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하고 밝은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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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고 밝은 눈으로

2019-01-03T13:54:11+00:00 2019.01.03|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여자 감독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와닿은 이야기를 펼쳐내는 데 주저하지 않은 여자 감독 6인의 영화는 신선하고 다정하게 재미와 위로를 선사한다.

웨스턴풍 피코트 판초는 코치 1941(Coach 1941), 이너로 입은 화이트 원피스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어른들은 모르는 4차원 세계 – 안주영 감독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열네 살 소년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 <보희와 녹양>은 초여름의 햇살처럼 밝고 싱그러운 영화다. 단짝 친구인 보희(안지호)와 녹양(김주아)은 같은 날,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빠를 찾아 가출을 결심하는 보희는 여리고 섬세한 소년이고, 그런 보희의 곁을 지키는 녹양은 이름 그대로,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푸른 잎사귀처럼 당차고 명랑하다.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을 아라비안나이트라고 부르는 두 아이에게 어른들의 삶은 이상한 것투성이다. 각자의 결핍을 서로의 온기로 채우는 아이들은 어른의 눈높이에선 보이지 않는 작고 소중한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방식대로 조금씩 성장해간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 영화로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 KTH상을 수상한 <보희와 녹양>은 안주영 감독이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작품이다. 영화제 등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해오다 뒤늦게 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영화 공부를 시작한 그는 단편 <옆 구르기>(2014)로 미쟝센단편영화제 희극지 왕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보희와 녹양>은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원래는 아들이 아빠를 찾아가는 단편이었어요. 그걸 로드 무비처럼 만들고 싶어서 장편으로 다시 쓰게 됐고요. 드라마나 영화에선 어른들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만 얘기하는데, 감정적으로는 어릴 때 더 힘들었던 것 같거든요. 아이들의 관점에서 아이들의 외로움을 대신 말해주고 싶었어요.”

동화 속 아이들은 항상 뭔가를 찾아 떠난다. 그 대상은 엄마나 아빠 혹은 파랑새 같은 희망이다. 안주영 감독은 이 보편적인 서사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로 승부를 건다. 가족과의 해외여행 경험을 떠드는 또래 친구들 앞에 전날 밤 할머니가 원샷한 술병을 자랑스레 들이미는 녹양은 말괄량이 삐삐처럼 사랑스러운 괴짜고, 여자 같은 이름 때문에 놀림받는 보희는 현실 세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다정다감한 남자 사람이다. 주변 인물들도 재미있다. 보희의 배다른 누나와 동거하는 백수 성욱은 산적 같은 외모지만 새하얀 속살엔 귀여운 해골 문신을 새긴 곰살맞은 총각으로 아이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준다. 영화는 아이들의 소소한 일탈을 관찰하며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오해와 편견에 대해 말한다. “전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안주영 감독은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모든 상황과 캐릭터를 비틀어버린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캐릭터는 더욱 생생해졌다. “보희와 녹양 역을 맡은 두 배우 모두 실제 그 캐릭터에 가까운 친구들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신과 함께-인과 연>에서 주지훈의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한 안지호는 <보희와 녹양>으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을 수상했다.

안주영 감독은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장르물이긴 한데, 아직 구체적인 건 없어요. 원래 호러물도 좋아해서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것도 해보고 싶고요.(웃음) 기본적으로는 성장 영화를 좋아해요. 아이들의 이야기는 제약이 없잖아요. 자유롭게 서사를 확장시킬 수 있죠.” 기존 성 역할에서 벗어난 인물들로 가득한 <보희와 녹양>처럼 그의 상상력은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는다. 여성 감독도 얼마든지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성별에 따른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허락된 제작 환경의 차이일 뿐이다. “저는 그런 경계가 점점 더 무너졌으면 좋겠어요. 뭔가 조금씩 바뀌어가겠죠.” —이미혜(컨트리뷰팅 에디터)

화이트 셔츠는 로우클래식(Low Classic), 검정 가죽 팬츠는 이자벨 마랑, 리본 디테일 슬링백은 모스키노(Moschino).

육체와 정신의 상관관계 – 한가람 감독
여성의 육체만큼 영화에서 활발하게 사용된 재료가 또 있을까. 극적 분위기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인과관계상 필요해서, 그냥 볼거리를 위해서…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이유로 수많은 감독들은 여성의 육체를 전시하고 소비해왔다. 한가람 감독은 장편 데뷔작 <아워 바디>에서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진다. 건강한 몸이 건강한 삶을 지배하는가. 주체적으로 강해진 몸은 삶의 주체성을 부여하는가.

