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 뜨거운 다이빙

Living

낯 뜨거운 다이빙

2019-05-13T17:24:57+00:00 2019.05.03|

무서워서 바다 수영도 못하던 여자가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했다. 결과는? 뜻밖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내 몸과 친하지 않다. 운동신경이 나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정신이랄까, 영혼이랄까, 의지랄까, 그런 것으로 구성된 비물질적 자아와 물질적 자아인 신체 사이에 2cm쯤 유격이 있는 듯했다. 완전히 분리된 건 아니지만 완벽히 일치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관계. 몸은 내가 원하는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운동을 배울 때면 분명 내 딴엔 선생님과 똑같은 동작을 하는데 번번이 그게 아니란 지적을 받고, 거울 속에선 내 팔다리가 짐작과 다른 위치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어릴 땐 미끄럼틀이 무서워서 어정쩡하게 내려오다가 다리가 부러지거나 바닷가 바위에서 발을 헛디뎌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단거리 달리기를 할 때면 아무리 화창한 날에도 바람이 나를 뒤로 떠미는 느낌이 들었는데, 운동 역학상 그럴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나는 다 커서야 남들은 안 그런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내 몸을 믿지 못하니 몸 쓰는 일, 특히 빠른 반사신경이 필요하거나 크게 다칠 수 있는 일은 두려웠다. 두려우니 잘될 리 없고, 잘되지 않으니 포기했다. 운전, 스키, 바다 수영 같은 것들 말이다. 몸은 나 자신이고, 보호할 대상인 동시에, 나를 해칠 무기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어쩌다 보니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있다. 물론 무섭다. 잘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가 늦어졌다. 덕분에 배운 게 있다. 말하자면 ‘안 되는 걸 굳이 해야 하는 이유’다.

요즘 나는 열대 섬에 산다. 다이빙으로 유명하다. 이웃, 친구들이 모두 다이빙 센터 주인이거나 강사여서 마음만 먹으면 1년 내내 아무 때나 물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 시도조차 안 해보고 ‘나는 다이빙 싫어!’ 하는 게 그들에게 무례 같기도 하고, 공짜니까 경험이라도 해보자 싶어 시작했다. 다른 다이버들이 ‘변태 구루’라고 부르는, 이 섬에서 가장 경험 많은 다이버이자 그동안 배출한 제자가 수천 명은 된다는 친구가 나를 맡았다. 처음엔 단지 경험이니까,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물속에서는 친구가 나를 도시락 통처럼 붙들고 돌아다녔다. 나는 숨만 쉬면 되었다. 다이빙이 끝난 후에는 살아서 지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렇게 몇 번 다이빙을 하고 나자 친구가 나를 들고 다니는 게 번거롭다며 제대로 배우기를 권했다. 나의 레벨은 DSD. ‘디스커버 스쿠버 다이빙’의 약자로, 자격증 없이 체험 삼아 다이빙을 해본다는 뜻이다. 다음 단계는 ‘오픈 워터’다. 일종의 입문 자격증이다. 보통 약간의 이론 수업과 풀 세션 후 3일 정도면 딴다. 여전히 다이빙이 무서웠지만 3일만 용기를 내면 ‘자격증’이라는 걸 가질 수 있다는 말에 혹했다. 그렇게 시작한 코스가 1년이나 걸릴지 몰랐다. 물론 1년 내내 다이빙을 한 건 아니고 정식 손님이 없을 때 한 번씩 한 거라 날짜를 헤아리긴 무리지만 3일보다는 더 걸린 게 확실하다.

