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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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 모금

2019-05-31T15:11:12+00:00 2019.05.31|

리몬첼로와 로제 와인을 마시는 나의 뜨거운 여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어쩐지 외로울 때도, 할 일이 많아 괜히 답답할 때도, 시시때때로 술을 찾는다. 깃털처럼 마음이 개운하고 가벼울 때는 차가운 소비뇽 블랑 와인을 마시고, 갓 잡은 물고기처럼 마음이 두근두근 펄떡일 때는 알코올 도수 60도가 넘어가는 글렌리벳 나두라 위스키를 마신다. 일상의 모든 상황이 술 마실 완벽한 이유가 되니, 해가 쨍쨍한 여름날이야말로 술 마시기 좋은 때가 아닌가? 온 세상이 필터를 씌운 듯 선명해지는 한여름이 오면 떠오르는 술 두 가지가 있다. 이탈리아의 식후주인 리몬첼로와 남프랑스에서 만든 로제 와인이다.

리몬첼로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방의 특산주다. 뜨는 관광지로 손꼽히던 포시타노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맛보았을 술이다. 손바닥 안으로 쏘옥 들어오는 조그마한 잔에 소주처럼 조금씩 따라 마시는 술로, 꼭 레모나를 소주에 풀어놓은 것 같은 뿌연 노란색을 띠고 있다. 리몬첼로는 포도를 증류한 그라파에 아말피 지역의 최상급 레몬을 더해 만든 술로, 엄청 새콤달콤할 것만 같은 색깔에 비해 의외로 한 방이 있는 술이다. 알코올 도수가 30도 정도라 아무 생각 없이 한 잔을 훌렁 비우면 그 강력함에 놀라고 만다. 어쩌면 색은 예쁜데 맛은 별로라는 관광객의 총평 역시 이 강력한 펀치에 놀라서 나온 것일 확률이 높다.

리몬첼로의 진짜 매력은 배가 든든해지도록 식사를 하고 난 뒤, 빈티지한 작은 글라스에 이 술을 따르고 하염없이 천천히 홀짝일 때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는 식전주와 식후주를 끼니 챙기듯 마시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식후주는 아마로처럼 허브로 만들어 쌉쌀하고 묵직한 맛을 내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식후주인 포트 와인이나 셰리 와인도 더운 여름날엔 왠지 좀 부대낀다. 시트러스 향 그 자체를 품고 있는 리몬첼로야말로 여름을 위해 태어난 식후주다.

우리나라에서 로제 와인이 화제가 되는 날은 딱 정해져 있다. 214일 발렌타인데이와 514일 로즈데이다. 핑크빛이 도는 색상 때문에 로맨틱한 이벤트가 있을 때나 반짝 관심을 가지는 술인데, 이 사실을 로제 와인이 알면 서운해 입을 삐죽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로제 와인은 화이트의 가벼움과 레드의 보디감을 두루 갖춘 와인으로, 주로 뜨거운 태양 아래 낮술로 즐기는 와인으로 더 알려진다. 고급 로제 와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프로방스 방돌 지역이나 니스 생트로페 해변에 가면 체크무늬 천을 깐 야외 테이블에 앉아 모두들 로제 와인을 마시고 있다. 로제 와인을 얼려서 마시는 프로제가 유행했을 정도로 로제 와인은 여름에 특화된 와인이기도 하다. 한낮의 와인을 즐길 줄 아는 어른이라면, 남프랑스의 여유를 꼭꼭 눌러 담은 로제 와인 한 잔으로 여름을 만끽할 줄도 알아야 한다.

몇 년 전 프랑스 파리로 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근처 슈퍼마켓에서 로제 와인 한 병을 사서 들어갔는데, 내 키보다 훨씬 크고 넓은 냉장 칸 몇 개를 지나도록 로제 와인 셀렉션이 끝나지 않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했던 기억이 난다. 작은 테라스가 있는 에어비앤비에서 아침부터 로제 와인을 물처럼 마셨다. 리몬첼로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된 한 잔이 무엇이었는지도 생각이 난다. 수년 전, 이태원에 소르티노스라는 이탤리언 레스토랑이 존재하던 시절, 모두가 디저트로 커피를 즐길 때 나는 리몬첼로를 마셨다. 디테일한 술잘알이 된 것 같은 그 기분도 좋았지만, 짭짤하게 혀에 남은 음식의 여운이 파도에 모래알 휩쓸리듯 싹 사라지는 개운한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술 선택지가 다양해지면 즐거움도 추억도 다양해진다. ‘여름엔 맥주지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악기 하나로만 음악을 연주하는, 총 하나만 차고 전장에 나가는, 한 가지 색 립스틱으로만 한 달을 나는 격이었달까. 음주 경험이 풍성해지고, 집 한구석 술 찬장이 가득 채워질수록 여름날 마시는 술은 훨씬 더 다채로워졌다. 리몬첼로와 로제 와인은 색깔부터 맛까지 여름이 흠뻑 깃든 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