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후대의 반란

2023.02.26

by VOGUE

    후대의 반란

    순수한 추상화처럼 보이는 토비 지글러 작품은 구글링한 원화 이미지로부터 출발한다. 고전과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토비 지글러의 세계는 고유하고 독창적이다.

    고대 ‘콘스탄티누스 거상(Colossus of Constantine)’의 검지를 든 손을 모티브로 삼은 조각. ‘Flesh in the Age of Reason’, 2017, PETG plastic, aluminium rivets, 223×90×91cm 마블링 패턴의 언밸런스 터틀넥 원피스와 PVC 소재 앵클 부츠는 발맹(Balmain). 토비 지글러가 입은 수트는 포킷(Pokit). 그의 친구 베이오드 오듀월(Bayode Oduwole)이 디자인했다.

    손, 발 등 신체 부위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리서치한 다음 거기서 나온 이미지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사실 만질 수 없고 직접 보지 못하는 세계에 ‘검색’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이다. 그 매개를 손으로 잡음으로써 이미지를 받아볼 수 있고 접할 수 있다는 것에 집중했다. 같은 방식으로 여러 영상도 만들었다. 이미지 검색을 통해서 비슷한 이미지를 찾고자 노력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이미지를 검색할수록 점점 더 상관이 없는 검색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시적인 연관성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러시아 검색엔진을 사용했는데 구글이나 바이두를 쓰기도 한다. 검색엔진마다 각기 다른 결과를 보여줘서 흥미롭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하는지, 아니면 스스로도 어떤 작품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지 궁금하다.
    첫 단계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다. 한 달 정도 소요되는,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미지를 다 분리하는데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엄청 빠르게 진행되지만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신경을 쓰며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2분 만에 전체 이미지를 다 잃을 수도 있다.

    토비 지글러는 알루미늄판 위에 그림을 그린다.
    화물 컨테이너를 보고 중립적인 재료라는 인상을 받았다. 알루미늄은 철과 달리 무겁지 않고 실용적이다. 어느덧 손의 형태, 파일명만 남아 있는 작품. ‘Flesh in the Age of Reason 2’, 2018, Oil on aluminium, 125×132×4cm

    ‘Flesh in the Age of Reason’ 시리즈는 바로크 시대 작품에서 시작했다. 고전 작품에 대한 당신 고유의 감상이 변형에 영향을 끼치나.
    그렇다. 프랑스의 바로크 회화는 CGI 같아 보이기도, 이상한 환상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의 극적인 빛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는 스크린 속 저화질의 회화 이미지를 활용한다. 이미 많은 양의 정보를 잃어버린 상태다. 누락된 이미지 역시 작품의 일부로 활용하려고 한다. 검색 자체는 코드로 된 추상적인 시스템이다. 회화 작품에서도 이런 점을 차용해서 그렸다. 변형 과정에서 추상이 된 셈이다.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이 작품 안에서 공존하는 데 집중한다.

    모티브가 된 원작과 최종적으로 완성된 작품을 나란히 놓고 하는 비교가 의미가 있을까.
    당연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사실 작품을 완성할 때쯤이면 오리지널 이미지는 거의 잊어버리기도 한다. 뭔가 훅 뛰어넘은 느낌이 들곤 한다.

    당신의 어떤 이력이 첨단 디지털 작업을 가능하게 하나.
    나 역시 전혀 익숙하지 않았고 매번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미대를 졸업한 후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 몰랐다. 회화의 역사를 둘러싼 너무 많은 클리셰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했다. 아주 기계적이고 정확하고 도식적인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아주 느슨한 작가였는데, 그걸 부수기 위해서 어떤 구조를 만들어야 했다.

    핫핑크 셔츠와 스커트는 발렌시아가.

    ‘Flesh in the Age of Reason’ 시리즈는 신체로 부터 떠올린 색깔로 채색했나.
    원작에서 차용했다. 포토샵에서 완전히 반대로 변환하면 보색이 나올 것 같지만 여전히 비슷한 색깔이 나온다. 변환한 색깔이 피부 색깔과 비슷하게 느껴졌고 평소 워낙 이런 색을 좋아해서 나도 모르게 사용하게 된다.

    격자 패턴이 반복해서 드러난다.
    행동이 덜 드러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드는 스크린 위 픽셀을 찾아볼 수 있게 해준다.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캘리그래피처럼 보이게 하는 역할도 한다.

