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사진작가 박찬욱: 적재적소

2019.07.25

by 송보라

    사진작가 박찬욱: 적재적소

    영화감독 박찬욱은 또한 사진작가다. 그는 “예술은 리얼리티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리얼리티”임을 증명하는 질문과 답변을 사진으로 제시한다. 지난 수년간 찍은 사진으로 구성된 이번 특집에 어울리는 부제를 지어달라 요청하자 ‘적재적소’라는 답이 왔다.

    “영화 일을 할 때보다 더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그 못지않은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 평생 할 일이고. 영화 투자를 받지 못할 때가 오면, 사진이 메인 직업이 되는 거죠.” 3년 전 <아가씨>의 개봉 즈음 만난 박찬욱이 말했다.
    설마. ‘영화를 안 찍는 박찬욱’이란 있을 수 없기에, ‘언젠가의 전업 사진작가 박찬 욱’ 역시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도대체 왜?”라는 저의를 깔아둔 건데, 속수무책 들켜버린 것이다. 이번 인터뷰의 말미,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진작가 박찬욱인가요, 사진 찍는 박찬욱인가요.” 그는 단호하 게,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작가죠. 사진집도 냈고, 사진전도 열었으니까요.”

    동의한다. <아가씨 가까이>라는 사진집, 라이카 애호가들의 그룹전부터 미술관에서의 전시까지, 그는 열심이다. 그러나 박찬욱이 사진작가로 호명될 수 있는 명징한 이유는, 내가 그의 영화만큼이나 사진에 집착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데, 번번이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사유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박찬욱이 미술가이자 동생인 박찬경과의 공동 프로젝트 그룹 ‘파킹찬스’로서 만든 <반신반의>, <격세지감>, <파란만장> 같은 영상 작품을 극장 아닌 미술관에서 선보이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메타영화적 요소를 갖추었듯, 감독인 그가 찍는 사진은 ‘사진이란 무엇인가’ 묻는다. 여기에 ‘박찬욱’이라는 주체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질문은 더 구체화된다. “좋은 사진이란 무엇인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백조 머리, 새 대가리 모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돌산, 남자 마네킹의 벗은 엉덩이, 나무 한 그루 딱 들어갈 자리를 배려한 낮은 담, 낡고 닳은 건물에서도 가장 후미진 구석, 수백의 방울뱀이 똬리를 튼 듯한 밧줄 더미, 요상한 포즈의 예수상, 사람의 이목구비를 꼭 닮은 의자 군단… 장장 몇 페이지를 묘사로만 채운다 해도, ‘박찬욱의 사진은 일상의 낯선 순간을 포착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나 널린 흔한 것들이되, 독특한 시선을 통해 특별한 상태로 포착하는 건 박찬욱 사진의 전매특허다. 하지만 그는 기를 써서 기묘한 대상만 찾아다니는 타입이 아니라 자기 앞에 우연히 도래한 어떤 순간에 전적으로 충실한 사진가다. 그런 점에서 때마침 눈앞에 펼쳐진 이상한 풍경들을 대면할 수 있었던 그가 엄청나게 운이 좋았거나, 엄청난 안목을 가졌다고밖에 할 수 없는, 흥미로운 사진들이다.

    “사진에 내러티브가 있다, 스토리가 있다고도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아 요. 이야기를 상상 혹은 발전시키게끔 자극하는 단초를 제공할 순 있겠으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죠. 나는 단일한 이미지 그 자체로 완결되는 게 좋아요. 찰나의 고착된 순간, 그때 마주친 존재, 나를 숙연하게 만들거나 기념하고픈 욕심이 들게끔 한 어떤 사물이나 피사체의 힘이랄까. 사진이란 어떤 대상이 특정 계절, 시간대의 특정한 광선과 만났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내일 같은 곳에 간다 해도 같은 걸 만나리라는 법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순간적이죠.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더 새롭게 다가올 뿐 아니라 꼭 필요한 작업 같아요. 내 영화는 자연스러운 것조차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모든 걸 인공적으로 꾸며낸 결과물이지만, 내 사진은 의도적으로 미장센을 만든 듯해도 실은 우연히 그대로를 마주친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반대죠.”

    “이런 사진을 찍었다고 신성모독이라며 나를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여기는 멕시코의 어느 성당입니다. 예수님을 저렇게 둔 건 내가 아니란 말입니다.”

