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고햄의 향기

Beauty

벤 고햄의 향기

2019-07-05T22:45:48+00:00 2019.07.11|

벤 고햄은 느리게 인사하고, 느리게 걷고, 느리게 말한다. 분주한 상황에서도 그는 늘 여유롭다.

대리석 진열대 위. 블랑쉬, 집시 워터, 모하비 고스트처럼 알쏭달쏭한 이름의 향수병이 놓여 있다. 원통 모양의 보틀에 검은색 뚜껑. 모두 같은 모양이다. 새하얀 라벨에는 과감하고 미니멀한 서체가 완벽한 자간을 두고 적혀 있다. 세련되고 간결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이레도’는 스웨덴 출신의 벤 고햄이 2006년에 만든 향수다. 최근 10년 동안 가장 크게 성공한 향수 브랜드의 주인, 벤 고햄을 <보그>가 만났다. 젖은 머리로 스튜디오에 도착한 그는 생각보다 훨씬 키가 크고(무려 195cm!) 거친 외모와 달리 의외로 수줍음도 탄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로브에 앞코가 날렵한 바부슈를 매치한 그의 용모는 과묵한 듯 여유로워 보였다.

아시아 첫 플래그십 스토어로 서울을 선택했어요. 왜 서울이었나요? 이유는 단순해요. 한국을 좋아하니까요. 바이레도에 기념비적 성과를 보여준 곳이기도 하고요. 브랜드를 향한 한국 고객의 호기심과 적극적인 관심을 느낄 수 있었죠. 그래서 서울에 매장을 여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설계와 디자인은 할레뢰드가 맡았어요. 건축가 겸 디자이너로 가까운 친구죠. 바이레도 창립 후 할레뢰드 부부와 꾸준히 협업해왔어요.

시공 단계에서 특별히 요청한 사항이 있나요? 당시 벽돌을 이용한 작업에 푹 빠져 있었어요. 지난 몇 년간 그래왔죠. 매장 파사드 작업이 좀 까다로웠는데 창을 충분히 만들어 외부와 연결되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일정 수준의 친밀함, 사생활을 보장하길 원했어요. 또 공간이 상대적으로 협소하기에 어떻게 하면 제품을 ‘잘’ 보여주고 또 판매할지 실질적 방법을 고안해내야 했죠.

매장에서 각별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뭘까요? 가죽 제품과 핸드백.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전시하고 판매하는 제품인 만큼 많은 이들이 직접 보고 또 만져보길 원해요.

타이다이 프린트 집업 톱과 노란색 팬츠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핸드백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브랜드 창립 당시 표현 방식과 카테고리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어요. 향수의 경우 제품을 실제로 구현하기까지몇 년이 걸렸죠. 저는 향수를 제작하는 과정, 즉 천천히 장기간에 걸쳐 하나의 제품을 개발한 후 그 제품을 장기간 판매하는 이 패턴을 핸드백과 가죽 제품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라인은 뭐죠? ‘블루프린트’. 제일 처음 디자인한 작품이죠. 그래서 청사진을 의미하는 ‘블루프린트’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말 그대로 첫 제품이었으니까. 굉장히 구조적이고 뚜렷한 육각형 실루엣에 집중한 제품이에요.

지난 1월 파리 출장길에 생토노레 119번지를 방문했어요. 파리 부티크에 다녀오셨군요! 어떻던가요?

거대한 바이레도 제국 같더군요. 이 매장은 런던이나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와 또 다른 매력을 지녀요. ‘M/M 파리’와 협업했고, 이들의 작업을 매장 벽에 설치해 생토노레 매장만의 분위기를 완성했죠. 정말 순식간에 완공됐어요. 촉박했거든요.

완공까지 얼마나 걸렸죠? 4개월쯤?

믿기지 않아요. 이전엔 어떤 매장이 있었나요? 패션 브랜드 매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군요. 무엇보다 교회와 인접한 위치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면 빛이 더 잘 들거든요. 이런 특징 덕분에 매장이 자리한 모퉁이가 더없이 흥미롭게 느껴졌죠.

