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예술의 역설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

2019.04.26

by VOGUE

    예술의 역설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으로 왜곡된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보고, 느끼고, 의심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인지 부조화의 충격을 극복하고, 기이한 쓸쓸함을 즐기고, 두려움을 제거하다 보면, 어느새 이들이 숨긴 희망의 단서로 무장하게 된다.

    The Influence, Fig. 2’, 2019, Aluminium, lacquer, steel, torso: 34(H)×30(W)×24(D)cm, plinth: 108(H)×38×38cm

    2015년에 열린 플라토 전시 때도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4년여 동안 당신들에게 있었던 가장 큰 변화라면 무엇인가?
    DRAGSET 아무래도 큰 변화는 2017년 이스탄불 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하며 1년여를 큐레이션에 투자한 게 아닐까 싶다. 56명에 이르는 작가들의 예술 관행에 집중했다는 건 실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엘름그린은 유럽과 아시아를, 나는 남미와 남아프리카, 중동을 다녔다. 당시 터키는 어려운 상황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부조리한 현실과 맞닥 뜨리면서 그들의 대변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 고향인 스칸디나비아나 베를린의 평화를 당연시하는게 얼마나 철없는 일인지, 그 평화가 얼마나 취약한지도 새삼 되돌아볼 수 있었다.
    ELMGREEN 한국에서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도, 일상적으로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아더에러(Adererror) 같은 소규모 패션 브랜드의 출현과 성장이 매우 반갑다. 아시아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이런 변화를 유심히 보게 된다. 그 사이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에서 미니멀리즘에 대한 그룹전에 ‘Bar’ 작품을, 방콕 비엔날레에 ‘Zero’라는 세로 수영장 형태의 야외 작품을 출품했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나 국가에서의 전시는 우리 작업에 새 맥락을 불어넣고, 익숙한 작품이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는 걸 매번 경험한다.

    그 당시 드라그셋이 40%, 엘름그린이 60%를 맡고 있다 소개한 기억이 난다. 둘 사이의 끈적끈적한 괴물 이야기도 했는데(웃음).
    D 흐음, 40%라고? 49%가 아니고? 내가 자리에 없을 때였나?(웃음)
    E 농담이었다(웃음). 우리가 함께 서로 알고 지낸 지는 25년, 함께 일한 지는 24년 되었다. 거의 공통의 의식을 가질 만한 긴 시간을 통해 자기 자신과 수없이 토론하는 한 명의 예술가로 거듭난 셈이다. 어떤 압박감도 견디면서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을 가치 있게 만드는 관계랄까. 혼자 일하는 대부분의 작가들도 많은 이들과 협업한다.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스튜디오 직원들. 혹은 그들의 배우자를 일종의 협업자로 두지만, 그들은 서포트한 그녀(그)의 존재를 언급하진 않는다. 우리는 우리 협업에 좀더 개방적이지만, 혼자 일하는 많은 예술가들과 많이 다르진 않다.

    ‘The Influence, Fig. 1’, 2019, Aluminium, lacquer, steel, torso: 34(H)×30(W)×24(D)cm, plinth: 108(H)×38×38cm

    개인전 제목 ‘Adaptations’는 특히 오랜 시간 인간이 어떻게 순응하고 진화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인류학적, 예술적 보고서 같은 느낌이다. 개인적인 부제를 달아보자면?
    E ‘육체(신체)를 위한 기념비’. 우린 스크린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육체로써 존재하고, 육체를 써야 한다는 걸 상기시킨다. 현대인들은 노동하지 않기 때문에 육체로 가치를 창출하는 법을 잊었다. 모델이나 광고에서 그렇듯 육체를 미적 대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D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데이팅 앱 등에서 우리의 신체를 활용하는 방식은 실로 충격적이다. 20년 전만 해도 내가 이런 데에, 이런 콘텐츠를 내놓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전의 태도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취하도록 끊임없이 일종의 무대를 마련하는 것 같다.
    E 서울의 어느 성형외과에서 수술로 잘라낸 손님들의 턱뼈를 모아 커다란 원기둥 케이스에 진열해둔 걸 봤다. 물론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곧 철수됐다지만(웃음), 어쨌든 물리적, 신체적 자아란 우리가 가지고 놀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두 명의 퍼포머가 두 점의 토르소 ‘The Influence’(2019) 연작의 위치를 계속 바꾸는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다. 예술품을 만지는 게 일반적인 금기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꽤 획기적인 동시에 위험해 보인다. 전시 주제인 육체가 다른 퍼포먼스에서 다뤄온 육체와 어떻게 만날지도 기대되고.
    D 맞다. 신체를 공간에서 직접 다루는 시도다. 처음 미술계에 입문했을 때, 우리는 전시 공간의 획일화된 전형성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건축은 공간 안에 있는 이들의 행동마저 관습적으로,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른바 중립적이라는 공간이 ‘모두를 위해’ 설계되었다지만 실은 누구를 위한 디자인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거쳐 공간을 물리적 방법으로 실험했다. 첫 퍼포먼스는 ‘12 Hours of White Paint’였는데, 화이트 큐브 공간의 벽에 흰색 페인트를 덧바르는 작업이었다. 이래도 화이트 큐브의 중립성 혹은 완전무결함이 유지될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렇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12시간 동안 페인트칠을 한 후 공간은 완전 엉망이 되었으니까.
    E 이번에는 퍼포머들이 두 개의 조각 작품을 살아 있게 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아무리 꿈처럼, 환상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도 모든 출발점은 우리 몸이다. 최근 현대미술이 더 인기를 얻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서로 물리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고, 이로써 사람들이 자기 신체를 더 명확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현실이 디지털화될수록, 우리는 육체적 존재를 기념하기 위한 예술 공간을 더욱 필요로 한다.

