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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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모피

2019-06-13T19:52:17+00:00 2019.06.13|

밍크 원단 조각으로 작업 중인 세계지도.

아주 오래전, 수렵 생활을 하던 인류의 조상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동물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었다. 사냥으로 얻은 동물의 가죽을 햇볕에 잘 말려서 꿰매 입었는데, 이렇게 얻은 모피는 너무 딱딱하고 무거웠다. 점차 나뭇진을 묻히거나 잿물을 바르면 모피가 한결 가볍고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을 터득했고, 모든 패션이 그러했듯 오랜 세월이 흘러 가죽과 모피는 급기야 패셔너블한 아이템으로 발전했다. 결국 귀부인이나 팝 아이콘의 월드 투어 옷으로도 손색없는 이브닝 웨어로까지 도약했음은 물론이다.

최근 몇 년간을 돌아보자. 80~90년대 밍크나 세이블 같은 고상하고 우아한 모피가 각광받던 시대가 지나자 좀더 캐주얼한 태도와 실용성이 요구되었고, 그 결과 베스트, 봄버, 야상 등의 다양한 모피 아이템이 유행했다. 이렇듯 모피의 문턱이 낮아지나 싶더니 우리 여자들은 다시 호사스러운 모피 본연의 멋을 찾기 시작했고, 크고 화려한 소재에 치중했다. 그러는 동안 모피는 계속 변종되어 새로운 하이테크 가공법을 추가하며, 끊임없이 시대 트렌드와 접목되면서 그 어떤 패브릭에도 종속될 수 없는 초현대적 소재로 발전했다. 다양한 패션 실험과 기술 덕분에 모피는 더 멋스럽게 커팅됐고, 신소재가 개발됐으며, 갖가지 패션 소품으로 스타일링의 재미마저 더할 수 있었다. 또 부피와 중량을 줄인 모피는 이제 한겨울뿐 아니라 여름에 입어도 될 만큼 가볍고 화려해졌다.
거듭되는 발전에도 불구하고, 모피 소재에는 여전히 구식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모피 하면 할머니를 일단 떠올린다. 환경운동과 채식주의 등의 윤리 의식 역시 모피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매우 엄격한 규제 속에 모피 사용을 제한하거나 모피를 포기하는 패션 레이블도 점점 늘고 있다.

분명한 건 패션계가 모피에 관심을 가지면서 모피 가공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보다 가볍게 만들기 위해 더 나은 공정을 고안했고, 보다 친환경적으로 제조와 염색 과정을 개선했으며, 입기에 무겁고 어둡던 의상은 상당히 호감이 가도록 탈바꿈했다. 그중 펜디 가문은 ‘더 완고하지 않은 모피 코트’를 발명하기 위해 누구보다 연구에 집중했다. 안에 어떤 옷을 입거나 혹은 안에 옷을 입지 않아도 돋보일 만큼 세련되고 충분히 효과적인 모피 말이다. 그 돌파구는 모피를 그냥 패브릭으로 취급한 데서 비롯됐다. 답답하고 고루한 느낌을 없앤 뒤, 그것을 꼭 갖고 싶은 바이커 재킷처럼 만든 것이다.

펜디의 시그니처 인레이 기법이 돋보이는 테넌바움 밍크코트.

새롭고 수많은 기술을 통해 모피 가공업체는 털을 깎아내는 일에 집중했다. 덕분에 벨벳으로 오해할 만큼 보드랍고 얇은 질감이 완성됐다. 어떨 땐 안감을 제거해 코트 전체를 실크 원피스처럼 가볍게 만들었다. 혹은 의상 한 벌에 양털과 염소털, 토끼털과 약간의 흑담비를 자유자재로 섞었다. 수년 전 펜디 패션쇼의 백스테이지를 방문한 적 있다. 런웨이에 내보내기 직전, 모피를 손보기 위한 모피용 ‘미싱’ 여러 대와 모피 장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새틴 위에 밍크와 여우털을 패치워크해 전기회로처럼 보이는 모피가 시폰과 함께 맞물린 옷이란!

모자이크 타일을 떠올리는 밍크 코트. 섬세한 수작업이 돋보인다. 2019 S/S 펜디 컬렉션.

1965년 펜디 하우스에 합류한 칼 라거펠트는 혁명적 모피 디자인으로 신소재 연구를 이끌었다. 오랫동안 외면받아온 모피에 새로운 태닝 기법과 처리 기술을 더했다. 가죽을 자르고, 섞고, 무늬를 새긴 덕분에 가볍고 부드러우며 편안한 데다 입기 쉬운 모피 옷이 탄생했다. 특히 1966년 칼 라거펠트가 처음 선보인 펜디 F/W 컬렉션은 찬사를 받았다. 1989년에는 뒤집어 입을 수 있는 ‘결가죽’ 기법을 활용했다. 모피와 마감이 뛰어난 가죽을 조합하고 안감을 생략한 것이다. 90년대에는 ‘로엣지’ 재단과 투조 기법, 소재 특수 처리 기술을 개발했고 실크와 모직, 캐시미어를 값비싸거나 ‘저렴한’ 모피와 조합했다. 2000년에는 인레이 기법으로 표현력을 극대화했다. 깎은 모피를 특정한 기하학 형태로 조립해 같이 봉제하는 기술을 말한다. 공정이 매우 복잡하고 정교함을 요구하기에, 한 벌을 만드는 데 무려 80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오방색으로 서울의 랜드마크를 표현한 조대의 페인팅.

이러한 펜디만의 장인 정신을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펜디 크라프(Fendi Craff)’는 2018년 10월 펜디 본사가 있는 로마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에서 시작된 행사다. 펜디 장인 정신을 소개하는 자리로 일본, 중국 베이징에 이어 서울 성수동으로 옮긴 공방에서는 로마 모피 공방 장인의 라이브 쇼와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협업이 진행됐다. 네온 컬러의 밑그림이 그려진 세계지도가 벽에 걸려 있었고, 이탤리언 장인은 형형색색의 밍크를 재단했다. 퍼즐 같은 밑그림을 바탕으로 재단한 기하학적 형태의 자그마한 밍크 조각이 거대한 대륙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그 옆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 조대(Jodae)가 숭례문, N서울타워 등 서울의 상징적 이미지를 추상화했다(캘리그래피를 연상시키는 조대의 작품은 완성 즉시 로마 모피 공방에서 모피 소재로 복각된다). “모피를 자르고, 모으고, 작업할 수 있는 구조와 효과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리고 그 사용엔 한계가 없습니다.” 젊은 모피 장인이 작업에 열중하며 설명했다. “코트, 케이프, 드레스에 곁들이는 조각… 그것을 어떤 식으로 결합하느냐가 중요하죠.”

사실 2004년부터 칼 라거펠트는 깃털처럼 가벼운 모피 코트, 또 오간자에 모피를 삽입해 여름에도 입을 수 있는 드레스를 디자인하지 않았나. (성수동 창고에도 여름 밍크가 진열되어 있었다.) “장인 정신의 중요성, 기교의 핵심 가치, 수공예 기술을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펜디는 젊은 세대를 창작의 세계에 한발 더 다가오게 해 공예 기술의 비전을 보여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