벤이 입은 가죽 셔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성희의 수트와 목걸이는 지방시(Givenchy).

개인적으로 향기 나는 종이가 인상적이었어요. 옷장에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제품이에요. 서랍에 옷을 넣기 전, 종이를 넣어 옷에서 계속 좋은 향기가 날 수 있게 한 거죠. 이런 의미에서 이 제품을 ‘서랍 속 그림(Drawer’s Drawings)’이라 이름 붙였죠.

짧지만 강렬한 네이밍은 바이레도의 상징입니다. 모두 당신의 작명인가요? 이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요. 늘 그렇게 생각하죠. 제일 먼저 접하는 것이 이름이고,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름이니까요. 그래서 늘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제품을 만들기 전, 이름부터 떠오르는 경우도 있고요. 이름 자체가 아이디어가 되는 거죠. 때로 아주 흥미로운 원료의 향을 맡은 후 이름이 떠오르기도 해요. 프로젝트마다 네이밍 과정이 달라지는 이유죠.

이름이 먼저 떠오른 향수를 기억하나요? 초기에 제작한 10여 개 향수가 그랬어요. 모두 이름을 지은 뒤 향을 완성했죠. ‘일레븐스 아워’의 경우 제품을 만든 후 이름을 붙였어요. 원래 일레븐스 아워의 가제는 ‘지구상 마지막 향수(The Last Perfume on Earth)’였죠.

흥미롭군요. 그렇다면 바이레도 전 제품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이름은 뭔가요? 눈에 띄는 하나를 꼽아보라면 ‘M/Mink’. 이름처럼 아주 창의적인 제품이에요. 일본 서도(書道)에 쓰는 잉크 향이 나죠.

신제품은 태양에 대한 뜨거운 찬사를 일컫는 ‘선데이즈드’예요. 바이레 도를 시작한 2006년 당시 향수 업계는 꽤 진지한 분야였어요. 저는 사람들이 제품을 좀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이름을 활용했죠. 매사에 심각할 필요 없잖아요. 아이러니를 활용할 수 있고 유머러스할 수도 있죠.

개인적으로 익명이란 의미의 ‘언네임드’에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어요. 맞아요, 그것처럼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제품을 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했죠. 아주 개인적이고 친밀한 제품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덕분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름을 만들어 붙였어요.

벨벳 톱과 인조 퍼 스커트는 기준(Kijun), 볼드한 사자 머리 모양 귀고리와 크리스털 반지는 구찌(Gucci).

바이레도의 미니멀한 디자인은 향수 시장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모방한 유사 제품이나 브랜드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요? 솔직히 처음엔 좀 감정적으로 받아들였어요. 도덕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봤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공적인 케이스를 모방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 외면의 비주얼적 특징은 모방할지 몰라도 내면의 가치는 모방하기 어렵잖아요. 우리가 하는 일의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거든요. 우리가 탄생시키는 향기, 고객이 맡는 향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좋은 향수’란? 누구나 매일 뿌리고 싶은 향수. 말처럼 정말 단순해요. 사실 모든 사람일 필요도 없어요. 몇몇 사람,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쓰고 싶어 한다면 그 자체로 좋은 향수죠.

동의해요. 바이레도 런던 매장 한쪽엔 케힌데 와일리의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매장 디자인도 그렇고, 예술에 탁월한 식견이 엿보여요. 음, 그냥 적당히 있는것 같아요(웃음). 제 생각에 ‘아티스트’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은 세상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력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런던 매장에 걸린 그림은 케힌데의 유명 작품과 좀 다른 느낌이라 흥미로웠어요. 그렇지만 그 작품 역시 일종의 여정과 분투에 관한 스토리를 담고 있죠. 저는 이러한 스토리가 하나의 브랜드를 구축하는 과정과 잘 들어맞는다고 여겼어요. 운 좋게도 런던 매장에 그 작품을 걸 수 있었고, 덕분에 고객들이 훌륭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바이레도 광고 캠페인은 패션 화보 못지않아요. <보그>가 사랑하는 모델 프레야 베하 에릭슨과 키키 윌렘스가 활약했죠. 프레야는 ‘로즈 오브 노 맨스 랜드 ’, 키키는 ‘벨벳 헤이즈’의 히로인이었죠.