남들은 첫날부터 물속에서 잘만 돌아다니던데 나는 열 번 넘게 다이빙을 하고도 늘 무서웠고, 내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내 딴엔 분명 다리를 쭉 펴고 수영을 했는데 “무릎을 덜 구부리면 좋겠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열 번째 시도에서는 장비를 다 착용하고 입수사인을 기다리다가 친구가 “준비됐으면 들어가자, 원, 투, 쓰…” 하는 순간 호흡기와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는 “잠깐만! 나 준비된 거 맞아? 나 준비됐어? 나 괜찮아?” 절박하게 물었다. 난생처음 다이빙을 해보는 옆자리 손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열한 번째 시도에서는 내 의도와 다르게 몸이 둥실둥실 떠올라 혼자 수면 위로 올라가버렸는데, 그건 사실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위에 보트라도 지나가고 있었으면 몸통이 난자당했을 거다. 물론 보트가 없으니 친구가 나를 붙잡으러 오는 대신 그런 표정으로 지켜봤겠지만, 그 소리 없는 외침은 잊을 수가 없다. ‘저 멍청이!’

“오늘이야말로 자격증을 딸 것이다!” 큰소리 치며 감행한 열세 번째 시도에서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친구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보더니 공기통을 체크하라고 했는데, 그제야 확인해보니 공기가 바닥나 있었다. 교재에 따르면 그 경우 내가 할 일은 파트너에게 공기가 바닥났다는 사인을 보내고 파트너의 보조 호흡기를 무는 것이지만 그 순간엔 아무 기억도 안 났다. 나는 멀뚱히 0점을 가리키는 게이지와 친구의 얼굴과 해수면을 번갈아 쳐다보았을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숨을 쉬지 않고 저 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하느라 그랬다. 수면으로 돌아온 나는 친구에게 변명과 비난을 퍼부었다. “내가 직접 게이지를 확인해야 되는지 몰랐지. 나는 숨만 쉬기도 힘든 사람이라고! 그러는 너는 강사가 그거 확인 안 하고 뭐했어? 다른 DSD 고객들한테도 그렇게 해? 나를 죽일 셈이었어?” 친구는 냉담하게 말했다.
“게이지는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 하고, 나는 물론 네 공기가 바닥났다는 걸 알았지만 어쩌나 보려고 내버려둔 거야. 더 놔두면 위험할 것 같아서 확인하라고 한 거고.”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다이버 친구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픈 워터 코스 또 실패.

열네 번째는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귀가 이상하다 싶더니 추락하는 우주선에 탄 것처럼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귀에 물이 들어간 것이다. 그 후 외이도염으로 일주일을 고생했다. 그쯤 되자 나의 오픈 워터 도전기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친구들은 어쩌다 만나면 어김없이 내게 묻는다.
“오픈 워터 땄어?”
나는 자조적으로 대답한다.
“아니, 아직. 나는 세계에서 가장 경험 많은 DSD가 될 거야.”
한동안 서로 가르쳐주겠다고 나서던 친구들도 이제는 놀려댄다.
“그래, 언젠가 네가 위기에 빠진 인스트럭터를 구해내는 거야. 그가 ‘생명의 은인이여, 당신은 누구입니까?’ 물으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거지. ‘저요? 지나가던 DSD인데요.’”

주인공이 우연한 사고로 로맨틱 코미디나 K-드라마 세계관으로 흘러든다는 설정의 영화가 있는데, 이 상황은 마치 내가 의 다이빙 버전 연속극이나 예능 세계관에 떨어졌는데 하필 내 캐릭터가 주인공 다이버들 옆에 얼쩡거리는 코믹 조연이 된 것과 비슷하다. 운전면허증을 딸 때가 떠오른다. 나는 전국 면허 시험장 중 가장 쉽다는 충청도 C시까지 내려가서 도로 주행 시험을 치렀는데, 내가 똑 떨어지자 강사가 진지하게 부탁했다. “어디 가서 우리 학원 다녔다고 얘기하지 마세요.” 그 후로도 세 번 더 떨어진 뒤 면허를 따긴 했는데, 그다음엔 실전 운전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내가 1980년대부터 우리 마을 사람들 전부 운전 가르친 거 알지? 근데 넌 안 되겠다. 아예 감각이 없어. 포기해.” 환갑 지나 면허를 딴 어머니한테도 안 하셨던 말이다. 혹시 내게 다이빙을 가르치는 친구도 나 때문에 명성에 금이 가고, 나를 수치스러워하고, 포기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조금 눈치가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작한 거, 가보자 갈 때까지.’ 그게 오기인지 체념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실수를 많이 저지르고도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전문가들 말마따나 스쿠버다이빙이 의외로 안전한 스포츠인 거 같고, 가끔 물속이 그립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속에서 숨을 쉬는 행위가 점점 편해지는 게 신기해서다.

