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온 이자벨 마랑

Fashion

서울에 온 이자벨 마랑

2019-07-08T16:49:52+00:00 2019.07.08|

‘정형화된 아름다움’은 디자이너들이 탈피하려는 주제다. 나이, 성별, 몸매를 떠나 자유를 만끽할 옷을 이자벨 마랑은 1994년부터 만들고 있다.

MUSIC FOR YOU 중앙고등학교 음악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자벨 마랑과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 모델들. (왼쪽부터)박지혜가 입은 스웨이드 재킷과 스팽글 치마, 벨트와 가죽 부츠, 박세라가 입은 타이트한 노란색 패턴 원피스, 이자벨 마랑이 입은 가죽 톱과 패턴 치마, 벨트와 싸이하이 가죽 부츠, 윤보미의 페이즐리 패턴 원피스와 벨트, 지현정이 입은 기하학 패턴 퀼팅 재킷과 이너로 입은 분홍색 원피스, 가죽 부츠, 차수민이 입은 아이보리색 셔츠와 회색 울 팬츠, 스터드 벨트와 부티, 김성희가 입은 지브라 패턴 재킷과 가죽 치마, 벨트와 부츠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2019 F/W 컬렉션.

5월의 주말 아침. 창덕궁 근처의 중앙고등학교에서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을 만났다. 그녀는 꽃무늬 블라우스에 빛바랜 데님 재킷, 스웨이드 롱부츠와 펀칭 디테일 숄더백 차림이었다. 촬영 하루 전에는 청담동 이자벨 마랑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칵테일 파티를 열었다. 서울에서 한껏 멋을 낸 여자들이 죄다 모인 자리였다. “요즘은 나라와 나라, 도시와 도시 사이의 스타일에서 ‘다름’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아요. 전 세계 여성이 패션에 대해 같은 관점을 공유하죠. 한국 여성의 스타일도 다른 나라 여성과 다를 바 없군요.” 칵테일 파티에서 서울 여자들을 한껏 만나고 또 그들에게 친절하게 셀피까지 찍어준 그녀가 말했다. 진부한 단어지만 ‘프렌치 시크’ 외에 그녀와 브랜드를 잘 설명하는 언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이 수식을 쓰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제 스타일을 진짜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에게, 쿨한 파리 여성의 이미지를 대변할 수 있다면 정말 기분 좋죠. 제 컬렉션을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테마기도 하니까요.”

MY OWN MUSE “강인하고 다른 사람의 전철을 밟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여성의 이미지가 제 컬렉션을 이끌어왔죠.” 이자벨 마랑이 환한 미소를 띠며 포즈를 취했다.

이자벨 마랑은 어제 칵테일 파티에서 만난 모습 그대로였다. 염색하지 않은 흰머리를 질끈 묶어 상투 틀듯 올렸으며, 환한 미소와 적당히 그을린 피부 톤까지. 패션쇼 피날레와 행사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던 그녀를 이토록 가까이서 마주하고 대화한 건 처음이었다. 유명 디자이너에게 종종 뿜어 나오는 까칠함과 무성의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꾸미지 않은 스타일리시함(Effortlessly Stylish)’을 의인화한다면 이자벨 마랑이 아닐까. 자연스러운 태도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 다른 준비 필요 없이 곧장 촬영에 들어가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이 완벽하군요. 바로 촬영해도 되겠어요.” “사실 노 메이크업인데, 그렇다면 ‘노 메이크업’이 마음에 든다는 건가요? 하하.” 나는 그녀의 대답에 겸연쩍은 미소로 대답하며 그녀를 교실 걸상에 앉혔다. 그날 하루만큼은 이곳이 백스테이지 대신 헤어와 메이크업을 하고 옷도 갈아입는 장소로 쓰였다.
이자벨 마랑의 쇼를 처음 본 건 2016년 3월 파리 팔레 루아얄에서 열린 2016 F/W 컬렉션에서였다. 그전까지는 이자벨 마랑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는 여성스럽고(이제 패션계에서 지양하는 단어지만), 프렌치 시크를 대변하며, 보헤미안풍의 옷으로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이자벨 마랑 쇼를 직접 봤을 때의 현장감과 에너지는 선입견을 단숨에 바꿔버렸다. 쇼장을 찾은 사람들의 옷차림은 공작새처럼 과장되지 않았고 그저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팔레 루아얄의 유명한 조각품인 폴 뷰리(Pol Bury)의 거대한 스테인리스 스틸 공을 뒤로하고 모델들이 힘차게 걸어 나올 때였 다. 특히 80년대 펑크, 로커빌리, 힙합의 초기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경쾌한 음악과 실루엣은 압권이었다(그녀는 10대였던 80년대에 주로 활동한 패티 스미스의 팬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느리고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쇼를 진행할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여기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듯 그녀의 패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준 아티스트는 뮤지션이다. “음악에서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아요. 특정 아티스트를 꼽을 순 없지만, 음악이 주는 에너지와 리듬, 템포로부터 컬렉션 구상을 시작하죠. 제겐 음악이 가장 중요합니다.”

