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가 된 여자들: 영화감독 윤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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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가 된 여자들: 영화감독 윤가은

2019-08-10T15:21:22+00:00 2019.07.24|

추구하는 삶의 가치로서 성공은 사어가 되었지만 고여 있길 사양하며 계속 전진하는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시대와 호흡하며 섬세하고 다정한 서사를 펼치는 소설가 김애란, 자신의 정체성을 음악으로 창작해전 세계 클럽에서 한국어와 영어가 울려 퍼지게 한 DJ이자 싱어송라이터 예지, 감각의 재평가를 주장하며 예술을 실험하는 아니카 이, 아이들을 작품 세계의 화두로 삼으며 성장 영화를 부활시킨 윤가은 감독. 이들 앞에 따라붙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신선한’, ‘독특한’, ‘독창적인’ 같은 수식어는 고유성을 증명한다. 지치지 않는 질문과 세상에 대한 관찰로 스스로를 장르로 만든 여자들. 변화보다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는 여자들의 오늘을 만났다.

‘우리집’에 놀러 오세요

감독 윤가은이 영화 <우리들>에 이어 신작 <우리집>에서 아이들의 상처와 연대를 그린다. 유년의 뜰에는 ‘어른 아이’만 입장 가능하다.

어깨 라인이 드러나는 원피스는 누보텐(Nuvo 10).

감독 윤가은은 영화 <우리들>(2016)을 만들 때만 해도 개봉될지 몰랐다. 세 편의 단편을 만든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자 유명 배우는 한 명도 나오지 않으며, 주인공은 어린 소녀들이다. 그는 이 작품이 영화제에 출품되어 고생한 배우와 스태프가 상영관에서 완성작을 볼 수 있기만 바랐다. 개봉 후 <우리들>은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시나리오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꽃밭에 두 소녀가 앉아 있는 포스터의 이 작은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윤가은은 우리가 사랑하는 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 남자 성인 배우 중심의 음모론과 적당한 코미디가 버무려진 영화에 질린 관객은 윤가은의 두 번째 영화를 기다렸고, 3년 만에 <우리집>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번에도 아이들이 등장한다. 늘 다투는 부모와 지내는 5학년 하나, 가난한 생활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사는 3학년 유미와 일곱 살 유진. 하나는 이들을 보살피며 친해지고, 다 함께 유진의 부모를 찾아 떠난다. 윤가은 감독의 단편 <사루비아의 맛>(2009),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 <우리들>에 이어 <우리집>까지 모두 아이들, 특히 소녀가 주인공이다. 윤가은은 “어른보다 아이가 세상과 대면하고, 비겁하지 않으며, 용기를 내고 연대합니다”라며 유년에 대한 향수를 고백한다. 앞으로도 그 세대,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 그 여정을 응원할 것이다.

영화 <우리집>의 마케팅 담당자가 포스터 문구 후보를 보여줬어요. ‘우리집은 항상 왜 그럴까?’가 가장 좋던데요.

저도요! 영화에 나오는 대사기도 해요.

영화 <우리들>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타인을 좋아하게 됐을 때 그게 틀어지면서 오는 감정의 상응”이 영화의 출발이라고 말했어요. <우리집>의 시작점은 뭔가요?

‘가족은 누구에게나 풀리지 않는 숙제다.’ 가족끼리 문제가 발생하면 어른은 자기 문제로만 인식해요. 하지만 아이는 부모님 문제도 내 문제고, 가족을 책임지려는 마음도 강하죠. 어른의 시선 밖에서 아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얼마나 적극적으로 상황을 대면하고 해결하려 하는지 얘기하고 싶었어요.

<우리집>은 <우리들>의 편집을 마무리하던 중 구상한 이야기라고 들었어요.

