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

2022.08.03

by VOGUE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왜곡이 손쉬운 시대. 더 나은 오늘을 위해 금기시된 진실을 밝히고, 역사 속 사실을 소환한 사람들.

    일본 미투운동의 시작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Ito Shiori)는 3년 전 성폭행을 당했다. 아베 총리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한 방송사의 고위 간부로부터였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불시에 수사는 중단됐고 담당자는 바뀌었다. 피해자로서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백방으로 뛰어야 했다. CCTV 영상과 증언, 속옷 DNA 검사 결과까지.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으로 모든 일이 무산됐다. 그녀는 이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기자회견을 열었고 끔찍했던 그날을 폭로했다.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연 첫 사례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조롱과 비난.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여자 잘못이다, 꽃뱀이다, 유명해지려고 그를 이용한 것이다”까지. 이 사건을 보도하는 일본 언론은 거의 없었다. 가해자에게는 어떤 타격이 있었을까? 방송국을 그만둔 그는 아베 자서전을 냈고 일약 스타 정치 평론가가 되었다. 그사이 불기소 판결이 내려졌다.

    성폭력은 삶을 파괴한다. 두 번째 성폭행이라고도 불리는 2차 가해도 그렇다. 하지만 시오리는 이 싸움을 끝내지 않으려고 한다. 지난해 12월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진행하는 과정이다. 지금은 영국에 머물고 있다. 끊임없는 비난과 협박에 시달리다가 한 여성 인권 단체의 권유로 도피하듯 떠났다. BBC, CNA 같은 해외 미디어에서 프리랜스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여학생들을 위한 강의를 하고 해외 성폭력 센터 취재도 한다. 사건을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한 책 <블랙박스>도 펴냈다.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둘러싼 사회구조와 법률에 대한 폭넓은 취재까지 담았다.
    한국에서 미투운동을 생각해본다. 용기 있는 폭로 이후, 그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금을 견디고 있을까.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자신들의 잣대로 잘잘못을 판단한다. 투우 경기 구경꾼처럼 흥분하고 즐긴다. 사건은 새로운 사건으로 덮이고 잊힌다. 시오리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 이번에 한국을 찾은 이유도 한국 언론의 취재 요청에 응하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건 해외 언론이다. BBC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뉴욕 타임스>도 이 사건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녀는 조금 변한 듯 보였다. “그동안 일본에 갈 때면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선글라스를 쓰고 머플러로 변장하고 숨어 지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가 많아서 머리부터 잘라버렸습니다. 시원하네요.(웃음)”

    이토 시오리의 사건을 접했을 때 나는 대만의 소설가 린이한을 떠올렸다. 13세부터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남기고 자살했다. 시오리라고 달랐을 리 없다. 책에서 그녀는 “강간은 영혼에 대한 살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어떻게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변화까지 주장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포기하고 싶었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는데도 결과는 불기소였죠. 자살 생각을 몇 번이나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세계 보도사진전에서 미군 내 성폭력 사건을 다룬 사진을 보게 됐어요. 그동안 일본 언론은 성폭력이 보도 가치가 없다고 말했어요. ‘New’가 아니라서 뉴스가 아니라고 했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성폭력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죽을 각오로 내 얘기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내 동생, 친구,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후회 없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도저히 버틸 힘이 없을 때 저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계속해나갈 수 있었어요.”

    일본은 성폭력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게 금기시되는 사회다.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말한다. “잊어버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 성폭력을 당했다는 건 하자품이 되었다는 것이고 숨겨야 할 사실이 된다. 피해자들은 자신을 탓한다. 일본 내 성폭력 신고 비율은 100만 명 중 10명이다. 모두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 사람들의 인식, 성폭력에 관대한 법률이 모든 변화를 막고 있다. 시오리는 지난 3년 내내 한계와 벽을 느꼈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미투운동이 활발해져야 하고 저는 더욱더 멈춰서는 안 됩니다. ‘혼네 다테마에’라는 단어가 있어요. 혼네는 속, 다테마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죠. 겉으로 보이는 건 법이고, 사람들의 인식이 마음인 것 같아요. 일본 사람들은 혼네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법률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지 않더라도 조금은 따라갈 것 같아요. 지난해 110년 만에 강간죄가 개정되었지만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피해 상황을 증명해야 하는 법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성관계 합의 연령 13세는 곧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녀는 한국 성폭력 상담소를 방문하고 오는 길이었다. 다음 날 위안부 할머님들과 만남도 약속되어 있었다. 모두 그녀가 직접 연락을 취했다. “사실 이번에 한국에서 묵고 있는 호텔 구조가 피해를 당한 호텔과 비슷해요. 그래서 잠을 못 자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상태입니다. 피해를 입은 지 3년이 지났는데 말입니다. 성이라는 건 인간의 베이스에 있는 것이고, 베이스를 침범당하면 토대 전체가 무너져요. 피해자뿐 아니라 가족, 가족이 속한 공동체까지도요. 얼마 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발표가 있었죠. 미얀마 같은 곳에서도 가해자는 성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병기인지 알기 때문에 행하는 겁니다. 우리는 최근에 미투운동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위안부 할머님들은 훨씬 전부터 소리 높여서 외쳤습니다. 그분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미투운동을 활발하게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한 명이지만, 위안부 할머님들 역시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BBC가 제작한 다큐에서 이토 시오리는 몰카 탐지기로 집 안 구석구석을 점검해보다가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며 예전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고 눈시울을 붉힌다. 만약 그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사건 전과 후 그녀 스스로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친구가 물어본 적이 있어요. 이 사건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했는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길을 걷겠느냐고요. 전 피해를 당하지 않는 길을 걷겠다고 바로 답했어요. 하지만 과거에 저는 성폭력 피해자를 단순한 이미지로밖에 상상하지 못했어요. 이 일을 겪고 제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알게 됐죠. 목소리를 내서 조금이라도 이 사회가 바뀌는 데 도움이 된다면 괜찮은 삶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도 그녀에 대한 비방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의 미투운동에 미동도 하지 않던 일본 사회에서 조금씩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해외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했다는 사실을 전한 일본 매체도 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공개하는 ‘미투’가 몇 차례 일어났다. 그녀를 향한 응원도 늘어나고 있다. 작은 변화지만 그전까지 어떤 누구도 일으키지 못한 변화다.