모델 선정 기준이 있나요? 일단 ‘쿨’해야 해요. 흥미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보여야 하죠. 두 사람 모두 개성이 뚜렷해요. 모델이 우리 브랜드를 상기시키는 개성이나 특징을 지녔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진 작업은 늘 크레이그 맥딘과 함께예요. 그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첫째,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죠. 크레이그의 초기 작품부터 지켜봐왔어요. 90년대부터 말이죠. 다음 주 뉴욕에서도 함께 촬영해요.

새 향수 촬영인가요? 신제품 캠페인 촬영이에 요.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화병 앞의 향초는 바이레도 ‘코튼 포플린’, 놋그릇 위에 올려진 향수는 바이레도 ‘슈퍼 시더’, 바닥에 놓인 빅 사이즈 향수는 바이레도 ‘선데이즈드’.

패션계의 멋진 인맥은 당신의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촬영 의상도 버질 아블로, 킴 존스, 크리스 반 아쉐 등 ‘친구’들의 옷을 원했죠.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에요. 그동안 패션계 친구들이나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사진가는 물론, 비즈니스 피플과도 흥미롭고 창의적인 의견 교류가 있었고 그들로부터 유익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어요. 주로 우리가 하는 일, 또 그들이 생각하기에 부족한 점이나 흥미로운 점에 관해 말이죠.

2016년 <보그>와 진행한 이메일 인터뷰에 서… 이런, 제가 무슨 말을 했죠?(웃음)

취미가 조깅이라 답했어요. 한숨 돌려도 되겠군요. 네, 그땐 그랬죠.

여전히 조깅을 즐기나요? 요즘엔 아웃도어 문화에 관심이 많아요. 하이킹, 서핑, 스키, 여전히 즐기는 러닝 등 전반적으로 아웃도어 활동이 새로운 취미가 됐죠. 최근 협업 사례도 있어요. ‘피크 퍼포먼스’라는 브랜드 제품을 디자인했고, 내년에 출시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클라이밍에 대해 생각했어요. 차를 타고 인천공항을 지날 무렵 주변 자연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한국에 유명한 섬이 있다던데…

제주도? 맞아요. 하이킹하기 좋은 장소인 것 같더라고요. 다음에 올 때는 한국의 자연을 충분히 즐기고 돌아갈 겁니다.

타이다이 프린트 데님 셔츠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팬츠는 어콜드월(A-Cold-Wall at Mue).

공교롭게도 오늘은 ‘성년의 날’이에요. 만 19세 성년이 되는 청소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장미와 향수를 선물하죠. 만약 당신의 두 딸이 성년의 날을 맞이한다면? 딸들이 다 커버리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군요. 제가 무슨 향수를 선물할 건지 물으실 거죠?

눈치가 빠르군요. 제가 애용하는 ‘팔레르모’를 선물할 거예요. 저를 잊지 않도록.

딸들은 몇 살인가요? 첫째는 열 살, 둘째는 네 살. 스마트폰 바탕 화면도 아이들 사진입니다.

사랑스럽군요. 최근 인터뷰를 통해 “모든 분야에 손대겠다”고 말했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의 다음 타깃은 뭔가요? 바이레도는 일종의 ‘창의적 아웃풋’으로 시작했어요. 그 당시 정말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죠. 향으로 시작해 아이웨어, 가방 등 여러 분야로 진출했죠. 지금은 신발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일단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하나의 창의적인 포부나 목표, 정체성을 정립하고 나면 이런 가치를 세상의 수많은 분야에 접목하는 상상을 해요. 이런 제 방식이 그 질문을 이끌어내지 않았나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