<아워 바디>는 고시 준비생 자영(최희서)이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생기는 변화를 세심하게 따라가는 영화다. 명문대를 나왔지만 행정고시라는 목표를 위해 보낸 시간은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문득 공부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자영 앞에 달리는 현주(안지혜)가 나타나고 건강한 에너지에 매료된 자영은 달리기 시작한다. <아워 바디>는 몸을 소재로 한 작품이 흔히 보여주는 손쉬운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다. 구부정했던 몸에 미세한 근육이 생기고, 수동적인 섹스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섹스를 하고, 흐릿했던 말투에 확신이 생기는 과정이 현실의 속도처럼 아주 천천히 그려진다. 뚱뚱하거나 마른 것보다 방치한 몸이야말로 가장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세심한 설정이 인상적이다.

“경험담에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제 주변에 전혀 운동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운동을 시작해서 몸이 좋아지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했어요.” 한가람 감독에게도 극 중 자영처럼 불안정한 시절이 있었다. 방송국 입사를 꿈꾸며 언론고시를 보고 비정규직으로 5년간 일했지만 결국 신입 사원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많은 운동 중에 달리기였던 건, 백수 시절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고시생이 많았는데 그 친구들이 가장 운동과 동떨어져 사는 것 같았어요. 결정적으로 저희 언니가 원래 체육을 못했는데 운동을 하면서 철인 3종 경기에 나갈 정도가 됐어요. 그러고 나니 언니에게 이제 별것 아닌 것도 잘할 것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한가람 감독 스스로도 달리기를 시작하고 “살면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몸만은 운동한 만큼 변하더라.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 건 신체뿐”이라던 지인의 말을 몸으로 느꼈다. “자영은 ‘이것만 하면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고 하는데 막상 현실의 벽은 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인생이 다 그렇고 그래도 괜찮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엄마가 바라던 대로는 못 살아도 운동으로 예전에는 몰랐던 자기 몸의 가치를 알게 되고 컨트롤하게 된 건 긍정적이니까요.”

<아워 바디>는 여자 감독과 여자 피디, 여자 배우들이 완성했다. 전 스태프의 남녀 비율은 반반이었다. 사실 여자가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을 가꾸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뿐 여자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의도하진 않았다. 주인공이 여자이다 보니 중요한 인물이 엄마였고, 친구 설정도 여자가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배우 최희서가 있었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내면이 강한 배우를 찾던 한가람 감독의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배우다. 시나리오에 깊이 공감한 최희서는 인지도가 높아진 후 좀더 상업적인 작품을 선택할 것이라는 주변의 예상과 달리 <아워 바디>를 두 번째 주연작으로 선택했다. 두 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지내온 시간도, 품고 있는 고민도 비슷했다. 그렇게 여자들이 생각을 나눈 영화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는 때로는 자영의 솜털까지 보이도록 밀착해서 따라가지만 조금도 선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지옥을 홀로 견디는 고시생의 속내, 친구가 친구를 위하는 방식, 엄마와 딸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제목 ‘아워 바디’처럼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최희서에게 올해의 배우상을 안겼다.

“이 영화를 만들고 나니 제 청춘도 끝난 것 같아요. 이렇게 살다가 뭐가 되는 걸까 걱정이 많던 시기였는데 정리가 된 것 같아요.” 한가람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트루먼 쇼>다. 종국에는 자기 삶을 찾아간 결말을 좋아한다. “실패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해요.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끝까지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는 인물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거든요. 요즘에는 사건 위주의 영화가 많다 보니 인물의 세밀한 부분까지 같이 고민하는 영화가 많지 않아요.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던 전작 단편 <장례난민>에도 절망적이지만 살아가게 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아워 바디> 개봉은 미정이다. “요즘은 ‘다음엔 뭘 하지?’ 생각하는 중이에요. 영화가 되는 소재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우연히 찾아오더라고요. 평소에 회사원의 루틴처럼 지내는데 자리에 앉아서 무엇이든 해보려고 합니다.”

푸른색 니트와 이너로 입은 셔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바지는 코스(Cos), 목걸이는 코치 1941(Coach 1941).

