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엘파올로 피촐리의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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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엘파올로 피촐리의 판타지

2019-05-14T21:24:58+00:00 2019.05.20|

피엘파올로 피촐리는 세계에서 가장 멋지고 유서 깊은 꾸뛰르 패션 하우스 가운데 한 곳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자신만의 발렌티노 판타지를 구현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작은 이탈리아 해안 마을 네투노에 자리한 집 정원에서 포즈를 취한 피촐리.

피엘파올로 피촐리(Pierpaolo Piccioli)가 서둘러 네투노 기차역의 주차장 두 곳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자신의 메르세데스를 막 주차하는 순간. 우리가 잡아타야 했던 12시 7분 로마행 기차가 소리를 내며 기차역을 떠났다. 피촐리는 매일 악명 높은 로마의 교통 체증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서 통근하고, 밤에는 기사 딸린 자동차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런 방식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자주 저 기차를 놓칠까? “일주일에 세 번 정도요.” 겨울 햇살에 슬픈눈빛을 반짝이며 그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피촐리는 자동차를 후진 기어로 돌리고는 놓친 기차가 두서너 정거장 더 내려가기 전, 그것을 잡아타기 위해 로마의 편평한 들판을 아주 빠른 속도로 신나게 달렸다.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그의 파트너 지안카를로 지아메티가 분에 넘칠 정도로 과하게 받아 누린 명성과 부에 따르는 과시적 요소를 삼가는 것이 피촐리에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능력이 되고 있다. 가라바니와 지아메티가 누리던 프랜시스 베이컨과 데이비드 호크니, 앤디 워홀의 작품, 프랑스에 있는 유명한 대저택, 그슈타트에 있는 샬레, 아피아 가도에 있는 별장, 치장 벽토로 칠한 런던의 타운 하우스, 뉴욕 맨해튼의 별장, 요트 등은 피촐리와 거리가 멀다. 스페인 가십 잡지 <올라> 과월호 속에 유명인과 등장하는 피촐리를 찾아볼 수는 없다.

“발렌티노는 바로 브랜드 그 자체였어요.” 우리가 자리 잡는 동안 피촐리가 말했다. 이 짧은 출근 시간 동안 피촐리는 대개 그의 노트북으로 미뤄둔 옛날 이탈리아 영화를 보곤 한다. “요즘은 모든 게 커뮤니티와 연관이 있어요. 외관이 아니라 가치 공유가 중요해요. 저는 발렌티노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유효한 꾸뛰르 패션 하우스가 되면 좋겠어요. 결코 발렌티노의 라이프스타일을 제 것으로 대체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게 아니라면, 좀더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피촐리는 시종일관 몹시 사적인 사람이다. 그가 나를 그의 내면 세계로 초대했다는 것은 작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나는 이 디자이너가 내심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로마에 거주하지 않고, 로마에서 남쪽으로 1시간 정도 가야 하는 지방의 이 해안 마을에서 거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네투노에서 이곳 해안선의 요란하게 부서지는 파도를 타며 성장기를 보낸 피촐리는 늘 외부인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이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항상 저 울렁이는 바다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했죠.”

비록 그가 패션에 매료되긴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직업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 만난 여자 친구 시모나 카지아도 그곳에서 법을 전공하고 있었다. 이후에 로마의 유럽디자인학교 IED가 당시 막 실험적인 패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어리둥절해하는 부모님의 지원으로 거기서도 공부를 했다. 심지어 그때도 외부인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네투노에서 같이 통근하던 오랜 친구들도 단지 그가 패션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그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들 눈에는 지나치게 ‘게이’스러웠던 거죠. 다른 게이 친구들과도 달랐어요. 제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열정이 대단했고, 어느 정도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우는 거죠. 어릴 때는 그게 별로 좋지 않아요.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게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죠.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는 거죠.”