<우리들> 편집은 3개월 정도, 막차로 귀가하면서 했어요. 해가 떠 있는 시간은 편집실에서 보낸 셈이죠. 하루 종일 아이들의 감정싸움을 보니 제가 그들을 괴롭히는 것 같았어요. 다음 영화는 아이들끼리 다투더라도 연대하고 ‘으쌰으쌰’ 해내는 얘기를 하고 싶었죠. <우리들>도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내면적인 움직임이라 잘 드러나지 않아요. 이번 친구들은 보다 동적이죠.

<우리집>을 편집하면서는 등장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나요?

최근에 영화를 수정하려고 편집감독과 다시 보는데, ‘어유, 진짜 애쓴다’ 싶었어요. 아이들이 영화에서 계속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거든요. 우리도 열심히 살자는 얘기까지 나왔죠.

<우리들>은 동갑내기 친구들인데, <우리집>에선 나이를 다르게 설정한 이유는 뭔가요?

아이가 친구를 만나 깊어지면 일종의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족 구성원은 나이대가 다양하잖아요. 나이가 다른 친구들이 밖에서 만나 자매가 된 거죠.

고학년, 저학년, 미취학 아동과 촬영하면서 국적이 모두 다른 외국인과 작업하는 기분이었다고요.

국가로 표현할 만큼 아이들은 각기 다른 세계가 있었어요. 아이들끼리 친해지면 하나의 언어로 통합되겠지 싶었는데, 착각이었죠. 좋아하는 아이돌, 마음의 표현 방식, 취미, 대화하는 법 모두 달라요. 굉장히 새로웠어요.

아이들 때문에 울었다고요.

정말 더운 날, 모기가 엄청 많은 산에서 찍느라 막내 유진(주예림)이 엔지가 몇 번 났어요. 제가 헤드폰으로 듣고 있는 줄 모르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데, 둘째인 유미(김시아)가 첫째인 하나(김나연)와 상의하면서 막내를 다독이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하나는 실제로도 언니라 늘 동생들을 다 챙겨줬고요. 모두 고맙고 미안해요.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아이들이 연대를 이뤘군요. 

영화 현장이 어른들 세계에 초대된 느낌일 텐데, 자기들끼리 세계를 만들고, 돕는 모습이 감동이었어요.

현장에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굉장히 섬세하게 대한다고 들었어요.

섬세한지는 모르겠고, 아이도 어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주변이 편해져야 마음이 열리는데, 아이들도 똑같아요. 그래서 늘 어떻게 하면 이 친구를 편하게 해줄까를 고민하죠.

배우 오디션을 볼 때 한 명 한 명과 대화하죠. 이번에는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가족 얘기를 많이 물어봤어요. 엄마 아빠가 싸울 땐 어떻게 해? 형제랑 친해? 사적인 얘기라서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일러두죠. 그런데 친구들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얘기를 거침없이 해요. 오늘 언니가 내 옷을 입고 가서 화가 났다면서 털어놓죠. 그들에게 가족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예요.

극 중 역할과 가장 비슷한 상황의 아이를 캐스팅하는 건가요?

중요해요. 아이는 인간으로서, 배우로서의 경험이 성인보다 적잖아요. 성인은 본인과 다른 캐릭터라도 연구하면서 해낼 수 있지만, 어린 배우에게 그런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요. 실제와 극이 비슷하면 아이의 이해 속도가 빠르고 보다 편하게 할 수 있어요.

단편 <사루비아의 맛>, <손님>, <콩나물>, 장편 <우리들>에 이어 <우리집>까지, 모두 아이가 주인공이에요. 밥 먹는 장면만 찍어도 전작과 비슷해 보일까 봐 검열한다고요.

‘내가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인가’ 고민했는데, 내 안의 이야기를 길어 올려 잘 만들고 싶은 사람이더라고요. 뭔가 내 안의 씨앗이 발아가 돼요. 다른 곳에서 온 씨앗은 마음이 동하지 않아요. 그것이 제대로 확장되고 풍요로워지는지가 관건이죠.