지구를 지키는 한국형 SF – 이옥섭 감독
우주선을 타지 않고도 우주에 나가는 법이 궁금하다면 <메기>를 보라. 알 수 없는 우주만큼이나 미스터리한 인간의 속내를 탐험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처럼 환상적인 색채의 <메기>는 병원 방사선실에서 섹스를 하다 찍힌 누군가의 엑스레이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다. 뼛속까지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은 이름 모를 행성에 막 착륙하려는 로켓 같기도 하다. 그게 자신과 애인(구교환)의 모습일 거라 짐작한 윤영(이주영)은 다음 날 사직서를 들고 이경진 부원장(문소리)을 찾는다. 불법 촬영에 대한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인가 싶지만 곧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엑스레이 사건 이후 공교롭게 병원의 전 직원이 결근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며 부원장은 직원들을 의심하고, 연인의 다정했던 관계는 전 여자 친구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여기에 싱크홀과 지역 재개발 문제가 맞물린다. 작은 오해가 의혹의 구멍을 키우고, 굳건한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게 흔들린다.

<4학년 보경이>(2014), <연애다큐>(2015), <걸스온탑>(2017) 등 여러 편의 단편영화로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이옥섭 감독은 독립영화계의 스타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메기>는 CGV아트하우스상, 올해의 배우상(이주영) 등 4관왕에 올랐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덤이라는 기분이에요. 초반에 시나리오를 쓸 때는 자신감이 넘치는데, 편집해서 완성할 즈음이면 소심해지거든요. 다행히 반응이 좋아 기뻐요.” <메기>는 이옥섭 감독이 상업영화를 준비하던 중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인권영화 프로젝트다. 키워드는 ‘청년’이었다. “마침 소설 수업을 듣고 있어서 그때 쓴 걸 영화로 찍게 됐어요.” 이번 영화에서 프로듀서와 공동 시나리오, 주연배우로 참여한 구교환과는 아예 ‘2×9’라는 이름의 제작사를 차렸다. 이옥섭의 2와 구교환의 9다. 두 사람이 그야말로 ‘펜이 나가는 대로’ 써 내려갔다는 영화는 시종 웃음이 터진다. 어디서부터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모를 황당한 상황의 연속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도시 한복판의 땅이 꺼지는 21세기 서울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급기야 영화에선 민물고기 메기가 말도 한다. <메기>의 부제는 ‘The Fish Who Saved the Planet’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사용한 프리 뮤직 밴드 이름이에요. ‘지구를 지키는 물고기’와 메기의 속성이 딱 맞아떨어졌어요. 실제로 메기가 지진을 감지한다고 하거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불안을 말 못하는 메기가 인간보다 먼저 감지해서 반응한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그리고 또 메기가 되게 귀엽잖아요.” 오토바이 가게에서 장어를 키우다 방생해준 지인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이옥섭 감독은 메기의 성별을 여자로 설정했다. 목소리 연기는 전작 <걸스온탑>에서 호흡을 맞춘 천우희가 맡았다. “단편 때부터 한 편 빼고는 다 여자가 주인공이었어요. 아무래도 저한테는 여자 캐릭터가 더 친숙하기도 하고요. 가벼운 책임감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싶어요.” 메기는 윤영의 친구이자 지구의 수호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촬영이 끝난 후 메기의 운명은? “구교환 선배 부모님이 맡아 키우셨는데 눈병이 나 죽었어요. 어머님이 산에 묻어주셨대요. 아프리카가 고향인 관상용 메기였어요.”

이 영화에서 메기만큼이나 인상적인 캐릭터는 문소리가 연기한 식충식물을 키우는 코믹한 부원장이다. “처음부터 문소리 선배를 마음에 품고 시나리오를 썼어요. 덕분에 부원장 캐릭터가 풍부해졌죠.” 파란색 부원장실이나 조정 경기장, 바다처럼 푸른 공사용 천막 천을 두른 재개발 시위 현장 등 색채감이 돋보이는 영화 속 세트는 각 인물의 개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메기>는 이처럼 집요하게 관객의 눈과 귀를 붙든다. 판타지로 가득한 놀이동산 같은 이옥섭 월드는 이제 막 문을 열었다. “처음 영화를 공부할 땐 ‘뱀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뒤흔드는 영화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요. 관객분들이 제 영화를 보는 88분만이라도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그게 되게 어렵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제 영화를 보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미혜(컨트리뷰팅 에디터)

