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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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중독

2019-08-23T01:24:54+00:00 2019.08.27|

취미의 세계는 참 다양도 하다. 그가 아무리 중독적 인간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몰입의 경험은 무시 못한다.

어떤 곤궁한 시인이 있었다. 최소한의 생활 외에 다른 아무것에도 쓸 돈이 없었던 그는 다소 우습게도 오디오파일에 비닐 수집가였다. 흔히 ‘하이파이 마니아’ 또는 ‘오디오광’이라 부르는 이들의 정확한 호칭은 ‘오디오파일’이다. 듣는다는 뜻의 ‘오디오’에 애호 내지 사랑의 뜻인 그리스어 ‘필리아(Philia)’를 합친 말이다. 또 이들이 말하는 ‘비닐’은 비닐 레코드, 곧 LP음반을 말한다. 원래는 깍지벌레류의 분비물에서 얻은 셸락이라는 수지로 레코드를 만들었지만, 하도 잘 깨지는 바람에 비닐론 합성수지가 나온 후로는 ‘비닐’이 레코드라는 단어를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도 SP라 불리는 유성기 음반이나 초기 LP음반의 경우 셸락으로 만든 것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오디오파일이자 음악 중독자인 그 시인의 집에 한 여자가 방문했다. 시인은 그녀에게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천상의 사운드를 들려주겠노라며 스피커, 앰프 등을 새로 연결하느라 한참 땀을 흘렸다. 스피커 명가 JBL의 파라곤 아니면 하츠필드 모델이었나? 50년대에 만든 커다란 목제 가구 같은 스피커 위에 거꾸로 매달린 채 작업하는 시인을 지켜보다 여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순수한 열정에 감동이 북받친 것이다. 사진작가이자 명품 해설가 윤광준 씨의 책에선가, 일화의 주인공인 김갑수 시인의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이다.

취미의 세계는 참 다양도 하다. 바둑, 자전거, 모터사이클, 자수, 목공에 심지어 혐오 동물 기르기까지. 아나운서 황인용 선생은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로 잘 알려져 있는데, 빈티지는 서로 통하는 것인지 그의 카메라타 음악실 앞에는 70년대산 재규어가 멋지게 서 있다. 재규어의 색상은 무릇 브리티시 그린이 아니면 안 된다. 요즘 흔한 은회색은 재규어가 아니다. 부품도 구하기 어려울 텐데, 선생은 암녹색 재규어를 깔끔한 상태로 잘 유지한다.

왜 사람들은 이처럼 큰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하찮은 일에 목숨을 걸까. 번개처럼 내려친 어느 날의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나만의 삶, 차별화된 인생으로 향하는 출구를 찾기 위해서일까. 남들 보기에는 사소하고 별스러운 취미일지언정 분명 사람에게는 중독과 몰입의 경험이 가져다주는 무언가가 있다. 신문 주말판을 뒤적이다 깜짝 놀란 적 있다. 지면 절반을 차지한 사진에는 설악산 대청봉 꼭대기에 산악자전거 MTB를 세워놓고 만면에 웃음을 터뜨리는 세 사람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잘 아는 출판사 대표였기에 더 놀랐다. 셋의 얼굴은 순수한 희열에 젖은 표정이었다. 우주적인 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무념의 기쁨.

오래도록 와인을 즐기다 보니 그 세계에도 고수가 여럿임을 알게 되었다. 고수들이라 해도 늘 고가 명품 와인을 마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명품이 왜 명품인지 이해하고, 명품이 아닌 와인까지도 사랑하는 법을 안다고 할까. 진짜 고수는 로마네 콩티나 페트뤼스나 샤토 마고를 마셨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내가 거의 존경의 염을 품고 있는 한 애호가는 1989년 황금 빈티지를 만든 페트뤼스 밭에서 그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부르고뉴 본 로마네 지역의 흙은 어떠하고 주인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다. 독일 모젤 계곡의 햇살 가득한 비탈에서 등 바구니를 지고 포도송이를 따는 농부의 가을을 눈에 보이듯 그려내곤 한다. 와인의 역사로 들어가면,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로마와 세 수도원과 신대륙 개척기까지 와인으로 재구성한 인문학을 들려준다.

한 가지에 깊이 통하면 전체에 통달한다고 하던가. 사소하게만 보이는 취미도 어느 수준을 넘는 순간에는 삶과 세상의 이치에 개안하는 듯한 경험을 준다. 10여 년 전 어느 날 나는 지방 출장길에 운전대를 잡는 내내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있었다. 조지프 시게티가 연주하는 곡을 다섯 번 이상 반복해서 들었을까. 마침내 또 한 번의 연주가 끝났을 때 나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늘어지는 박자와 운지상의 실수와 음향마저 엉망인 연주였지만, 기교와 상관없이 영혼을 정화시키는 ‘어눌함의 미학’에서 깊은 감동을 얻는 순간이었다.

‘좋은 취향’이라는 말이 있다. 고상한 문화적 취미나 습관을 일컫는 이 말은 원래 ‘Good Taste’라는 말의 번역어로 근대 초 서양의 인문주의적 교양인을 묘사하는 말이었다. 콜럼버스를 후원한 스페인 이사벨 여왕이라든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메디치 같은 인물들이다. 스스로 학문과 예술의 기예를 갖추었고, 그런 천재들을 알아보는 안목까지 지닌 사람들. 오늘날 ‘좋은 취향’은 주로 취미와 예술의 영역으로 옮겨와서 미술관, 음악당, 박물관이나 절과 서원 등의 여행지에서 가끔 마주치게 되었다.

음주나 게임이나 도박 등이 아무리 중독적 취미일지라도 ‘좋은 취향’이 될 수 없는 것은 특별한 노력을 요하지 않는 손쉽고 가벼운 습관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법칙은 참으로 냉정해서 지불한 만큼만 되돌려준다. 오랜 시간과 땀을 기울여 마지막 고비를 넘었을 때만 마침내 알게 되는 경지가 있다. 대개는 그 문턱에서 힘에 부쳐 되돌아서지만 말이다. 30%, 50%의 향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을 뭉텅 쓰거나 석 달 혹은 다섯 달의 시간으로도 충분하지만, 마지막 5%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년의 시간과 더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하는 이치가 그러하다. 100만원짜리 오디오 기기로도 좋은 소리가 주는 즐거움의 90%를 느낄 수는 있지만 마지막 10%의 황홀을 맛보기 위해서는 1,000만원짜리 하이파이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내가 찾는 소리의 성향을 알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다.

그리스어에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말이 있다. 제작 또는 공작의 기술을 가리키는 이 말은 사물을 다루는 창조적 활동에서 얻는 깊은 경험적 지혜나 기예(Art)를 뜻하기도 한다. 예전에 수공으로 가구를 만들던 목수는 나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기후, 어떤 지형의 양지 또는 응달 에서 자란 수종이 식탁의 다리를 깎는 데 적당하고, 톱날을 일쑤 부러뜨리는 옹이는 어떻게 피하거나 무늬로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만든 식탁은 공장의 전기톱으로 규격에 맞춰 잘라내고 조립만 하면 뚝딱 만들어지는 식탁과 같을 수가 없고, 50년, 100년의 세월 동안 사용자에게 큰 만족감을 준다. 지금은 누구나 차에 달고 다니는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시절, 우리는 길모퉁이의 모양과 건물의 생김새를 잘 알았고, 어느 도로에 가면 저녁 황혼이 황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좋은 취미에 몰입하고 좋은 취향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의미다. 남들이 모르는 경험의 차원을 높이 쌓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아무리 중독적 인간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몰입의 경험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그런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