    이토 시오리는 사회에 전달되지 않는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어 저널리스트가 됐다. 그녀의 관심은 늘 여성, 아이, 젠더에 닿아 있다. 그녀가 건넨 명함에는 골목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족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골목은 칠흑처럼 어두웠지만 꼬마 여자아이의 얼굴에는 빛이 비추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물었을 때 단단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내가 말하고 있는 진실을 믿는 것입니다.”

    스포츠로 보는 한국 현대사 ‘우리의 미래를 바꾼, 단 하나의 메가 이벤트 88 서울 올림픽.’ 김기조의 형광색 타이포와 DJ 소울스케이프의 음악이 1980년대 서울 풍경과 함께 흐르는 <88/18>은 KBS가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특집 다큐멘터리다. 지난 9월 16일 방송 이후, <88/18>은 SNS상에서 화제가 되었다. ‘공영방송의 이토록 힙한 자기반성’이라던가 자가당착에 빠져 제목 그대로 ‘팔팔, 씹팔’의 상황이 되어버린 제5공화국 주연의 블랙코미디라던가. 1988년과 2018년의 상황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병치시킨 <88/18>은 시청자의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를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유튜브를 통해 지금도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는 57분짜리 다큐멘터리 방송 한 편이 어떻게 이처럼 숱한 이야깃거리를 낳을 수 있었을까?

    이 문제적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든 이태웅 PD의 이력은 더 흥미롭다. 축구광이라는 적성을 살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이듬해에 KBS 스포츠국에 입사, <일요스포츠>의 ‘그때 그 경기’ 코너 등 여러 스포츠 프로그램과 중계방송을 연출해온 그는 방송국 안에서 이미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한국 씨름 현대사를 다룬 2부작 다큐멘터리 <천하장사 만만세>,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양궁 대표 팀을 통해 양궁의 시스템을 말하는 다큐멘터리 <숫자의 게임> 등이다. “스포츠국 PD들은 다큐멘터리 작업을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일단 주된 업무가 아니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는 촬영 외에도 자료를 찾고 편집하는 데 손이 많이 가니까요. 그런데 전 옛날 자료 화면을 찾아보는 게 즐겁거든요. 성향의 차이인 것 같아요.” <88/18> 역시 러시아 월드컵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중계를 하면서 같이 만든 작품이다. 올 초부터 그는 KBS 아카이브에 있는 영상 자료를 전부 뒤졌다. 스포츠, 정치, 경제, 드라마, 쇼, 어린이 프로그램까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전 장르의 자료 화면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리서치하다 보니 서울 올림픽이 1980년대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하나의 단어일 수 있겠더군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올림픽을 향해 달려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별도 키워드 없이 자료 검색 범위를 전 분야로 넓혔죠.” 2시간짜리 테이프 800개 분량을 다운로드 받는 것만 해도 사흘이 걸렸다. 거기서 다시 40시간 분량을 추려 스태프들과 공유했다. 그렇게 완성된 <88/18>은 서울 올림픽을 다루고는 있지만 실제 올림픽 영상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의 감동 드라마는커녕 굴렁쇠 소년으로 기억되는 개막식 장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울이 이룬 한강의 기적이나 그 어떤 다이내믹한 스포츠 경기도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88/18>이 다루고 있는 건 서울 올림픽 자체가 아니라 서울 올림픽이라는 결승선을 향해 전 국민이 달려가던 그 시대의 한국 현대사다. “아카이브 자료를 최대한 많이 활용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BBC 방송국 소속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아담 커티스의 작품을 보고 그런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죠. <비터 레이크> 같은 작품은 극단적으로 아카이브 화면만으로 채워져요. 서울 올림픽은 그렇게 작업해봐도 될 것 같았어요.”