    인스타그램은 박찬욱의 ‘결정적 순간’을 목격할 수 있는 사적 갤러리다. 어제 파주에서 찍은 사진, 몇 달 전 <리틀 드러머 걸> 현장에서 찍은 사진, 몇 년 전 브뤼셀에서 찍은 사진을 수시로, 장소와 연도만 표기해 올린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순차적 의미가 있다거나 내러티브적으로 성립하지는 않는다. 무표정한 그의 사진에는 전후가 없다. 시공간이 사라진 혹은 무시된 공백에는 미스터리가 남고, 진공의 상태는 시적으로 공명한다. 그러니 장소, 날짜를 표기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별 의미 없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이 ‘별거 아닌’ 정보 덕분에 사진의 무국적성, 무중력성, 무시대성을 실감한다. 언제, 어디인지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며, 세상 가치로는 경중을 따질 수 없는 대상들인 데다, 20년 후에도 2개월 전 사진처럼 보이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런 ‘무위’의 지점에서, 박찬욱의 사진은 그의 영화처럼, 고급과 저급, 의미와 무의미, 미추를 가르는 기준 자체를 무화시킨다.

    “워너 브라더스 회사 주차장에서 누가 하늘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려는 모양이다. 가짜 구름과 진짜 구름 사이에 대화가 한창이다.”

    “예술은 리얼리티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리얼리티다.” 직접 영화 스틸 사진을 찍기도 한 장 뤽 고다르의 말을 나는 지난해 아시아문화전당에서의 ‘파킹찬스’ 전시, 박찬욱의 <미술관 연작> 앞에 서서 실감했다. 미술관에 갈 때마다 찍은 <미술관 연작> 속 명화들은 멀쩡한 게 없다. 흔들리거나, 일그러지거나, 조명에 반사되어 엉뚱한 형태로 변모한다. 관객들은 미술관에서 ‘플래시 금지’를 요구받고 전문가들은 흔들린 사진을 실패로 규정하지만, 그의 세계에서는 실패도 어엿한 작품이 된다. ‘실패에 대한 박찬욱식 격언’이라는 나의 감상평에 그가 한술 더 떴다. “네, 시작은 그거죠. 그러나 더 의도적으로, 더 큰 실패를 할수록 거기서 또 새로운 미학이 탄생한다는 거예요. 흔들림 혹은 반사된 조명이 작품의 일부를 이루는 것처럼요.” 과연 그가 포착한 성모마리아의 후광은 더욱 은혜로워졌고, 입을 반쯤 벌린 여자의 표정은 극한의 무아지경으로 치닫는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간다면, CGV 용산아이파크몰의 박찬욱관에 가보길 권한다. 자신의 이름을 딴 헌정관을 만들자는 제안에 박찬욱은 사운드와 이미지의 까다로운 품질 관리와 함께 4개월마다 여섯 점의 사진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덕분에 사시사철 그의 사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관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개인전이죠. 이 사진들도 눈여겨봐주십사 합니다(웃음).”

    끝나지 않을 이 개인전의 제목도 단 하나, ‘범신론’이다. 신과 전 우주를 동일시한다, 세상 만물 이대로가 신이다,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면 모든 건 평등하다는 의미 정도 되겠다. 그러니까 ‘하필’ 하늘로 치솟은 선인장, ‘하필’ 귀로 눈을 가린 개, ‘하필’ 돌고래 모양의 바나나 따위야말로 생의 귀한 존재이며, 세상의 영혼이다. 결국 박찬욱의 범신론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발현이며, 사진 전반을 지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어떤 건 멋진 풍경일 수도 있지만, 어떤 건 하찮은 사물인데… 그런 것들이 아주 잘 발견되고, 잘 디자인되고, 보살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사진을 통해 만들고 싶어요. 내가 그런 느낌과 만나고 싶은 거죠. 하나의 단어로 규정할 수 있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누구는 그로테스크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또 누구는 유머러스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다른 누구는 쓸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내 사진을 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각기 다르기를 바랍니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죠. 복잡한 인물로 복합적인 감정을 만들 수는 있지만, 한순간 포착된 정지 이미지에서도 그런 복잡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박찬욱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물과 풍경을 막론하고, 눈에 띈 귀엽거나 요염하거나 거룩하거나 기이하거나 쓸쓸하거나 징그럽거나 우스운 것들… (중략) 요염한데도 불구하고 거룩한 유형, 너무 우스운 나머지 쓸쓸해져버리고 마는 유형, 일견 징그럽지만 자세히 보면 귀여운 유형’들. 같은 서문에서 소설가 존 업다이크의 주인공 토끼의 말을 인용해 “모든 것 뒤의 어딘가에 내가 찾아내주기를 바라는 뭔가가 있다”고 쓴 박찬욱은, 그래서 사진을 찍는다. ‘찰칵’ 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 채 세상에서 사라질 순간, 그를 사로잡은 미감의 대상은 소박한 경험의 절제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주관적인 동시에 필요하다면 법정 증거 사진으로 써도 좋을 만큼 객관적이다. 하지만 그 객관성의 기준조차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사진은 드라마를 획득한다. 예컨대 휴지통에 놓인 색색의 쓰레기와 빨간 장갑도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 시선을 잡아끈 순간, 박찬욱이 찍고 내가 보는 ‘지금’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혹은 보통 나나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순간의 신성함 혹은 숭고함이라고 해두자.

