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트 아트를 새로 정의하는 임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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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트 아트를 새로 정의하는 임수와

2019-05-14T20:50:34+00:00 2019.05.17|

‘스트리트 아트’를 새로 정의하는 임수와(Im Suwa). 그녀가 전 세계 패션 위크에서 그린현장을 〈보그〉에 공개한다.

현재 전 세계 <보그> 표지는 ‘지금’을 대표하는 패션 포토그래퍼들이 장식한다. 하지만 90년 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컬러사진이 보편화되기 전, 당대 패션과 뷰티 이슈를 포착한 이미지는 모두 일러스트레이션이었다. 르네 부쉐(René R. Bouché), 르네 부에 윌로메(René Bouët-Willaumez), 칼 에릭슨(Carl Erickson), 르네 그뤼오(René Gruau) 등이 패션 잡지계를 호령하던 아티스트들이다. 몇 번의 붓 터치로 패션계의 중요한 ‘모먼트’를 묘사한 그들의 작품은 100여 년 후인 지금 봐도 여전히 근사하다.

2018년 10월 파리에서 열린 2019 S/S 미우미우 쇼장 풍경.

이후 패션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은 주요 양식이 아닌 부차적 장르로 여겨졌다. 사진은 중요한 미디어로 오래 각광받으며 다양한 장르를 파생했다. 그중 하나가 스트리트 사진이다. 패션 위크가 열리는 4대 도시를 중심으로 패션쇼장 주위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와 ‘리얼웨이’ 패션을 담은 사진은 2000년대 후반부터 인기를 얻었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예술가 반열에 오른 스트리트 패션 사진가도 출현하고 이들을 따라 하는 후배들로 스트리트 패션 사진계가 포화 상태가 될 무렵. 놀랍게도 스트리트 패션을 ‘그리는’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세련된 용모에 사교적 태도를 갖춘 임수와라는 여인이다. 뉴욕 파슨스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마이클 코어스, 타미 힐피거, 질 스튜어트 디자인실을 거치며 디자이너로 일한 그녀는 3년 전만 해도 거리로 나올 생각이 없었다.

디올 꾸뛰르 쇼가 열린 로댕 미술관에서 그린 스케치.

“패션계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어갈 때쯤, 모든 일을 그만두고 친구와 유럽 여행을 떠났어요. 일러스트레이터 일은 학생 때부터 프리랜서로 종종 했죠. 여행에서 재미 삼아 인물을 스케치하다 깨달았어요. 인물이 저에게 영감을 가장 많이 준다는 사실을요.” 뉴욕에서 귀국 후 패션스쿨 사디(SADI)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가르치던 그녀는 어느 순간 작업실에서 정해진 대상을 그리는 게 지루하다고 여겼다. “디자인할 때도 거리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죠. 모든 사람이 호의적이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 패션 위크라면 괜찮겠다 싶었어요.”

지난해 10월 서울 패션 위크 ‘보그마켓’ 풍경.

2017년 2월 처음으로 출격한 뉴욕 패션 위크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들도 그녀의 등장에 꽤 당황했다. “처음에는 그림 도구를 모두 챙겨갔어요. 하지만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는 패션 위크에서는 거추장스럽다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작은 화판에 종이를 끼울 파일, 메이크업 박스를 활용한 미니 팔레트, 작은 물통을 붙여 저만의 키트를 만들었어요. 비가 오면 재료가 물에 쓸려가고 물이 없을 때는 물통에 빗물을 받아 그리는 날의 연속이었답니다.” 짧게는 30초, 길게는 단 1~2분이 한 사람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인물을 세운 채 그리거나 혹은 찰나의 순간을 그립니다. 대상과 저의 교감에서 느껴지는 순간적 특징을 잡아내죠. 피사체가 지나간 후에는 수정할수록 그림이 망가지더라고요.”

2018년 9월 파리
앤 드멀미스터 쇼장 전경.

그녀에게 전환점은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수많은 피사체를 그리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슬슬 알려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두 번째 뉴욕 패션 위크 시즌이었어요. 그 전에는 모델이나 인플루언서, 스타일이 좋고 제 그림에 호의적인 인물 위주로 그렸죠. 그날도 피사체를 찾다 발견한 인물이 뉴욕 버그도프 굿맨의 여성복 디렉터 린다 파고(Linda Fargo)였어요. 이 그림이 계기가 되어 패션계에서 실제로 일하는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죠.” 이 일은 단순히 피사체의 변경이 아닌 재료의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그녀를 따라 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거리에 속속 등장한 시기와도 겹쳤다.

2018년 9월 파리
발렌티노 쇼장 전경.
<보그 코리아> 에디터들의 모습도 보인다.

“저 이후에 거리에 나온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다루기 편한 재료, 크레용이나 연필을 많이 쓰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는 행위가 매우 고전적인 태도라고 생각했기에 정통성 있는 물감으로 접근했죠. 동양화 붓을 사용해 검정 먹물로 그리기도 하며 저만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재료를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울러 특별한 종이를 찾기 시작했다. “패션에 관계된 빈티지 종이를 찾았어요. <베니티 페어>의 1940년대 출판물, 각 도시에서 발간된 패션사 서적 등 패션 이야기를 확실히 담은 과거의 종이에 지금 패션계에서 한창 활동 중인 인물, 즉 ‘컨템퍼러리한 콘텐츠’를 그려 넣고자 한 거죠.” 수지 멘키스, 카린 로이펠트, 해미시 보울스 등 패션 유명 인사들이 차례로 모델이 되었고 클래식한 방식으로 생동감 넘치는 패션 순간을 담아낸 그림을 원하는 이들이 점점 늘었다. 샤넬, 디올, 에르메스 등 유명 하우스 VIP 초청 행사부터 해외에서 열리는 소규모 패션 행사까지 그녀를 원하는 클라이언트는 지금도 늘고 있다.

Andrea Menin@chillaxingROAD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다음 일정을 위해 급히 떠나던 그녀가 아티스트로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했다. “패션 디자이너 중 이브 생 로랑을 가장 좋아해요. 생전에 그가 이야기했던 것 중 하나가 디자인에서 가장 순수한 순간이 스케치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림이기에 표현의 한계는 있겠지만, 스트리트 아트는 제 나름대로 패션을 만드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