레이스 디테일 리넨 블라우스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어떤 삶의 이야기 – 김보라 감독
1994년은 이상하리만치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다. 커트 코베인이 샷건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쏴 자살한 지 얼마 후, 무슨 연유에선지 김일성이 죽었고, 지존파 사건이 일어났으며, 건국 이래 최고기온이라는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10월 21일,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붕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그해 봄부터 가을까지, 한 소녀의 일상을 아주 느린 걸음으로 뒤쫓는다. 강남의 아파트에 사는 중학생 은희(박지후)는 감독의 어린 시절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 성수대교 사건을 뉴스로 봤어요. 너무 충격적이었죠. 그날에 대해선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 있지만, 주인공 은희가 학교와 가족 내에서 겪는 단절감과 다리가 무너지는 상황이 묘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학교와 학원, 집을 오가는 은희의 하루는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소소한 일탈을 벌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사춘기 오빠의 폭력, 가족의 무관심에 외로워하던 은희는 또래 친구들과 관계에서도 겉도는 느낌을 받는다. 김보라 감독은 방앗간집 딸이라는 이유로 놀림받는 영화 속 은희처럼 대치동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지금은 방앗간을 그만두셨는데 저희 집 떡이 정말 맛있었어요.(웃음) 영화에 나오는 철거촌도 등굣길에 매일 보던 곳이었죠. 지금은 타워팰리스가 들어섰는데, 당시 철거민들이 붉은 글씨로 걸어놓은 현수막을 보면서 뭔가 부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아요.” 대개의 개별적 삶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나 그 이면은 부조리한 일투성이다. 그런 은희를 위로하는 건 운동권 출신의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뿐이다. 영화 내내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귀밑에 혹이 난 은희가 잠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성수대교 사고가 뉴스에 나오지만 가족의 저녁 식탁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카메라는 눈에 보이는 사건 대신 사춘기 소녀의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동과 그 미세한 울림을 천천히 따라간다.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의 몸짓은 꿀을 찾는 벌새의 날갯짓을 닮았다. <벌새>는 김보라 감독이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하던 시절 만든 단편 〈리코더 시험>(2011)을 기반으로 한 장편 데뷔작이다. “전작을 보고 초등학생 은희가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하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그 물음이 좋았어요. 마침 대학원 동기들 중에도 단편을 장편화한 경우가 꽤 있었고요. 데이미언 셔젤 감독도 단편에서 출발해 첫 장편 <라라랜드>를 만들었잖아요.” 한국에 돌아와 지속해오던 강의를 정리한 후 본격적으로 영화를 준비한 건 2014년부터다. 영화진흥위원회, 서울영상위원회의 제작 지원은 물론 미국 IFP 내러티브랩, 선댄스 영화제 후반 작업 지원까지 직접 투자사의 문을 두드리며 펀딩을 받았다. “심사위원분들이 시나리오를 좋아하셨어요. 준비 과정이 길어지며 불안한 마음도 있었는데, 안심이 되었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한 영화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벌새>는 넷팩상과 KNN 관객상을, 최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새로운 선택상, 집행위원회 특별상(배우 김새벽)을 수상했다. 가장 사적인 기억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한 소녀의 내밀한 성장담이 다수 관객의 보편적인 감성과 맞닿은 것이다.

그 후 은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김보라 감독은 그 답을 관객에게 맡기고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여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동안 상업영화에서 단선적인 캐릭터로만 다뤄온 농염하고 관능적인 30~40대 여성이 아니라 제가 경험하고 고민해온 것들을 다른 목소리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벌새>에서 은희는 “자신의 만화를 보고 사람들이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은희처럼 만화가가 꿈이었던 김보라 감독의 초등학교 일기장에 적혀 있던 글귀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부산에서 상영이 끝난 후, 가장 벅차고 기뻤던 게 관객들의 반응이었어요. 너무 큰 위로가 됐어요. 사실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는 아팠거든요. 사연이 많은 작품이에요. 많은 분들이 제 영화를 보고 교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미혜(컨트리뷰팅 에디터)

소매와 허리를 가죽으로 장식한 코트는 모스키노(Moschino).