    환경과 관객의 존재를 반영하는 새로운
    개념의 교통 표지판. ‘Adaptation, Fig. 3’, 2019, Stainless steel(feet in PVC), 270×45×40cm 화려한 스팽글 미니 원피스와 검은색 스틸레토 힐은 미우미우(Miu Miu).

    지난해 스튜디오에 갔을 때, 부서진 아스팔트 무더기가 인상적이었다. 이번엔 아스팔트를 활용한 그림 같은 조각을 선보인다. 비치고 번쩍거리는 소재는 너무나 매끈해서 긴장감과 불편함을 조성한다. 이런 소재의 이중성을 어떻게 활용하나?
    E 아스팔트는 공적 공간뿐 아니라 미니멀리즘이라는 미술사에 대한 단서다. 다른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미니멀리즘의 고전적 개념, 제도적인 권력 구조를 어떻게 전복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기하학적 미니멀 회화를 완전히 일상에 근접한 새로운 재료로 만듦으로써 변환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주변의 것을 ‘추상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실제를 만든다. 표면이 매끈하게 처리된 거울 소재의 미니멀한 오브제는 미술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오브제를 실제 거리 표지판으로 만들어버린다면? 그들은 뭐라고 할까?
    D 번쩍이는 소재가 주는 왜곡 효과는 중요하다. 덴마크 헬싱외르(Helsingør)에 ‘Han’이라는 남자 인어 동상을 설치할 때 의식적으로 그 소재를 선택했다. 국가적 상징인 인어 공주의 성별을 바꾸고,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거다. 그의 몸 표면이 거울이 되어 조각을 둘러싼 마을과 근처 유명한 크론보르 성(햄릿의 성)의 이미지를 반사, 왜곡시키길 바랐기 때문이다. 도시에 기념비를 만들 뿐 아니라 이것이 어떤 담론을 생성하는지 보고 싶었다.

    갤러리로 들어온 교통 표지판은 왜 여기에 놓여 있는지를 의심함과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시물에 둘러싸여 있는지, 선택과 결정이 그 프레임 내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E 공공장소를 지배하는 법과 규정이 많아질수록, 제대로 된 결정을 할 수 없게 된다. 일례로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는건 진리다. 하지만 만약 ‘쓰레기 투척 금지’라는 표식이 없으면 버려도 된다는 걸로 해석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도 되는가’ 등에 대한 지시에 매번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표지판의 역할은 주변 환경이나 관객 자신을 아무런 지시 없이 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실제 아스팔트와 도료로 그려낸 그림이자 조각.
    ‘Highway Painting, No. 8’, 2019, Paint on asphalt, aluminium, 205×105×8cm
    뒤트임이 돋보이는 흰색 플리츠 드레스는 발렌티노(Valentino).

    “새로운 것을 다르게 본다”는 건 요즘 현대미술의 가장 강력한 모토다. 작품을 색다른 장소에 배치함으로써 다르게 보는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E 우리는 외부에서 새로운 걸 발명하는 것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친숙한 걸 재발견하게끔 변화시키는 걸 좋아한다. 이들을 ‘다시 보게’ 되는 것도 매우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이다. 예컨대 ‘Prada Marfa’가 쇼핑센터나 아웃렛이 아니라 사막에 있었기 때문에, ‘반 고흐의 귀’가 다름 아니라 록펠러 센터 앞에 있었기에, 문득 대체 이게 무엇인지 눈여겨보게 되었을 거다. 어떻게 생겼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런 재발견의 깨달음이 우리 작업 전반을 관통한다.