피촐리는 학교에서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인턴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리고 그는 인턴이지만 월급을 요구해 회사를 놀라게 했다. “제가 열정을 쏟는 일이 실제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제게 중요했어요.” 피촐리가 회상하듯, 그 기회가 ‘기막히게’ 좋았다. “그 브랜드는 당시 규모가 아주 작아서, 제게 파리에 가서 패브릭을 구매하는 일부터 피팅 작업과 광고 캠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그들이 제게 이 일의 큰 그림을 보여준 거죠.”
졸업과 동시에 피촐리는 그의 디자인 스쿨 친구인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와 함께 펜디에 합류했다. 만만찮은 펜디 다섯 자매와 안나 펜디의 딸인 실비아 벤투리니가 프리랜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와 함께 이끌던 그 회사의 분위기는 매우 ‘가족적’이었다고 회상한다. 그와 키우리는 그곳에서 8년간 일하다 발렌티노에 의해 해당 브랜드의 신생 액세서리 라인을 성장시키는 일로 임명되었다. “제가 완전히 어른이 되고 나서 그곳에 가게 되어 기뻤어요. 30세가 될 때까지 저는 패션계가 아주 멋진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발렌티노에서 일하면서, 저는 마침내 패션의 시스템을 이해했죠. 발렌티노는 격식을 중요시했어요. 패션계에서 일하기 위해선 따라야 하는 의례적인 절차가 있는데, 저는 그걸 좋아했죠.”

피촐리와 키우리는 1월에 발렌티노에 합류했고, 거기에서 발렌티노의 다가올 가을 컬렉션 작업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디자이너 발렌티노는 그들에게 봄 컬렉션을 맡겼다. 재료와 생산 시설까지 구하는 데 딱 2개월의 시간이 주어진 그들은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작업할 수 있고 발렌티노에게 최종 결과물만 보여준다는 조건으로 작업에 동의했다. “우리는 그와 어떤 것도 공유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때까지 알아온 편안한 업무 환경에 따라 피촐리는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고 자기 의견을(이따금씩 발렌티노의 작업에 대한 비판까지) 자유롭게 피력하여 패션 하우스의 경건한 팀들을 당황하게 했다. “발렌티노는 자신에 대해 워낙 확고한 인물이기에 우리의 제안이 그의 것보다 좋을 경우, 우리 것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게 바로 제가 진짜 그에게 배운 점이에요. 단순히 경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에 기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법 말이에요.” 결국 발렌티노는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반했고, 그들은 협업하기 시작했다. “저는 그와 함께 일하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그가 옷에 관한 자신의 꿈을 한 줄로 딱 잘라 말하는 걸 듣는 게 정말 좋았어요.”

발렌티노는 2008년에 은퇴했고 알레산드라 파키네티가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그녀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떠나면서 피촐리와 키우리가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임명됐다. 피촐리와 키우리는 그들 식으로 판을 다시 짜면서 발렌티노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상징적 이미지라는 프리즘을 통해 살펴봤다. “변화를 시도하기 전에 패션 코드를 재확립할 목적에서였다”고 피촐리는 말한다. 뭔가 좀 비현실적인 데가 있는 비전에 따라 그들은 섹시한 제트족에게 피촐리가 말하는 이른바 ‘우아함’을 표현했다. 또 고상한 펑크 액세서리로 현대적 에지를 가미한 긴소매 하이넥 스타일의 동화에나 나옴직한 드레스를 대신 입혔다. 이처럼 강력하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는 또한 (그와 그의 아들 피에르토가 아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AS 로마 축구 팀은 말할 것도 없고) ‘이교도부터 파졸리니까지 다층적인 면모’ 때문에 피촐리가 사랑하는 도시 로마 자체의 역사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2016년에 키우리가 그곳을 떠나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면서 피촐리는 단독으로 발렌티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떠맡았다. “좀 달랐어요.” 그가 당시를 회상했다. “저는 처음 한 주가 선명하게 기억나요. 과거 우리 모습의 어느 부분을 좀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파악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피촐리는 자신의 딸이 읽고 있던 니체에게 영감을 받았는데, 그 철학자는 자신의 과거를 알되 그것의 무게에 짓눌리지 말라고 했다. “너 자신을 알라”고 그의 친구이자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이었던 고 프랑카 소짜니가 그에게 명했다. “너는 그저 너 자신으로 있으면 돼!”

