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취향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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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취향 시점

2018-12-23T16:01:21+00:00 2018.12.24|

보그 편집장 신광호

<보그> 에디터들의 취향을 자랑스레 내보인 적 있습니다. 그들과 가족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채집하며, 어찌하면 이토록 근사한 걸 다 알고 있을까 하는 존경스러운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들의 남다른 안목과 취향은 ‘보그 에디터’라는 필터로 걸러져 기사와 사진과 영상이 됩니다. 저는 기쁘게도 최전방 제1 독자가 되어 에디팅 및 큐레이팅의 즐거움을 듬뿍 누리며 이윽고 최종 오케이, 출고 사인을 음각합니다. 그것이 매일의 <보그>이자 매월의 <보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취향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은 매우 유기적 인과라고 생각하며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뒤꽁무니 빼고 숨었습니다. <보그 코리아> 라벨을 단 완성품이 곧 ‘보편의 취향’이니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했죠.

2019년부터는 달라질까 합니다. 장막 뒤에 숨기 좋아하는 저는 3년간 ‘보편적 삶’을 주로 유리방 은닉, 편집실 칩거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보그 편집장’답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맞다는 안팎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떨치고 일어났다고나 할까요. 저만의 유일무이 지면에 ‘보편적 취향’을 기꺼이 보여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내 취향,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좀 생각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20년, 10년 전이나 혹은 1년 전이나 어제나, 변치 않고 애호하는 것들이 먼저 무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패션 생태계에서 생존하려면 유행을 보호색 삼아 시시때때로 바뀌고 변하기도 해 취향이라는 분류로 특정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있어’ 보이려고 ‘스치듯 안녕’이나 했던 것들은 극구 검문 수색해 이름을 올리진 않았습니다. 정말로 유전자 중 일부라고 불려도 될 것들만 골라봤습니다. 에디터 시절 기획하던 습성을 발휘해 2019년이니 ‘굳이’ 9개를 꼽아볼게요.

활자를 골라 이어 붙이는 중이니 소설부터 해볼까요?(몇 차례 시를 언급했지만 저는 소설을 더 좋아합니다) 나쓰메 소세키를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조금 더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하루키를 제외하고 다른 일본 작가들의 책은 읽지 않았습니다. 하루키에 대한 배반 같아 지키고 있는 지조였습니다(<빙점>을 쓴 미우라 아야코 이후 하루키뿐). 그러던 중 하루키가 소세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대목에서 소세키를 읽게 되었고, 이윽고 하루키보다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건조한 듯 윤기가 번지고 나른한 듯 긴장이 넘치며 탐미적인 듯 간결한 문장에 무릎이 하나 더 있다면 세 개 다 꿇고 싶을 만큼 압도당했습니다.

영화로 치면 <태양은 가득히>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과 접전 끝에 일생일대 영화, 딱 제 취향이라 하겠습니다. 필립 그린리프라는 부자 친구의 고급스러운 이름을 벽에 비춰 똑같이 사인하는 장면, 니노 로타의 OST, 로마시대 조각상 같은 알랭 들롱의 얼굴, 선명하고도 불안정한 동공, 기어코 신분을 상승시키려고 하는 각고의 노력은 볼 때마다 괴롭고 고독하지만 행복합니다.

그렇다고 알랭 들롱처럼 ‘찐한’ 얼굴을 닮고 싶은 건 아닙니다. 요절한 가수 김성재야말로 닮고 싶은 용모입니다. 서양에서 조니 뎁,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90년대 얼굴이라고 치면, 한국에서 ‘무쌍’ 시대를 개척한 김성재와 이정재가 ‘저의 시대’인 90년대를 정의합니다. 그래서인지 뷰티 디렉터의 ‘무쌍 시대’라는 기사를 어떤 독자보다 흥미진진하게 읽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건너 건너 아는 지인 하나도 쌍꺼풀 제거 수술까지 받았다고 하니, 올해엔 눈썹 문신 대신 무쌍 수술에 도전해볼까 하는 마음도 슬며시 생겨날 정도입니다.

여자는 캐롤린 베셋 케네디. 요지 야마모토 블랙 드레스와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웨딩드레스와 화이트 셔츠, 연회색 캐시미어 스웨터, 게다가 뉴욕 전철에서 포착되던 일상. 캐롤린의 외모와 커리어는 제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보그 우먼’의 지표입니다. 특히 브루스 웨버가 촬영한 <베니티 페어> 표지 모델로서의 그녀는 고래 등만 한 액자를 만들어 유리방에 세워두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야 제가 원하는 ‘보그 우먼’에 대해 수시로 세뇌될 듯하니까요.

시각적인 것만큼 청각에 약한 사람이 또 저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뮤지션은 두말할 것 없이 에이미 와인하우스입니다. 그녀 사후에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본 뒤 더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칠판을 분필로 긁는 소리 못지않은 매서운 음색과 이보다 더 치켜올릴 수 없는 아이라인까지. 특히 영화에서 에이미가 ‘Back to Black’을 녹음하던 장면은 <태양은 가득히>에서 리플리가 한량처럼 휴가를 즐기던 중 살해 사실이 발각돼 끌려가는 대목만큼 짠합니다. 에이미와 박빙의 승부 끝에 2위로 밀린 뮤지션은 아델입니다. 파리 곳곳을 혼자 걸으며 롱 테이크로 촬영한 ‘Someone Like You’ 흑백 뮤직비디오는 에이미의 ‘Back to Black’에 필적합니다.