    <88/18>에서 올림픽, 그 환희의 순간을 대신하는 건 TV 앞에서 서울 올림픽을 지켜보던 평범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다채로운 시청각 이미지이다. 개그맨 故 김형곤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은 ‘레슬링협회장’ 이름표를 단 이건희 삼성 회장의 모습과 교차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자 더 많은 메달 사냥을 위해 대기업을 압박했다. 이건희 회장은 고교 시절 레슬링을 했다는 이유로 레슬링 단체장을, 복싱을 좋아하던 한화 김승연 회장은 복싱을 맡는 식이었다. <88/18>에서는 기업인들에게 “금메달 많이 따면 세금 조사 안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 농담이 통하던 시절이었고, 정경 유착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유리 겔라는 숟가락을 구부리며 초능력이 만들어내는 서울 올림픽의 성공, 세계 평화의 꿈을 설파한다. ‘땡전뉴스’로 불리던 그 시절의 뉴스에서는 지하철과 고속도로 개통, 예술의전당과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소식, 백남준의 작업이 서울 올림픽이라는 메가 이벤트와 맞물려 흘러나온다.

    평창 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이었던 송승환의 배우 시절 모습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기성세대에 반항하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는 열혈 대학생을 연기하는 청년 송승환은 묘한 기시감을 자아낸다. “우연의 일치죠. 원래는 서울 올림픽과 평창 올림픽을 절반씩 해서 4부작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래서 제목도 <88/18>이고요. 옛날 그림과 현재의 그림이 같이 붙으면 재밌겠다 싶어 송승환 씨에 대한 자료를 찾았는데, KBS가 파업하면서 그 계획이 엎어졌어요.” 그가 송승환 감독을 팔로우한 부분은 평창 올림픽이 끝난 후, <올림픽 개막식 만들기>라는 다큐멘터리로 따로 방송되었다. “처음 계획대로 4부작이 되었다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올림픽 자체보다는 올림픽이 이뤄지기까지의 빌드업 과정이 더 얘기가 된다고 판단한 거죠.” 만약 서울 올림픽의 감동 스토리를 보고 싶다면 얼마 전 30년 만에 공개된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도올 김용옥 선생이 각본을 쓴 서울 올림픽 다큐멘터리 영화 <손에 손 잡고>를 보시라.

    <88/18>은 이태웅 PD의 전작이 그러했듯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스포츠를 통해 비주얼라이즈된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단, 그가 사건이나 인물 등 다큐멘터리의 재료를 다루는 방식은 스포츠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경기장 안에서는 누구에게나 공정한 룰이 적용되는 스포츠처럼 그의 카메라는 중립적이다. 스포츠에서 편파 판정은 경계 대상이다. 이태웅 PD는 각각의 사건과 인물들을 눈에 비친 그대로 중계하고 여기에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덧붙인다. 어쨌든 경기는 재밌어야 하니까. <88/18>의 경우, 별도의 인터뷰 촬영은 최소화했다. ‘아! 대한민국’을 부른 정수라, 호돌이 캐릭터를 탄생시킨 디자이너 김현 등 서울 올림픽과 관련된 몇몇 인사들이 인터뷰이로 잠깐씩 등장하기는 하지만, 작품의 축을 이루는 인터뷰이는 두 명이다. 5공 시절의 실세로 알려진 전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한국 최초의 독립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만든 김동원 감독이다. 전자의 인물은 서울 올림픽을 정면에서 주도했고 후자는 그 화려한 올림픽의 남루한 이면을 담았다. 당시 상계동 판자촌은 올림픽 성화 봉송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강제 철거당했다.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가난한 이들은 천막도 없이 그해 겨울을 견뎌야 했다. <88/18>의 시작과 끝 부분의 흐름을 주도하는 허화평과 김동원은 서로 대조적인 입장에서 서울 올림픽을 말한다. 카메라는 스스로 심판관을 자처하며 어느 한쪽의 손을 드는 대신 각각의 모습을 중계할 뿐이다. “중립적으로 보였다니 다행입니다. 걱정했거든요.”

    이태웅 PD의 다음 작업은 무엇이 될까?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조선중앙방송 아카이브에 들어가보는 게 꿈이에요. 너무 재미있는 게 많을 것 같거든요.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지만 북한과 관련된 걸 제작해보고 싶어요. 내년엔 남북 공동으로 전국체전이 열린다고도 하고요.” <88/18>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이었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오색찬란했던 1980년대를 마무리한다. 민해경이 무대에서 ‘서기 2000년’을 노래하는 가운데, 2005년이면 백두산으로 여름휴가를 갈 수 있을 것이란 방청객의 꿈과 “늦어도 2020년까지는 남북이 통일되고, 전국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는 어느 유명 인사의 말이 오버랩되며 엔딩 자막이 올라간다. 마법의 주문 같았던 서울 올림픽 후 30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그 시절 우리가 꿈꾸던 세상일까? 서울 올림픽이라는 초대형 쇼는 이렇게 끝난다. 공영방송국 KBS의 야경과 함께 말이다.

      에디터
      조소현
      컨트리뷰팅 에디터
      이미혜
      포토그래퍼
      김영훈, 이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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