피촐리는 자신의 패션쇼장을 나쁜 기억과 켜켜이 쌓여온 역사가 있는 웅장한 ‘호텔 살로몬 드 로스차일드’로 옮겨 친구이자 영화 <세이프 오브 워터>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작곡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에게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다. 그런 뒤 인쇄기로 대체된 채색 원고에서부터(“이제 디지털 인쇄기가 그런 것처럼 당시에 진정한 혁명이었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졌다가 미학적으로 재탄생한 이탈리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엄청난 변화의 순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직관에 따라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맨 처음부터 달랐어요. 두 명일 때는 설명이 필요했으니까 서로 모든 걸 공유해야 했어요. 이제는 그냥 느끼면 돼요.” 비록 그가 앞장서서 자신에게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은 키우리와 함께 해낸 작업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그 컬렉션은 피촐리만의 독특한 비전이 담긴 억제할 수 없는 로맨티시즘과 판타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발렌티노 2019 F/W 컬렉션이 끝나고 모델들이 환호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키우리처럼 피촐리도 그의 가정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로스쿨을 졸업한 후에 아내 카지아는 7년 동안 부동산에서 일했지만, 현재 21세가 된 첫째 딸 베네데타를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가정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이 부부의 아들 피에르토는 이제 19세, 그들의 둘째 딸 스텔라는 12세다.) 피촐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에게 너무 익숙한 장소의 ‘매력’을 제대로 알아보고는 어린 시절 살던 집으로 이끌리듯 되돌아갔다. 이 부부는 네투노의 한가운데 있는 1940년대 현대식 빌라에 정착했다. 구조견인 미란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미란다 프리슬리 캐릭터에서 따왔죠!”)가 즐겁게 뛰노는 소박한 정원에는 가족용 수영장이 있지만, 그것은 가라바니-지아메티 타입의 전리품 같은 시설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최근에 또 다른 부동산 건물을 구입했다. 바로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휴식을 위한 조용한 집이다.

피촐리는 초록색 덧문이 있는 핑크빛 벨 에포크 시대의 대저택을 흠모했고, 그가 소년이었을 때부터 파도에서 뛰놀며 거의 사유지에 가까운 해변을 선망했다. 포장된 그곳 정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저 아래 모래사장에 반쯤 파묻힌 로마식 빌라의 기반이 눈에 띈다. 그 집은 지금 개보수가 한창이라 침실은 아직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래층에서는 등이 반짝거리는 서재에서 작업하고 있다. 벽에는 자녀들이 어릴 때 그린 그림이 피촐리의 작업에 대한 패션 아티스트 리처드 헤인스의 패션 연구 자료와 경쟁하듯 붙어 있다. “이곳은 제가 생각하고, 스케치도 하며 혼자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는 곳이에요. 정말 평화로워요. 그냥 말하자면 별로 중요한 곳도 아니에요.” 영국 패션 어워드에서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수상했지만 전용 위키피디아 페이지조차도 만들지 않은 이 남자에게 완벽한 환경이다.