보이는 것에 관련된 일을 하는지라 영감을 주는 사진가를 비롯한 훌륭한 비주얼 전문가들이 늘 제 곁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한 명을 고르기란 열 손가락에 고르고 골라 낀 반지 중 무엇이 제일 예쁘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만큼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변’의 사진가는 로버트 메이플소프입니다. 인체를 정물처럼 촬영하고 정물에게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그의 흑백사진은 <보그>를 통해 오마주하고 싶은 작업입니다.

정서적인 것에 대한 탐닉만큼 저는 ‘물성’에 집착합니다. 손으로 잡히는 어떠한 것에 욕망이 더 큰 저는 회화보다 조각이 좋습니다. 미대에 다닐 때도 회화과 동기보다 조각하는 친구들이 더 예술적으로 보였습니다. 창세기 이후 헤아릴 수 없는 조각가들이 역사에 이름을 올렸으나, 저는 오직 로댕. 그래서 파리 로댕 미술관에 디올 쇼를 보러 갈 때 진열된 손 조각에 더 마음이 가서 새 옷을 발표하는 갈리아노나 마리아 그라치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로댕 갤러리 못지않게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안도의 세계입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지은 어떤 건물이라도 됩니다(심지어 로댕 작품은 만질 순 없지만, 안도의 건물은 등도 뺨도 댈 수 있습니다!). 제주 본태 박물관부터 밀라노 아르마니 테아트로까지 제가 들렀던 다다오 건물에서 안락을 체험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만족할 줄 아는 법도 건물 내부에서 알게 됐죠. 서래마을의 제 베스트 프렌드가 언젠가 그를 인터뷰하며 찍어온 오사카의 회사이자 작업실은 사진으로만 봐도 안도 다다오 자체였습니다. 극명하게 단순하면서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구조 하며, 직원이 건물을 출입할 때 안도의 책상 앞을 지나가게 만든 재치까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꿈 하나는 지구 위 안도 다다오 건물 순례입니다. 올해, 북해도 물의 교회부터 시작하고 싶은 바람을 가져봅니다.

2019년 끝자리 숫자를 따 9개를 들려고 하니 마지막입니다. 제니 홀저를 언급하지 않고 ‘보편적 취향’을 완성할 순 없죠. 저는 자타 공인 ‘90년대 키즈’입니다. 시대가 주는 혜택 안에서 패션은 물론 문화 예술을 깨우쳤으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90년대에 헬무트 랭, 질 샌더, 캘빈 클라인의 미니멀리즘을 칭송하며 자랐고 랭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를 통해 루이즈 부르주아, 로버트 메이플소프 등을 배웠고, 제니 홀저 역시 랭 협업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아주 오래전, 파리 생토노레 랭 매장을 들어가면 저를 반기던 제니 홀저의 문장, 2011년 국제 갤러리에서 그녀 작품을 감상하던 순간과 지난해 <보그>가 취재했을 때의 감격이란! 제가 레이 가와쿠보와 미우치아 프라다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때만큼의 감동을 준 인물입니다.

C’est tout! 이게 다예요!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말해볼까요. 저를 만들고 그래서 제가 표현하는 구성 요소는 이게 전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보여드리고 나니 여러분께 훨씬 가깝게 다가선 듯한 기분이 듭니다. 기실, 지난해부터 저는 보폭을 넓혀 오디언스들에게 성큼 더 다가가는 데 기운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보그마켓’의 ‘샵마’ 자격으로 여러분과 촬영하고 또 <보그> SNS 기획을 위해 종종 등장하며 워밍업을 마쳤습니다. 올해는 <보그> 유튜브를 통해 저를 드러내고 ‘보편 유리방’도 개방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유명 인사들이 <보그> 막내 에디터 명함을 파 들고 저와 일하는 과정을 홍국화 수석이 재치 있게 제작하는 중입니다(선미, 피오를 비롯한 몇몇 톱스타가 출연을 마쳤습니다). 다음 출현은 게릴라처럼 SNS를 통해 속보로 전해드릴 테니 <보그> 인스타그램을 알람으로 설정해두셔도 좋을 듯합니다.

1월호가 서점에 배포되면, 아차, 그걸 까먹었구나, 이걸 뺐네… 하며 아쉬워할 수 있겠죠. 하지만 90년대부터 지금껏 고이고이 간직했고 어떤 유행의 폭풍에도 견고했던 취향이라 망설임 없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숨김도 남김도 없이 저를 보여드린 것으로,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된 기분을 느낍니다. 물론 제 취향이 남루하거나 문자 그대로 ‘보편적’이라 남들이 잘 모르는 굉장한 게 나오지 않아 실망하셨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제 취향이 <보그> 곳곳에서 에디터들의 취향과 함께 직조되고 있으니 그 융합의 결과는 지금껏 보신 것과 같이 <보그> 자체입니다.

제 감성으로 연마된 취향이라는 프리즘은 에디터들의 강렬한 빛이 투과하며 당신께 오색 빛깔 찬란한 색채로 찾아가도록 굳건히 자리하겠습니다. 2019년, 이천 하고도 열아홉 개나 되는 색으로 발광할까 합니다. 그 빛을 다 읽어내실 눈 밝디밝은 오디언스 여러분,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