    “세상 만물과 나누는 대화의 방식”인 박찬욱의 사진은 최근 흥미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마치 ‘꼭 봐야 하는 좋은 영화’를 놓쳤다는 인식과 자각이 엄습했을 때처럼, 어쩐지 초조해졌다. 그의 세상과 나의 그것이 다르지 않을 텐데, 끝내주는 사건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일어나고 있다는 위기감,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조급함, 보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반성,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재고에 이르기까지의 연쇄반응. 하지만 설사 그 훌륭한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상관없듯, 이건 삶의 목적이 아니라 태도에 관한 문제다. 모든 예술이 그렇다. 알면 좋지만 몰라도 그만. 그래 봤자 백조 머리, 기괴한 고목, 마네킹 엉덩이 같은 것일 뿐이라면서도, 나는 또 그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박찬욱의 사진이 보편적 인간, 세상의 상태, 사회의 본질을 ‘대표’한다 할 수 있을까? 그런 사진이 좋은 사진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까? 글쎄. 분명한 건 그의 사진은 그저 존재하며 주체로 역할 하는 대상들을 ‘대변’한다는 점이며, “무엇이 좋은 사진인가”보다 “왜 좋은 사진인가”라는 질문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찬욱이 좋아하는 사진가로 윌리엄 이글스턴을 꼽은 건 매우 납득이 간다. 컬러사진의 선구자이자 데이비드 번, 데이비드 린치, 코엔 형제 등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인 이글스턴의 사진은 박찬욱의 그것처럼 질문을 유발한다. 이건 무엇이며, 왜 이런 상태로 여기에 있는가. 그리고 대전제 같은 질문은 ‘왜 이것에 끌렸나’다.

    “왜 저런 것에 매료되었을까, 왜 이게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까, 생각해보는 게 사실 예술의 중요한 존재의 이유죠.” 박찬욱의 말은 그의 사진을 볼 때 길잡이 역할을 하지만, 그전에 이글스턴이 있었다.

    “당연히 색감이 아름답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좋아하죠. 예술사진이든, 다큐멘터리 사진이든, 흑백이 더 품위 있고 격조 있을뿐더러, 거리 사진에서도 더 스트레이트한 날것의 느낌을 성취할 수 있다 여겼던 당시의 고정관념이 이글스턴을 비롯, 컬러사진을 주창한 이들에 의해 깨졌어요. 몇 년 전 그분 작업실에서 직접 프린트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손수 만든 프린트의 색감은 충격적이었어요. 물론 일상의 하찮은 사물에 대한 관심도 좋지요. 성애가 잔뜩 낀 냉동실 안 모습이나 세발자전거를 숭고한 대상처럼 포착한 사진처럼, 아무것도 아닌 데서 뭔가를 발견해내는 시선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내가 워낙 인물을 찍지 않아 드러나진 않겠지만, 다이앤 아버스의 세계에도 못지않게 영향 받았고요. 또 외젠 아제는 사진작가로서는 나의 첫사랑이에요.”