PORTRAITS OF WOMEN (왼쪽부터)박세라가 입은 베이지색 가죽 톱과 하이웨이스트 팬츠, 가죽 부츠, 김성희가 입은 니트 원피스, 벨트와 싸이하이 부츠, 박지혜가 입은 체크 패턴 재킷과 팬츠, 가죽 부츠, 지현정이 입은 보헤미안풍 블라우스와 회색 울 팬츠, 가죽 부츠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이자벨 마랑이 서울에 들렀던 올해 상반기는 해외 디자이너의 방한이 많던 시기였다. 그중 몇몇은 젊은 패션 팬들이 열광하는, 이른바 스트리트 패션을 고수하는 디자이너들이었다. 이자벨 마랑의 옷은 그 스타일과는 대척점에 있지만, 한국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는 중이다. 그 예로 지난해 거리에서 가장 많이 보인 로고 중 하나는 ‘Marant’이라고 적힌 후디와 티셔츠였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이돌 멤버가 입고 나와 더 유명해진 이 디자인은 이자벨 마랑이라는 브랜드를 남녀노소 불문,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이자벨 마랑이 남성복 라인을 론칭한 2019 S/S 시즌과 맞아떨어진다. “스웨터와 재킷을 입고 싶은데 왜 만들지 않느냐는 얘기를 남자들로부터 계속 들어왔어요. 심지어 여성복만 전개하는 건 ‘멍청하다’는 소리까지. 남성복 론칭 이후 찬사를 많이 들어 기뻐요.” 학창 시절 아버지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던 이자벨 마랑은 자신이 만든 남성복 컬렉션의 인기가 이렇게 높아질 줄 알았을까? 하반기 마레에 첫 남성복 매장 오픈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 성공을 증명한다.
백스테이지로 변한 교실에서 이자벨 마랑과 모델 여섯 명이 함께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입힌 옷의 매무새를 그녀가 가다듬어주는가 하면, 자신이 신었던 신발을 벗어 모델에게 신겼으며, 서로에게 맞는 옷을 골라주었다. “여성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옷은 ‘나답게’ 느껴져야 하며, 입었을 때 자유로워야 해요. 웨어러블한 게 중요하죠. 이자벨 마랑을 옷장에 두는 사람은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옷을 캐주얼하고도 손쉽게 입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올해 52세인 마랑은 그녀의 옷처럼 ‘자연스럽게’ 흘러왔고 흘러가는 중이다. 모델 출신 독일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사진작가 아버지 아래 자랐지만 자신의 미래는 그녀가 정했다. “디자이너를 예전부터 꿈꾸진 않았어요. 경영학 공부를 하고 싶었으니까요. 제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었고 한 단계씩 나아갔을 뿐이죠. 제 옷을 원하는 친구들에게 팔며 브랜드를 시작했어요.” 옷을 리폼해 친구들에게 판매한 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영학을 공부할 만큼 충분히 쌓였지만, 결국 패션에 눈을 떠 스튜디오 베르소에 입학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제 ‘직업’이 된다거나 패션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BETTER TOGETHER 차수민의 타이트한 보라색 원피스와 미니 토트백, 가죽 부츠, 윤보미가 입은 검은색 가죽 톱과 플라워 패턴 치마, 벨트와 부츠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이자벨 마랑은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어느 때보다 브랜드의 얼굴이 디자이너가 된 요즘 보기 드문 일이다. “지금의 패션은 분 단위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죠. 패션 브랜드로서 좀더 많은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하는데 이게 참 힘든 일이에요. 그 이미지는 좋은 모습이어야 하고 늘 새로워야 하죠.” 이자벨은 공개된 인스타그램 계정은 없지만, 가끔 재미있는 소식을 둘러볼 때도 있다고 귀띔했다. “‘붜그(@veugue)’라는 계정 아세요? 진짜 웃겨요. 패션 잡지 <보그>가 아니라, 가짜 브랜드 캠페인 이미지를 만드는 계정인데 한번 보세요.”
이자벨 마랑은 어느 인터뷰에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울 만큼 바쁘게 하루를 보낸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가을에 열릴 컬렉션과 세컨드 브랜드 ‘이자벨 마랑 에뚜왈(Isabel Marant Étoile)’, 남성복 전개는 물론 전 세계 출장 등을 모두 해내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과 스트레스 해소법이 궁금했다. “주중에는 정말 열심히 일하지만, 주말에는 개인적 삶을 위해 노력해요. 가족, 친구처럼 ‘진짜 사람’을 만나며 균형을 유지하죠. 또 하나는 수영이에요. 얼마 전까지 매일 아침 스쿠터를 타고 가던 수영장이 있어요. 20세기 초 지은 ‘퐁투아즈 수영장(Piscine Pontoise)’에서 스트레스를 물에 녹이곤 했죠.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날이 단 하루 주어진다면, 단연 이 수영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