    트라팔가 광장에 세운 ‘무력한 구조물(Powerless Structures)’ 연작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목마를 탄 해맑은 어린아이 형상의 동상이었는데, 그 아이는 주변의 기세등등한 넬슨 제독 등 장군들 동상 사이에서 더 많은 걸 시사했다. ‘무력감’을 기본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나?
    D ‘무력감’의 아이디어는 반대 의미인 ‘힘을 주는(Empowering)’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무력한’ 구조물은 희망이라는 요소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의 권력에 대한 철학가 미셸 푸코의 아이디어, 즉 구조물이란 유동적으로 변모하고, 서로 교환할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했다. 우리가 그런 구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한, 그들의 권력은 더 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물리적인 주변의 것들을 일종의 권력을 가진 구조물로 상정하고, 여러 형태로 변주한 문 같은 일상의 물건으로 물리적 구조물을 시험하기도 했다.
    E ‘무력함’의 가장 큰 힘은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없다(웃음). 낮은 목소리로 얘기할 때 가장 설득력 있다는 아름다운 예가 바로 뉴질랜드 총리다. 그녀는 백인 우월주의자 테러리스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심과 연민을 보였다. 그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력했다. 미술계에서도 배워야 할 점이다. 가장 시끄럽거나, 가장 번쩍거리거나,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는 듯한 사람 혹은 작품이 지속적으로 가치를 발현하는 건 흥미로운 게 아니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강력한 힘을 발현하는 법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인간의 진화한 꼬리뼈를 상상해서 만든 모더니즘 조각. ‘Tailbone’, 2019, Aluminium, lacquer, Oriol, mirror-polished stainless steel, steel, 140×96×92cm 이너로 입은 브라, 속바지와 보디수트, 그물망 원피스와 힐은 디올(Dior).

    그래서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다고 보나? 혹은 어떻게 더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D 모든 게 급변했다. 지금은 변기 위에서 은행 업무를 보고, 부엌에서 식사하면서 데이팅 앱을 열어볼 수도 있다. 행동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삶이 훨씬 유연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에만큼은 더 집중해야 한다. 최근 잡지 <월페이퍼>, 덴마크 브랜드 게오르그 옌센과 협업해 추상 조각을 만들었다. 달걀처럼 생긴 오브제를 열면 작은 침대 두 개가 있고, 그 위에 휴대폰 하나씩을 놓을 수 있다. 무언가 새로 만들기보다는 없애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서로에게 집중하기 위해 사랑을 방해하는 주범인 휴대폰을 제거하겠다는 아이디어다. 일종의 의식처럼 이 오브제에 휴대폰을 넣고, 대화하거나, 키스하거나,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웃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뒤샹 전시에서는 비밀리에 진행한 작업 ‘에탕 도네(Etant Dones)’를 다루었다. 그는 작정하고 관객들을 관음증적 구경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관객들을 구경하는 인물‘Observer’를 내세워 정반대 상황을 제시한다.
    E 오브제를 쳐다보는 같은 방식으로 지하철에서 누군가를 본다면, ‘미투’로 신고당할 게 틀림없다.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이를 바라보는 건 매우 두려운 일이 되었다. 대신 사람들은 전시회에 가서 오브제를 마음껏 응시한다. 그래서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누군가를 설정하고싶었다. 만약 길거리에서 고개를 들어 발코니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음… 저 사람은 옷 좀 다르게 입어야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웃음).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거나, 알게 되면 불쾌할 것이다. 발코니를 사적인 공간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은 아니다.

    현대사회에 편입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인 셀카 행위를 상징한다. ‘Multiple Me’, 2019, Corian, MDF, mirrors, 220×85×70cm 이너로 입은 검은색 보디수트는 디올(Dior), 스팽글 디테일이 화려한 재킷은 셀린 바이 에디 슬리먼(Celine by Hedi Slimane), 검은색 샌들은 에르메 (Hermès).

    동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스타 현대미술가들에게 묻고싶다. 예술가에게 ‘대중적이다’라는 평가가 무례하다 생각하나?
    E 만약 당신이 유명해지는 것에 반감이 있다면, 대중이 멍청하다고 생각하거나, 사람들이 당신 작업을 인식하고 좋아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포용력 있는 언어로 작업하면, 관계자나 전문가의 예상보다 더 많은 이들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 나서서 대중이 멍청하다고 믿기에, 미술계에서도 유명하다는 게 비하되는 거 아닐까? 물론 대중 영합주의는 별로다. 하지만 유명하다는 건 좋은 일이어야 한다, 안 그런가?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뜻이고, 어쩌겠나, 나는 관객이 좋은걸(웃음). 종종 미술기관이 예산을 얻기 위해 관람객 머릿수만 세는 행위에 환멸을 느낀다. 작품을 보고 그 경험에서 무언가 얻을 수 있도록 작업하는 우리로서는 절대 대중을 비하하고 싶지 않다.
    D 아티스트의 인기는 배우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배우는 그 자체의 물리적 존재감, 외모나 연기력으로 인기를 얻는다. 작가들이 유명해지면 내 얼굴보다는 작품이 더 알려진다.