우리가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기 위해 피촐리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잠시 들렀을 때, 바리스타는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아몬드 쿠키도 같이 주문하라고 계속 강권했다. 한 지역 잡지에서 그 도시의 중세 야외극을 보도하면서 옆에 나란히 피촐리가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한 소식을 1면 톱기사로 실었는데, 그 도시의 많은 사람이 이미 그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저는 영국 패션 어워드가 이곳에서 이렇게나 인기가 있을지 몰랐어요.” 그는 멋쩍어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한다.
“오늘 진행하는 꾸뛰르 피팅이 멋지게 잘되면 좋겠어요.” 우리가 마침내 기차에서 자리를 잡자 피촐리가 말했다. 그는 지난해 9월 이후 컬렉션 작업을 해오고 있다. “간단한 의상이어도 시간이 걸려요. 정말 프로세스가 너무 정신없지만, 그게 몹시 좋아요.” 피촐리는 꾸뛰르를 이 패션 하우스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꾸뛰르를 뭔가 과거에 속한 것으로 보는 개념에서 발렌티노를 멀찍이 떼어놓고 싶어요.” 그는 덧붙이듯 말한다. “정말이지 발렌티노가 현재적인 꾸뛰르 패션 하우스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꾸뛰르와 스트리트 웨어를 믹스하고, 티셔츠와 오페라 코트를 똑같이 취급하는 거죠. 저는 독특함과 화려함 같은 이 패션 하우스의 문화가 모든 제품 한 벌 한 벌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1시간 후,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스페인 광장 초입에 있는 발렌티노의 르네상스풍 회사 본사인 가브리엘리 미냐넬리 팔라초에 갔다. 그곳은 이 팔라초의 꾸뛰르 아틀리에로 북적이고 있었다. 피촐리의 주장을 증명하듯, 그곳에서는 장인 일곱 명이 제각기 전통적인 흰색 실험실 가운을 걸친 채 잔주름 장식이 들어간 1,700m의 굴빛으로 반짝이는 오간자를 손으로 공들여 말아 아주 작은 스티치로 마무리하며 드레스 한 벌을 만들고 있다. 이 작업은 최종적으로 1,000시간이 넘게 걸릴 것이다. 벽에 걸린 스케치에는 70년대와 80년대 발렌티노의 로맨틱한 꽃무늬를 재검토하고 피촐리가 ‘80년대 TV’를 상기시키는 매혹적 컬러를 실험한다는 등의 컬렉션 이야기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피촐리와 키우리는 2016년 봄 기성복 패션쇼에서 콘로 헤어스타일(흔히 흑인들이 하는, 여러 가닥으로 땋은 머리)의 백인 소녀들을 아프리카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에 대거 캐스팅하면서 몰지각한 문화적 전유로 비난받았다. 요즘 피촐리는 주로 유색인종 여성에 기반한 최신 컬렉션을 선보이며 열정적으로 포용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있다. “젊은 흑인 모델들을 무시하지 않는 게 중요한 패션 스테이트먼트”라고 그는 말한다. “자, 그들을 런웨이 중앙에 세웁시다.” 그의 무드 보드는 르네상스의 블랙 마돈나들과 케리 제임스 마셜 회화 작품의 인물들, 그리고 1960년 잡지 <제트>와 <에보니>에 실렸던 유행을 선도하던 여성들의 사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피촐리는 이미 메이크업 전문가 팻 맥그라스와 헤어 디자이너 귀도 팔라우와 더불어 유명인들로 가득한 피촐리의 패션쇼 팀의 일원인 아제딘 알라이아의 유명한 조력자인 스타일리스트 조 맥케나의 도움을 받아 캐스팅 작업에 착수했다.(결국 모델 65명 가운데 48명이 흑인이었고, 눈물을 글썽이던 나오미 캠벨이 피날레 를 자랑스럽게 장식했다.)

피촐리가 한창 피팅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의 딸 베네데타가 합류했다. 그녀는 피촐리의 선례를 따라 로마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점심시간에 짬을 내
잠시 아빠를 보러 왔다. 피촐리는 그의 으리으리한 사무실 옆에 있는 좁은 방에서 매일 점심을 먹는다. “밖에 나가서 먹을 시간이 없어요.” 그의 사무실 한쪽 벽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발렌티노 의상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대결이라도 하듯 이 패션 하우스를 위한 그의 디자인 이미지가 걸려 있다.

각종 컬렉션과 신규 매장 관련 작업 외에도, 피촐리는 일본 작곡가 마쓰무라 테이조의 오페라 <침묵>을 위한 의상 작업을 위해 룩셈부르크로 왕복하고 있으며, 일주일 따로 시간을 내어 스타일을 중시하는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와 공동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또 오뜨 꾸뛰르 고객들과 함께, 그리고 이제 특별한 레드 카펫용 의상을 요구하는 여배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피촐리는 레이디 가가가 가을 시즌 꾸뛰르에서 35번 룩, 즉 은은한 핑크색 깃털로 만든 풍성한 크리놀린을 예약한 일을 회상한다. 실제로는 카이아 커버가 그 의상을 걸치고 ‘살로몬 드 로스차일드’의 응접실을 유유히 돌아다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후 가가가 그 의상을 차려입고 <스타 이즈 본>의 베니스 영화제 시사회에 갔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고 당시 그녀를 에스코트한 피촐리는 말한다.

