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니스

GRAY DILEMMA

2019.03.25

by 우주연

    GRAY DILEMMA

    흰머리는 지혜를 상징하지도 노화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게 돋아날 뿐이다.

    꼼데가르송 2019 S/S 런웨이에 백발의 모델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할머니의 쪽 찐 머리를 연상시키는 백발은 추상적인 레이 가와쿠보의 의상을 더욱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패션계는 일제히 경험 후에야 쌓이는 지혜, 즉 나이에 대한 컬렉션이라 분석했다. 실제로 헤어 스타일리스 트줄리앙디스(Juliend’Ys)는 현명한 여자처럼 보이게 하기위해 긴 흰색 가발을 연출했다고 말했다. 레이 가와쿠보가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본 결과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지혜로운 여자가 흰 머리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을텐데. 내 주변 여자들의 머리 색깔은 검은색에서 갈색까지 촘촘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들 중 4분의1은 한 달에 한 번씩 염색을 한다. 유전으로 10대, 20대, 30대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자들이다. 미용실에서 꼬박 2시간 동안 앉아 있거나, 거울 앞에서 눈을 치켜 뜬 채 치덕치덕 두피에 약을 바르며 셀프 염색을 한다. 물론 2019년 헤어 트렌드 컬러인 리빙 코럴과 무관하다. 이 행위로 원래 가지고 태어난 머리 색깔로 돌아간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귀찮다고, 돈 아깝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투덜거리지만 아직까지 염색을 멈춘 자는 없다. 강경화 장관의 쿨한 백발, 메이머스크의 신비로운 백발, 문숙의 자연스러운 백발 얘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나? 20~40대 여자에게 흰머리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화장품 회사에서 마케터로 일하는 친구는 염색 시기가 늦어져 흰머리가 보이기 시 작할 때부터 동료들로부터 “많이 올라왔네” 같은 안부 인사를 듣는다. 처음 만난 일간지 기자로부터 “무슨 마케터가 염색도 안 해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아 예수개월간방치했을때그녀의상사는“염색좀해”라는말을“점심먹으러가자” 보다 자주 했다. 관자놀이부터 흰머리가 올라오는 프리랜스 에디터 선배는 인터뷰 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관자놀이에 머무는 타인의 시선을 느낀다. 아래위 로 훑어보는 느낌에 마치 알몸으로 외출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기 관리 못하는 게으른 사람이 기자라니 놀라는 것 같달까. 나 스스로도 페디큐어가 벗겨 졌는데샌들을신고나온기분이고.”노브라,노메이크업이선택의문제에까지접 근했다면 흰머리는 이보다 좀더 기본적인 몸가짐에 가깝게 여겨진다. 우리 사회에 서잘손질된윤기나는머리는돈,시간,능력이있음을증명한다.들여야하는에 너지가 고달플수록 이를 유지하는 사람은 여유가 있음이 증명되는 아이러니다. 마 케터 친구는 흰머리가 가닥가닥 섞여 있는 워킹맘들을 볼 때마다 ‘당신도 염색할 시간이 없나 봐요’ 속으로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낀다고 울적해했다.

    타인의 시선이 주는 피곤함도 있지만 지난한 흰머리 염색에는 끊임없는 자기 검열도 작용한다. 흰머리는 결코 엘프족이나 천재 과학자처럼 곱게 나지 않는다. 비유 하자면 고양이 털이 잔뜩 붙은 올풀린 블랙 컬러 울스웨터에 가깝다.거울앞에 서 흰머리를 마주하는 심정은 ‘지저분하고 흉하고 그냥 너무너무 보기 싫다’다. 바라는 건 더 아름다워지고자함도 아니고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단정한’ 외모다. 러네이 엥겔른(Renee Engeln)은 저서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 시간과 돈이 부족한데도 우리 문화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미에 가까워지기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면 모두 외모 강박 탓이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단정함’ 역 시 사회가 만들어낸 엄격한 기준이다. 우리는 그 기준에 길들어 있고 저항하기보다 순응하는 편이 에너지 소모가 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만나는 사람마다 30대에 왜 반백인지 설명할 것인가, 염색을 할 것인가).문득 변호사인 남자사람 친구에게 물었다. “로펌에 흰머리 염색하는 변호사들 많아?” “변호사들은 거의 염색을 하지 않아. 나이 들어 보이면 신뢰를 줘서 흰머리를 컨셉으로 삼는 경우가 많지.” “여자 변호사는?”“…”흰 머리가 많은 여자 변호사는 평생 어느 정도의 시간과 돈을 염색에 썼을까. 그동안 남자 변호사들은 일을 하거나 낮잠이라도 한숨 더 자지 않았을까. 남자들이 흰머리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사회가 여자의 노화에 더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레이를 남자의 색깔이라 칭하며 머리를 회색으로 물들인 레이디 가가가 떠올랐다.