    이런 식의 대화는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솔직한 악취미가 현대미술의 역할 중 하나임을 확신하게 만들고, 그래서 매우 즐겁다. 세상을 대하는 당신들의 짓궂은 유머 혹은 태도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나?
    E 우리가 스스로에게서 보고 싶은 것도 있다. 당황스러움을 통해 사물을 다시 봐야 한다는 걸 늘 되새긴다. 그리고 주변 관객의 반응을 살피겠지. 비슷한 반응일 때도, 아닐 때도 있었다.
    D 일종의 생존 전략일 수도 있고. 우리는 짜증 나게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과 매번 마주한다. 동시에 마음에들지 않는 무언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는, 세상은 아직 희망적이다. 잠깐일지라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
    E 작품에 유머가 차지하는 부분은 실상 크지 않다. 오히려 예컨대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의 연극은 정말 재미있지만, 동시에 비극적이고, 불편하고, 진지하다. 가끔은 정말 심각한 문제를 유머로 드러낼 때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의도적으로 파편화한 토르소 작품. ‘The Influence, Fig. 2’, 2019, Aluminium, lacquer, steel, torso: 34(H)×30(W)×24(D)cm, plinth: 108(H)×38×38cm 이너로 입은 브라와 보디수트는 디올(Dior), 브리프는 미우미우(Miu Miu), 벨트형 가죽 스커트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검은색 샌들은 에르메스(Hermès).

    예술 시장뿐 아니라 동시대 작가들의 상황은 과연 좋은쪽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보나?
    E 처음 미술을 시작했을 때, 스칸디나비아는 현대미술에 대한 기반이 전혀없었다. 작가들이 운영하는 공간에서 소박하게 전시를 열곤 했는데, 주중에 관객 몇 명만 보러 와도 성공적이라고 난리였다. 그래서 요즘 젊은 작가들이 미대 졸업과 동시에 느끼는 부담감, 하루빨리 전문성을 갖추고 브랜딩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자유롭게 실험했다. 작가로서의 자질에 대한 어떤 의무감 없이 온전히하고 싶은 걸 하고, 실수를 거듭한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작금의 상황을 건강하게 보진않는다. 물론 미술 시장은 비약적으로 커졌고, 엄청난 곳이 되었다. 좋은 일이다. <보그> 같은 잡지, 방송, 신문에서 예술을 크게 다루는 걸 보면 경이로울 지경이다. 적어도 예술이 인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앓는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서울에서 가상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고 가정해보자. 혹시 설치하고 싶은 장소나 작업이 있나?
    D그 전에, 이미 설치된 공공미술 작품 몇 점을 먼저 없애야 할 것 같다. 너무 많은 데다, 기계로 만든 것 같거나, 단지 상업적인 이유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E 솔직히 몇몇 작품은 이상한 걸 먹고 자라 지나치게 크거나, 부풀어 오른 형태다. 강렬한 인상을 주고자 안달난 것처럼 보인다. 서울의 사회적 맥락, 장소와 소통할 수 있고, 이 조각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끔,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게끔 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지난 가을, 파리 방돔 광장에 불가사리 조각 수백 개를 설치했는데, 거대한 ‘기념비 괴물’보다 훨씬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놀랐다. 애초에 방돔의 화려한 기둥과는 경쟁이 안 되기도 했고. 공공미술 작품이라고 굳이 거대하고, 키치한 장식이 달린 작업을 오피스빌딩 앞에 설치할 필요는 없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인 발코니에 선 카파 추리닝을 입은 관찰자는 관객을 응시한다. ‘The Observer(Kappa)’, 2019, Epoxy, lacquer, aluminium, steel, clothes, 163×144×90cm 흰색 실크 셔츠와 가죽 스커트, V 로고가 돋보이는 벨트는 발렌티노(Valentino).

    마지막 질문이다. 작가로서 판타지가 있다면?
    D 하나의 내러티브를 엮은 조각공원을 만드는 것?
    E 작품을 다양한 맥락에서 마음껏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이러다 버릇이 나빠지는 게 아닐까 스스로 걱정스러울 정도로, 축복받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최선을 다해 놀라움을 안기려 한다. 물론 이는 우리 몫만이 아니다. 주변 환경도 우리를 놀라게 해야 한다. 두 가지 일이 모두 잘 풀리는 상황이 바로 판타지라 할 만큼 감사한 일일 거다. 어쨌든 신중해야 한다. 예전에도 실현하지 못한 프로젝트 중 무엇을 시도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는데, 이후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질문이다(웃음).

      에디터
      조소현(피처 에디터), 김미진(패션 에디터), 이소민(sub)
      포토그래퍼
      김보성
      모델
      김원경
      글쓴이
      윤혜정(국제갤러리 에디토리얼 디렉터)
      헤어
      이에녹
      메이크업
      오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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