    윌리엄 이글스턴, 다이앤 아버스, 외젠 아제는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사진을 찍었다. 윌리엄 이글스턴은 60~70년대 미국 중부 일상 풍경에 집중했고, 다이앤 아버스는 50년대 기형인 등 사회적 약자의 존재를 대면했으며, 외젠 아제는 19세기 말 파리의 풍경을 세상에 없는 공간처럼 담았다. 그가 좋아하는 또 다른 사진작가 스티븐 쇼어의 말대로 “어떤 것의 표면은 보다 깊은 힘의 지표가 된다”는 걸 일찌감치 증명한 이들은 수십 년 후 “모두 초현실주의적인 사진을 찍었다”고 말하는 박찬욱을 매개로 묶인다. 초현실주의적이라는 건 익숙한 걸 낯설게 느끼도록 한다는 점에서 전복의 힘을 가진다. 동시에 “형식(표면)이 곧 내용(힘)”이라는 점이 본인 영화 스타일의 주요한 요소라 말한 박찬욱이 사진 언어를 통해 발언하고자 하는 바다. 영화감독 박찬욱과 사진작가 박찬욱의 교집합은 이렇게 완성된다.

    “쥐라기는 저렇게 한여름에 하늘도 화창한데 파주의 겨울 벌판이 워낙 추웠으므로 티렉스도 딱해 보였다.”

    “익숙한 존재를 낯설게 본다, 낯설게 만든다, 아름다운 것, 그로테스크한 것, 유머러스한 것 등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에 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피사체와 작가(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게 영화감독 박찬욱과 사진작가 박찬욱의 공통점이에요. 그 순간에 최적의 거리가 얼마인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둘 것이냐의 문제. 영화를 만들 때나, 사진을 찍을 때나 그걸 찾으려는 고민에 아주 많은 시간을 쓴다는 것이 같은 점이에요. 나는 사진을 찍을 때도 대충 찍고는 후반 작업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확대도, 트리밍도 거의 안 해요. 어떤 렌즈를 사용하고, 얼마나 거리를 둘 것인가의 조합이 중요하고, 그걸 결정하는 데 애초에 시간을 많이 써요. 그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영화에서나, 사진에서나.” 어쩌면 삶에서도 그럴 것이다.

    ‘피사체와의 적당한 거리’는 대학 3학년 때까지 활동한 사진 동아리 후배이자 뉴욕에서 목수로 활동 중인 사진작가 서영기의 사진집 <명료한 오후>에 실린 ‘박찬욱 최초의 사진 평론’에도 고백처럼 언급되어 있다. 아이패드에 담긴 인물 사진들을 보면 그 거리가 명확히 인지된다. 강렬한 눈이 인상적인 베테랑 배우 찰스 댄스, 의상 피팅 중인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등의 존재가 신선한 건 배우 자신도, 캐릭터도 아닌 애매모호한 영역에서 부지불식간에 의외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제외되었지만, 그는 언젠간 인물 사진을 모아 개인전을 열거나 사진집을 내고 싶다고 했다. 영화인들은 물론이고 일반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 그가 찍은 유일한 인물 사진이다. 그러니까 렌즈를 끼느라 눈을 까뒤집은 미아 와시코브스카나 마라케시 영화제의 격의 없는 술자리에서 찍은 마리옹 꼬띠아르, 아벨 페라라, 마틴 스콜세지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눈 밝은 누군가가 그의 사진을 발견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자면, 요즘 박찬욱은 한 작품에 얽매이지 않는 흔치 않은 시간을 바쁘게 보내고 있다. 한국 영화와 미국 영화, 영화와 TV 드라마, 감독과 프로듀서의 경계 없이 11편 정도의 작품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조르주 사발과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공연을 보러 가는 건 중요한 일과다.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라이카나 핫셀블라드 등으로 찍은 사진을 아이패드로 옮겨 담고, 추리고, 보정한다. 그렇게 ‘본선 진출’을 기다리는 사진들이 아이패드에만 8,000여 장 있다. 3년 전 인터뷰에서는 4,000여 장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새 벌써 두 배로 늘었다고 말했더니, 그의 얼굴에 짐짓 뿌듯하고 천진난만한 미소가 번졌다. 어떤 예술가를 지지한다는 건 관습에 저항하는 첫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적재적소’의 질문을 던지는 부지런한 사진작가 박찬욱을 지지한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박찬욱
      컨트리뷰팅 에디터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