이해와 위로로 당도한 성장 – 차성덕 감독
영화 <영주>는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던 차성덕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씨앗이 되어 피어난 영화다. 삶의 궤도가 변한 일이 영화로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감정의 담금질이 있었을지 감히 가늠해보기조차 조심스럽다. “대학교 1학년 때 실습 작품으로 실제로 부모님의 가해자를 찾아가는 페이크 다큐를 찍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완성할 용기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죠. 이후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쓰는데 계속 그 지점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더라고요.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문턱이구나 싶었고 본격적으로 2015년 늦여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지만 절대 자기 고백적으로 흐르지 않고 보편성을 갖기를 원했어요. 성장이란 애도가 수반되는 일임을 깨닫고 나서 저 자신을 취재했고, 살면서 뜻하지 않은 비극을 겪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고로 부모를 잃은 10대 가장 영주가 가해자를 찾아가는 성장 영화 <영주>는 마치 1인칭 화자 소설책처럼 읽힌다. 영주는 말이 많지 않은 아이지만 그 심정이, 그 상태가 닿을 듯 만져진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피할 수 없는 설정 때문에 어떤 복수나 대결 같은 극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영화는 감정을 누르고 또 절제한다. 하지만 영화의 무수한 말줄임표가 관객과 영주를 이어준다. “주목하고 싶었던 건 영주의 살의가 아니라 그 이후의 일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진실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극화하고 싶은 욕심을 스스로 절제했던 것 같아요. 해피 엔딩이나 새드 엔딩으로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차성덕 감독이 유일하게 한 장치는 공간을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영주를 둘러싼 공간음을 시끄럽게 하는 일이었다. 환경이 얼마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세상이 영주를 편치 않게 하는지 관객들이 무의식중에 젖어들게 하기 위함이었다. 빛나는 구슬이라는 영주의 이름처럼 이야기는 계속해서 굴러간다. 영주와 향숙(김호정)이 마음을 나누지만 모성애 때문이라기보다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교감에 가깝다. 영화는 마냥 절망적이지도 마냥 희망적이지도 않다. 가슴 아프지만 저릿하게 따뜻하다.

영주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김향기의 연기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엔딩 찍었을 때가 기억이 나요. 영주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찍을 때 컷을 해야 한다는 걸 까먹었어요. 실제 영주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계속 보고 싶었거든요. 향기는 실컷 울더니 휙 일어나서 가더라고요. 그 순간 이 장면이 왠지 영화 엔딩이 돼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고 원래 콘티에 없었던 영주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즉흥적으로 찍었어요. 그때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을 찍었구나 하는 순간이 왔어요. 향기가 거의 소실점이 됐을 때 막 뛰어가서 ‘20년 동안 품고 있던 나를 떠나보낸 내 뒷모습을 본 것 같아, 향기야’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고는 쭉 걸어가더라고요. 그때를 잊지 못해요.” <영주>는 개봉 2주 만에 관객 2만 명을 넘었다.

인생에서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지만 어떤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이 제 인생에 없었으면 영화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 감독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면 마음을 어루만져준 영화가 있었어요.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까마귀 기르기>는 조용하고 느리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감독과 전 나이도, 국적도 다른데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을까요. 영화로 위로를 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영화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됐어요. 그리고 과거보다 지금 제가 조금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타인의 슬픔에 공명할 수 있게 됐고요. 살면서 생기는 비극이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이 말하는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영주처럼 차성덕 감독은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느낀다. 여자 감독은 주류가 아니다. 여성들은 사회에서 대명사가 된 적이 없지만 그렇기에 조망할 수 있는 게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씻을 수 없는 구멍이 있거든요. 유리 천장이 존재하지만 더 건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기회도 되지 않을까요. 여자 감독이 아닌 감독이라고 불러달라고 하기보다 ‘여자 감독’이라고 질릴 때까지 더 많이 호명돼도 좋지 않을까요.” 차성덕 감독의 신조는 ‘Keep Going’이다. “학교에 분명 여자 동기와 선배 언니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다 어딘가로 사라졌어요. 그게 되게 싫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계속하겠다고 저 자신과 약속했어요.” 순간의 선택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자 애를 쓰고, 힘들 때든 좋을 때든 일희일비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차성덕 감독이 만드는 영화는 전보다 단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 영화일 것이다. 그 한 걸음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계속될 수 있다.

복슬복슬한 시어링 레더 코트,
프린트 치마와 가죽 부츠는 코치
1941(Coach 1941).