아이들, 그중에서도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유를 묻자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자신이 왜 그런 인물, 이야기에 무의식적으로 끌리는지 생각해봤나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내 속에 뭐가 있길래 계속 이런 이야기를 쓰지? 상담을 받아야 하나? 성장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적인 부분이기도 하지만, 특히 어릴 때부터 읽은 성장 문학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해요.

어떤 성장 문학을 좋아했나요?

지금은 기억도 안 나고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고 시리즈를 많이 읽었고 오정희 작가님의 작품은 이야기를 쓸 때 종종 펼쳐봐요. 어린이 도서관도 되게 자주 가고요. 저는 유년이 그리워요. 그래서 당시의 장난감, 인형, 문구류를 모으죠. 그 시절의 저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지만, 단순했기에 세상과 대면했고, 문제를 해결하려 용기를 냈고, 비겁하지 않았어요.

<우리들>이 잘되고 난 뒤 “다음 영화가 진짜 첫 영화란 생각이 든다”고 했어요.

매 작품 들어갈 때마다 처음 하는 것처럼 막막해요. 이야기만 달라지는 게 아니고 모이는 구성원도, 배우도 바뀌잖아요. 전작과 같은 스태프일지라도 그들은 그때와 다른 사람이죠. 영화는 그때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좋아해서 모인 사람의 에너지가 작용해서 만들어지기에, 항상 이번 영화는 어떻게 할까 새롭게 고민해요. 얼마 전 영화제 심사가 있어서 <암살>의 최동훈 감독님을 만났는데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영화는 노하우가 안 쌓인다, 늘 처음 하는 것 같다”고요. 그 말을 듣고 안심했어요.

거장인데 압박감에 촬영장 바로 앞에서 차를 돌렸다는 일화를 들었어요.

긴장감과 스트레스에 익숙해지지 않아요. 그동안 작품을 찍으면서 뭘 한 걸까 싶죠. 이번에도 너무 힘들길래 <우리들> 때 제작 일지를 봤는데, 완전 지금 쓴 일기 같았어요. 그냥 이런 불안정한 상태를 인정하고 익숙해져야 좀 편해질 것 같아요.

젊은 여성 감독을 묶어 조명하는 기사가 많아요. 지난해 한국영상자료원의 전시명은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감독展>이더군요. 생존이란 단어를 쓸 만큼 환경이 척박하구나 싶었죠.

실제 여성 감독이 많아지기도 했고, ‘여성’이란 수식어가 붙어서 사람들이 주목한다면 중요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여성’이 붙지 않는 날이 와야겠죠. 아마 ‘나는 영화를 만드는 여자야’라고 생각하는 감독은 없을 거예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한국에서 여성 감독으로 사는 게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과 같다고 답해요. 여성으로서 이 사회가 불편하다면 감독도 똑같을 거예요.

영화를 만들면서 기운이 날 때는 언젠가요?

이정향 감독님과 무척 친해요. 제게 용기도 많이 주시고, 정말 가장많은 영향을 받은 선배 중 한분이세요. 또한 여고생, 영화를 공부하는 여대생이 와서 제 영화 보고 힘이 됐다고, 자신도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할 때죠. 어릴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는데, 그때는 남자 감독이 훨씬 많았어요. 임순례 감독님, 변영주 감독님을 보면서 힘을 얻었죠. 여성 감독이 존재하고, 그들이 만드는 다양한 영화가 있잖아요. 저도 그런 희망의 일부가 되길 원해요.

그렇게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나요? 

나 같은 사람도 영화를 만드니까 겁먹지 말라고요. 보통 찾아오는 친구들은 카리스마 있고 괄괄하기보다 고민이 많고 내향적이에요. 저도 그랬어요. 지금은 만들어진 사회성이죠. 제 영화도 강한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들에게 나 같은 사람, 이런 영화도 가능하다는 예가 되면 좋겠어요.

죽기 전에 만들고 싶은 영화는 뭔가요?

재난물과 좀비물도 좋아해요. 아이들이 세계를 구하는 큰 스케일의 영화를 하고 싶어요. <매드맥스>의 아이들판 어떨까요? 정말 시나리오를 써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