위로 나의 청소년기, 학교 운동회에선 퀸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에 맞춰 매스게임을 했다. 영어 시간에는 선생님이 영화 <웨인즈 월드>를 보여줬는데, 괴짜 같은 배우들이 나와 열정적으로 ‘Bohemian Rhapsody’를 따라 불렀다. 스포츠 경기를 중계할 때마다 ‘We Are the Champions’가 흘러나왔다. 퀸은 귀 닿는 지척에 있었고, 모르는 밴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기 전까지 나는 퀸을 몰랐다고 해야겠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내가 마주한 퀸은 여러 개의 별이 깊이 연결된 하나의 우주였다. 프레디 머큐리를 중심으로 서로가 일생의 사랑이었던 메리, 그의 음악을 존중했고 인간적으로도 포용하던 멤버들, 그의 노래에 진심으로 감동한 스태프들, 교감하던 관중들의 깊이 이어진 유대감이 우주가 되어 스크린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사실 프레디는 자신의 출신을 싫어했다. 인도 출신 이민자 가족이라는 태생적 배경을 부정하고 성까지 개명한 프레디에게 어쩌면 사랑에 대한 갈증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든 밖에서 사랑을 길어와 마음의 우물을 채워야 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과정은 스스로를 고아처럼 느끼게 하고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고독에 찌든 프레디가 우연히 만난 짐 허튼(훗날 프레디 곁을 지킨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장면이, 그래서 더욱 마음 아팠다. ‘제발 저를 데려가줘요’ 하는 길 잃은 강아지의 눈이었다. 짐 허튼은 자리를 뜨며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되면 그때 나를 찾아와요.” 짐은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눈을 보고도 집에 갈 수 있었나 보다. 나는 프레디의 눈에서 나를 발견했다. 그 마음을 아는 나는 그 눈을 두고 가지 못했을 것이다.

프레디는 자신을 부정했지만, 직면하기도 했다. 그토록 벗어나려 한 출신과 속마음을 가사에 드러냄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프레디는 병에 걸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야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족쇄처럼 느끼던 아버지의 가르침에도 감사를 표한다. 가족이 아니며 공허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멤버들을 떠났지만 그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가고, 자신의 성적 성향 때문에 헤어진 메리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것을 받아들이며, 사랑에 대해 새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단 하나의 친밀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우리는 가족이라고 일깨워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디는 ‘Somebody to Love’가 흐르는 가운데 어렵게 주소를 알아낸 짐 허튼의 집을 찾아간다. ‘오 , 신이시여, 제발 누군가 나에게 사랑할 사람을 찾아줄 수 없나?’ 사랑에 대한 갈증이 프레디의 뮤즈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인들에게 충분히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생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건 사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사랑,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퀸의 음악 또한 리스너에 대한 사랑이었다. 나의 이야기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써 내려간 가사, 관객과 소통하며 교감하려 애쓴 공연, 모두가 사랑이었다. 얼굴 좀 더러워지는 게 대수야?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소란을 피워봐(‘We Will Rock You’), 우리 모두가 승리자(‘We Are the Champions’), 한 번 더 우리에게 사랑을 줄 수 없을까? 사랑은 밤의 끝자락에 선 사람들을 돌보는 데 필요하니까, 사랑은 우리 삶을 바꿀 수 있으니까(‘Under Pressure’).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야 알게 된 퀸은 사랑 그 자체구나. 넘어졌던 그들이 직접 서로를 일으키며, 지금 넘어진 이들이 일어날 힘을 준다. 모두 언젠가는 넘어진다. 그러나 결국 여기 살아 있는 모두가 승리자다. 이토록 고단한 시절에 사랑이라는 큰 위로를 체험하게 한 퀸의 음악을 한동안 놓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퀸의 음악을 마주할 때에 나는 이 밴드를, 이 음악을 이제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너스의 담요 연진(뮤지션)