고백의 멜로 판타지 – 정가영 감독
정가영 감독의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남자에게 들이대는 여자가 나온다. 솔직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욕망에 충실하다. 무엇보다 스스로 남자에게 잘 ‘먹힌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녀를 상대해야 하는 남자들은 대체로 조신하다. 유혹에 방어적이고 통념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남녀 사이 윤리를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이 삐져나온다. ‘여자는 남자가 고백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같은 연애 공식을 전복시킨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구경할 맛이 난다. ‘여성해방’까진 못 돼도 ‘욕구 표현 해방’까지는 도달하는 그녀의 영화는 세상의 연애담이 그렇듯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지만 통쾌하다. 게다가 여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정가영감독 본인이다. 너무 실감이 나서 실제인지 연기인지 헷갈릴 정돈데 머릿속에 ‘연애’와 ‘영화’와 ‘술’ 생각밖에 없는 ‘사랑 마니아’의 매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잘 쓸 수 있고 쓰게 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 성적으로 그리고 연애적으로 자기 매력을 가감 없이 어필하는 여자 이야기를 쓸 때 가장 재미있고 잘 써지더라고요. 관객들도 재미있게 봐주고 자신감이 쌓이면서 이런 작업을 계속해온 것 같아요.” 단편 <혀의 미래> <처음> <내가 어때섷ㅎㅎ>부터 장편 <비치온더비치> <밤치기>까지 주인공 가영(정가영)은 일관되게 남자를 욕망한다. “저라는 사람이 기준이 된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고백하는 데 희열을 느꼈어요. 당황하는 모습 보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초등학생 때도 학교를 가야 남자가 있으니 학교에 갔죠.(웃음)” 가영의 모습을 보다 보면 여자에게도 욕망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익숙해지는데 영화가 주는 의도치 않은 순작용이다. “비참한 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고백에 실패해서 비참한 나를 목격하게 되더라도 좋아한다는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할 만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정가영 감독의 개인 성향이 작품 세계의 초석이 되었다면, 연애 예능 프로그램은 그 세계를 확장시킨 영감의 원천이다. “<짝>을 엄청 좋아했어요. 한 회당 정말 백번씩은 본 것 같아요. 며칠 전에도 봤는걸요. <마녀사냥>으로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연애를 배웠던 것 같아요.” 정가영 감독은 중학생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막연하게 감독이 되고 싶었고 한예종에 들어갔다. 1년 정도 다니다가 진지한 마음으로 업으로 삼고자 소설도 써보고 음악도 만들어봤지만 어떤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 영화는 달랐다. 재미있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렇게 영화감독이 됐고 학교는 마치지 않았다. “제가 학교가 잘 안 맞나 봐요. 300만원 내고 학교 다니느니 그 돈으로 영화 찍지 싶었어요.(웃음)”

정가영 감독은 거침이 없다. 단편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에서도 능청스럽고 사랑스럽다. 원룸 컴퓨터 앞에 앉아 조인성 섭외에 대해 전화로 수다를 떠는 가영에게 바깥세상의 명예, 돈 같은 기준은 그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는듯 보인다. 시나리오도 술술 쓰는 편이다. <비치온더비치> <밤치기> 모두 각각 2주 만에 완성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쪼는’ 법이 없는 듯 보인다고 하자 정가영 감독은 엄마 성격을 닮은 것 같다고 했다. “엄마가 착한 깡패 같거든요.”

차기작 촬영은 마쳤다. 제목은 <하트>가 될 예정이다. 고민 상담을 하는 내용이다. 이번 작품은 작품 세계에 전환점이 될 듯하다. “그동안 콘티 구상 능력이 아예 뇌에 없었어요. 다른 영화를 봐도 이야기와 인물 사이에 느낌만 보였거든요.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제 영화를 이미지적으로도 재미있어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는 직접 출연하기보다 모니터 앞을 지킬까 해요. 그동안 영상으로 찍힌 저를 보면 신나고 현장에서 행복해서 연기를 했는데 연출적으로 챙기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땍땍거리는 연기야 저와 동일 인물이니까 쉬웠는데 캐릭터가 입체성을 띠기 시작하면서 연기도 어렵더라고요.” 자신의 작품 리뷰나 댓글을 보며 다음 작품의 목표를 세운다. <비치온더비치>가 ‘지루하다’는 댓글을 보고 오직 그 기준으로 <밤치기>를 편집했다. “<밤치기> 리뷰를 보면 ‘재미있고 발칙하고 흥미로웠다 평점 6점’이었어요. 재미있는데 왜 6점인가. 생각해보면 60점짜리 시나리오였던 거예요. 술술 써놓고 수정을 하나도 하지 않았거든요. 이제 8점, 10점 받고 싶어졌어요. 노력해서 더 재미있게 끌어올릴 거예요.”

정가영 감독은 90년생이다. 현장 경험 없이 영화부터 찍고, 우디 앨런, 허진호 감독의 작품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2G 휴대폰을 쓰는 정가영 감독은 ‘밀레니얼 세대’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색깔을 지녔다. “멜로도 스릴러라고 생각해요. 텐션이 빠지면 안 되니까요. <하트> 편집 잘 마무리하고, 상업영화도 열심히 작업해서 재미있는 작품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