점심 식사 후 피촐리는 그의 사무실로 옮겨 갔다. 그중 한 곳은 예전에 발렌티노의 휴게실이었다.(가라바니가 좋아하던 꽃무늬 트라비아타 태피스트리가 이제 데이비드 보위와 세르주 갱스부르의 사진으로 교체되었다). 웅장한 옆방은 16세기 교황이 한때 그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역사적인 곳이다. 지아메티는 한동안 이탈리아 제국의 가구와 1930년대 스쿠올라 로마나 미술의 놀라운 작품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모든 사업을 꾸렸다. “위협적이었어요.” 피촐리는 당시를 회상한다. “저는 이곳을 좀더 아늑한 장소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는 앉을 수 있는 쾌적한 미팅 공간을 더했다.

그의 디자인 팀만 해도 70명에 달한다. “저와 동일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원해요. 그들은 패션이라면 사족을 못 써요.” 발렌티노가 남긴 선례를 유념하면서, “사람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려고 노력해요”라고 덧붙여 말한다. 예를 들어 피촐리는 그가 보기에 너무 상업적인 것 같은 로고를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디자인 팀원들은 그 로고를 너무 좋아하길래, 저도 그것을 그들의 시각으로 다시 봤죠.” 그 결과 이제 ‘VLTN’이라는 축약형이 티셔츠부터 인타르시아 밍크 코트에 이르는 모든 옷에 등장한다.

피촐리와 그의 디자인 군단은 다 같이 1년에 두 차례의 여성용 기성복 패션쇼와 두 차례의 프리 컬렉션, 두 차례의 꾸뛰르 컬렉션, 두 차례의 남성복 컬렉션, 두 차례의 남성복 프리 컬렉션, 네 차례의 액세서리 컬렉션을 책임지고 있으며, 다소 저렴한 레드 발렌티노 라인을 위한 추가 작업까지 진행하고 있다. 한때 바이어들에게 조용히 선보이고 언론에는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던 프리 컬렉션 프레젠테이션이 이제 상업적 의미를 현저히 반영하고 있기에 특히 중요해졌다. 그래서 지난해 11월 27일, 피촐리는 도쿄에 있는 한 (미가공) 콘크리트 공장 창고 건물에서 2019 프리폴 패션쇼를 발표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레드, 주름, 보우라는 이 패션 하우스의 유명한 코드를 다루기로 마음먹었고 아티스트 이즈미 미야자키와 언더커버의 디자이너 준 다카하시(피촐리가 그의 2019 가을 기성복 패션쇼에 포함시켰다)와 협업했다. “매 컬렉션마다 새로운 경험의 연속입니다.”

그는 아직도 미국 다음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명품 시장을 자랑하는 이 패션쇼 개최국 일본에 매우 익숙하다. “일본 문화의 우아한 아름다움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25년 전에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피촐리는 말한다. “정말 모던합니다. 향수에 젖지 않고 낭만적인 전통 분위기를 풍기죠. 격식을 차리는 행위가 상징적이면서도 의례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나의 의식 같아요. 일본에서는 스트리트 웨어조차도 좀더 세련되고 교양 있어요.”

무대 뒤에서 피촐리는 눈이 부시도록 멋진 지역 고객들과 함께 세계 전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인조 가발을 쓴 장난기 많은 인플루언서들을 반기며, 이미 2019 가을 남성복 컬렉션과 2019 봄 꾸뛰르 컬렉션에 대해 생각했고, 나는 피촐리가 각각의 컬렉션을 기념하기 위해 모으는 스케치, 영감을 주는 이미지, 좌석 배치도를 넣어둔 앨범 가운데 하나에 포함시킨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이 생각났다. “매일 새로운 태양이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