    토비 지글러의 작품은 디지털 시대에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묻는 듯하다. (좌)‘Flesh in the Age of Reason 4’, 2018, Oil on aluminium, 106×125×4cm (우)‘Flesh in the Age of Reason 1’, 2018, Oil on aluminium, 100×110×3cm 체인 프린트가 독특한 옐로 벨벳 원피스와 스타킹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없는 클라인의 항아리를 표현한 ‘Self Portrait as a Klein Bottle’은 전통과 현대가 혼재하는 당신의 작업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신체가 떠올라서 흥미를 가졌다. 스며들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내러티브로 가득하다는 점도 내 관심을 끌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집에서도 이 작품을 전시한 적 있는데 생전 그가 사용했던 크고 작은 물건을 보여주기에 흥미로운 배경이었다. 작품을 투명하게 만든 이유는 무겁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너무 많은 것을 내포하기보다 공간을 관통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고 싶었다.

    갤러리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작가에게 한복을 그렸는지 질문했다. 바로크 시대 의상이 형태만 남아 새로운 상상의 여지를 남긴 것. ‘Flesh in the Age of Reason 6’, 2019, Oil on aluminium, 150×100×3cm

    디지털 기술의 발달 자체가 작업에 영감이 되기도 하나.
    똑같은 단어를 검색해도 구글은 날마다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얼마나 의식적이지 않은 결과인지 알 수 있다. 조금만 이미지를 변경해도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다.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영상 작품에서 검색 엔진은 조금 더 똑똑해졌다. 사진, 회화, 색깔까지 잡아내는데 어떨 때는 인간의 뇌 같기도 하다. 자동 태그 기능이 있고 연관 검색어가 뜨는 검색엔진도 나왔다. 어떨 때는 정말 정확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구글 딥 드림’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피자 사진을 입력하고 개를 찾아달라고 명령하면, 피자 사진에서 개 형태를 찾고 결국에는 개 사진이 나오는 식이다. 이는 멈춰 있는 사물에 관한 작업이지만, 인격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회화는 아주 오래된 기술이지만 여전히 활용도가 높다. 만드는 데도, 보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내가 만드는 회화는 어떤 것은 아주 느리고 어떤 것은 아주 빠르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주 빠른 비디오를 선보였다. 페인팅과 전혀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영상 속 음악도 검색엔진을 통해 작업하나.
    두 음악을 동시에 재생해서 에이블튠스(Abletunes)라는 소프트웨어에 돌린다. 흔한 소프트웨어지만 한 가지 요소를 찾아서 재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 소리만, 드럼 소리만 추출해준다. 맥도날드 광고 음악에서 피아노만 연주해주는 식이다. 가끔 가사를 피아노로 표현하려고 해서 복잡하고 이상한 음악이 나올 때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영상 ‘It’ll Soon Be Over’에서는 직접 드럼을 연주했다. 거의 수학적인 수준까지 단순한 음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클라인의 항아리를 모티브로 삼았다. ‘Self Portrait as a Klein Bottle’, 2017, PETG plastic, aluminium rivets, 80×120×55cm 마블링 패턴의 언밸런스 터틀넥 원피스와 PVC 소재 앵클 부츠는 발맹(Balmain).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작가의 작업실과 다른 점에 대해 말해달라. 혹시 엄청나게 커다란 모니터가 있지 않을까(웃음).
    아주 큰 공동묘지 옆에 있다. 무덤은 아주 오래됐고 여전히 사람들이 묻히고 있다. 작업실 창문 옆에서 몇백 명이 검은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를 때도 있다(웃음). 그리고 아주 큰 3D 프린터가 있다. 3m 높이 정도 되는데 타임머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린터를 설치하기 위해서 작업실 지붕에 구멍을 만들어야 했다.

    한번 작업에 들어가면 개인 생활을 모두 쏟아붓는 편인가, 규칙적인 작업 방식을 선호하나.
    매일 작업한다. 주로 밤에 작업했는데 지금은 일찍 시작하는 스케줄을 좋아한다.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혼자 2시간 먼저 시작하면 더 일찍 끝낼 수 있다.

    디지털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활동했다면 어떤 예술가가 되었을까.
    예술가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화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동시에 현대 회화에 관심이 많다. 컴퓨터는 한 가지 도구로서 작용한다. 옛날 것과 새로운 것 모두에 관심이 있다.

    먼 훗날 당신 작품이 재해석되는 걸 상상해본 적 있나.
    역설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작품이 흔적으로 남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러니에 의존하는 작품을 만들지만 아이러니는 수명이 짧고 항상 변화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다룬 작업을 하지만, 미래 사람들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대 사람들도 같은 모순을 느꼈으면 좋겠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 중 누가 더 당신 작품을 흥미로워할까.
    두 세대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다. 디지털은 한 가지 측면일 뿐이다. 내 작품을 보기 위해 뭔가를 특별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식이 필요한 작품이 아니다. 그냥 보고 느꼈으면 좋겠다.

      에디터
      조소현(피처 에디터), 김미진(패션 에디터), 이소민(Sub)
      포토그래퍼
      김보성
      모델
      김원경
      헤어
      이에녹
      메이크업
      오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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