    ‘올드 토크(Old Talk)’라는 용어가 있다. 노화에 따른 외모 변화를 걱정하는 대화 를 칭하는 말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18~35세 여성의 50%가 습관적으로 ‘올드 토크’를 하며 나이들어 매력을 잃을 것에 대한 걱정을 한다. 노화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한때 ‘쿨 그래니’가 젊은이들 사이 라이프스타일 키워드로 떠올랐지만 어쩔 수없이 늙었을 때를 가정했을뿐 여전히 우리는 나이듦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흰 머리가 생기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일면 노화의 신호임을 부정할 순 없다.아직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든 실제 나이와 머물고 싶은 나이의 간극을 염색으로메운다고도 할 수있다. 아직한 창일할 나이인데, 내일 소개팅을 앞두고 있는데 흰머리라니. 그 인식의 부조화 사이에 염색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듦은 지혜가 아니라 약자의 동의어다. 나이가 들수록 능력이 떨어지고 쓸모가 없어진다고 여긴다. 마리나 벤저민이 <중년, 잠시 멈춤>에서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1920년대 대량생산이 등장한 이후 젊음은 높은 생산성을, 중년 은 효율성 감소로 인식되며 중년이 부정적인 의미를 담게 됐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급증한염색약 판매량이 증거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이 든 이 시대의 어른을 존경하지만 거기에 젊은 외모까지 겸비한 어른은 찬양하고 칭송한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grombre’라는 계정이 생겼다.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기 로 결심한 여성들의 흰머리 인증샷 계정이다. 팔로워는 9만 명에 이른다. 흰머리를 드러낸 여성의 사진과 사연이 올라온다. 계정 대문에는 “그레이 헤어라는 자연스 러운 현상에 대한 축하”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으레 흰머리는 60대부터 괜찮다는 사회적 인식과 달리 흰머리로 살아가기로 한 여자들의 연령은 다양하다. 개운하게 웃고 있는 여자들의 흰머리는 타고난 머리카락일 뿐 지혜의 상징으로도 노화의 상 징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이토록 흰머리가 나는 여자들이 많은데 그동안 우리 눈 에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 이들도 외모 압박을 염색으로 견뎠기 때문일 것이다.

    인스타그램 @grombre 계정에는 “회색은 자유다” “아름다움이란 여성이 어려보여야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더이상 염색 박스 뒤로 숨지 않겠다” “내가 나로 살자 자신감이 생겼다” 같은 문장이 가득하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염색은 그만둬야지’ 결심하며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면 다시 현실이다. 모델들의 찰랑거리는 생머리는 브라운관을 뚫고 나올 듯하고,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여자들은 모두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다. 여전히 그녀들이 당연해 보이고 흰머리는 지저분해 보인다.

    평생 염색에 300여 시간, 500여 만원 이상 썼을 거라는 칼럼니스트 이숙명은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여자들은 대부분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으로 시대를 돌파해왔다. 개인의 성공이 사회 전체의 변화로 이어진 경우가 별로 없었다. 탈코르셋을 지지하지만 개인의 손실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했으면 좋겠다. 자기 소신으로 모든 편견을 돌파할 정신력이 없다면 사회인은 취업 면접때 염색은 하고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칼럼을 당신 다운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칼럼니스트 이숙명은 흰머리가70%이상이 될 때까지는 염색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가, 이까짓 머리카락 잘라버리겠다고 다짐했다가, 못생긴 두상을 불평하며 두상 성형도 있더라는 말로 지난했던 염색사 토로를 마무리했다. 앞서 언급한 지인들은 자기 얼굴에 흰머리가 어울 린다고느끼는날까지 염색을 할 것이라고 했다. 염색을 ‘매너’로 여기게 된 건 사회탓이지 흰 머리를 물려준부모탓도 염색이 피곤하기만한 당신 탓도 아니다. 흰 머리를 내버려둔다고 해서 우아하게 나이 드는 것도 아니고, 염색을 고집한다고 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지키고 싶은 가치를 따라가면 그뿐이다. 나는 사실 흰 머리를 그냥 두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9만명이나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만으로도 기쁘다. 그리고 이제라도 내눈이 회색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흰머리를 그냥 두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새카맣기만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카락 스펙트럼도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흰머리 프리덤’을 갈구한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GettyImage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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