얼마 전엔 직업 다이버 과정 훈련생의 ‘실수 담당’ 파트너로 수영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내 임무는 훈련생이 내게 다이빙 기초를 가르치는 동안 온갖 실수를 저질러 말이 안 통하는 물속에서 그가 오직 동작으로만 나를 교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실수라면 내 전문 영역이지만 과연 물속에서 의도된 행위를 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다행히 나는 호흡기를 놓쳐 버둥거리거나 마스크를 잘못 써서 물이 고이게 만드는 연기 따위를 자연스럽게 해냈고, 세션이 끝났을 땐 아무도 칭찬하지 않았지만 남몰래 1.8cm 거리로 다가온 나 자신을 끌어안았다. 열다섯 번째와 열여섯 번째 다이빙은 무난했다. 호흡기를 놓치면 어쩌나, 코에 물이 들어가면 어쩌나, 장비가 잘못 세팅되었으면 어쩌나 하는 잡다한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다 내가 대처 가능한 상황이라는 걸 알아서다. 나의 물질적 자아와 비물질적 자아 사이 간격은 1.5cm 정도로 줄었다. 친구는 이제 원하면 자격증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격증이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 운전면허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운전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듯,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서 모르는 숍을 이용하기 전에는 굳이 자격증을 만들지 않을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나는 무섭고 싫다는 이유로 나의 신체에 ‘도전’이란 걸 허용해본 적 없다. 기본적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표어가 ‘하면 된다’고, ‘도전’이란 단어도 낯 뜨거워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운동이라면 올림픽에 나가거나 코치로 먹고사는 게 태생부터 불가능한 몸이므로 기껏해야 취미인데, 취미란 최소의 수고로 최대의 행복을 얻는 만만한 것이거나, 본업에 못 쓰는 재능을 계발해서 혹시 모를 미래를 도모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건강 걱정에 요가를 하고, 이따금 조깅이나 등산을 하고, 리조트에서 놀려고 수영도 잠깐 배웠지만 그 외의 스포츠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니까 나로선 다이빙이 난생처음 가져본 활동적인 취미인 셈이다. 그 활동의 유일한 미덕은 바닷속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는 거였다. ‘물속의 고요함이 좋아서, 현실과 동떨어져서 완전한 고립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내 호흡에만 집중하며 명상할 수 있어서, 성취감을 얻기 위해서’ 등 다이빙에 미친 친구들의 다양한 이유가 내겐 별로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그런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절대 못할 거라 여기고 두려워했던 무언가를 극복하는 순간 튀어 오르는 정서의 불꽃을 목격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도전’이라는 걸 하고 있었던 셈이다. 신대륙을 발견하거나 세계 8대 고산을 정복하거나 역사에 길이 남을 발명을 한 것도 아닌데 이 무슨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단지 자신의 일부와 화해하는 것이 그에 맞먹는 성취일 수 있다. 내 몸은 내가 정복해야 할 에베레스트였고, 남극점이었다. 나는 이제야 내 몸이 편해졌고, 나 자신이 조금은 강해졌다고 느낀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을 간신히 해낼 수 있게 됨으로써.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취미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당신이 절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일, 두려운 일, 자신이 우스꽝스러워 보일까 봐 꺼렸던 일, 당신의 한계를 약간 넘어서는 무언가를 한번 해보는 건 어떠냐고.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하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듯, 자기가 안 하던 짓을 해야 인생이 바뀌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