음악의 진실 고백하건대 나는 퀸의 ‘팬’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옹호자’였다. 지금 중년이 된 음악 팬 아재들이라면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헤비메탈이 아니면 감히 끼워주지 않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남학교 ‘음덕’ 무리를. 디오를 신으로 받들고, 스티브 바이와 에디 반 헤일런과 잉베이 맘스틴을 두고 누가 더 낫네 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때. 그 안에 퀸이낄 자리는 없었다. 가끔 퀸이나 프레디 머큐리를 언급하려 할 때마다 돌아오는 흔한 딴지는 이랬다. “프레디 머큐리는 정통 하드록 보컬이 아니다.”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도 메탈이 아니고 테크닉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슴속에 부글부글 끓는 반발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니야, 프레디 머큐리는 최고의 프런트맨이고 브라이언 메이는 메탈 기타리스트와는 다른 풍부한 음악성이 있어!’ 내 외침은 소장한 헤비메탈 음반 개수가 음악 내공과 동일시되던 시절에 별다른 힘이 없었지만 음악 평론가의 길을 걷는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나는 프레디 머큐리처럼 풍성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를 가진 보컬리스트를 또 알지 못하며, 브라이언 메이의 솔로는 딱 필요한 테크닉만으로 음악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수준 높은 것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존 레논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은 사춘기 소년인 내게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새삼 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Somebody to Love’를 조지 마이클 버전으로만 알고 있던 친구들에게 퀸의 음악을 녹음해주기도 하고, 누구도 제대로 그 뜻을 설명해주지 않는 ‘Bohemian Rhapsody’의 초현실적인 가사를 받아 적고 곱씹으며 어린 음악 팬의 팝에 대한 로망은 한층 짙어갔다. 내가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을 보고 절절한 마음에 뚝딱 적어 내려간 공연 감상문은 음악 선생님에게 뽑혀 급우들 앞에서 읽히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처음으로 쓴 음악 평론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며 다른 이들처럼 나 역시 눈물을 흘리고 전율을 느꼈다. 누구는 젊은 시절에 들은 명곡을 통해 추억에 젖을 것이고, 그를 오해해온 사람들은 이제야 비로소 그 오랜 오해를 풀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난 조금 다른 감동을 느꼈다. 퀸의 음악은 프레디 머큐리의 삶이나 밴드의 궤적이 어쨌건, 그 어느 것이 진실이건 그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위대한 것은 그 음악 뒤에 숨은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 때문이니까. 영화 <위플래쉬>를 기억하는가? 앤드류의 ‘카라반’ 연주가 끝난 뒤 플레처의 미소가 말해주는 것은 음악의 궁극적인 희열은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나 세간의 평가나 업적 따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음악적 기술과 영감이 빚어내는 그 단 한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라이브 에이드의 기적 같은 20분 이야말로 재회한 프레디와 퀸이 만들어낸 그 ‘완전성’의 한순간을 증거하는 위대한 한순간이다. 그 뒤로 퀸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그곳에서 공연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던 수많은 이들이 그 후로도 그들의 음악을 좋아했는지 그건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 짧은 순간만으로 음악은 완성되고 퀸과 프레디 머큐리는 신화가 된 것이다.

영화에서 간략하게 그려졌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많은 사랑과 그에 못지않은 과소평가를 공히 얻었고, 타고난 재능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을 살던 인물이었다. 나는 여러모로 그와 마이클 잭슨의 삶을 비교하게 된다. 누구보다 보편적인 메시지와 음악을 통해 국경을 넘고 장르를 넘은 ‘크로스오버’의 길을 보여주었건만 생전에도 비극적 사후에도 늘 부족하고 평가절하되어온 뮤지션들. 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던 이들. 그래서 <보헤미안 랩소디>가 지금이라도 그를 정당하게 기려주고 이 세대에 그를 다시 알려주어 다행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어느 때보다 그립다. —김영대(음악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