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감독과 여자 스태프,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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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감독과 여자 스태프, 동지

2019-09-30T11:24:25+00:00 2019.09.30|

<집으로>부터 <벌새>까지 한국 영화계의 여자 감독. 그 비전을 공유하며 작품이란 ‘밥상’을 함께 차린 여성 스태프.

유은정 감독과 이영림 편집기사

유은정이 입은 블라우스는 자라(Zara), 팬츠와 앵클 부츠는 로우클래식(Low Classic), 안경은 아네스 베(Agnès B. at Seeone Eyewear). 이영림이 입은 터틀넥은 H&M, 바지는 자라, 슈즈는 코치(Coach).

이영림 편집기사는 유은정 감독의 단편 <밀실>(2016)과 <밤의 문이 열린다>(2018)를 함께 했다. 그 외에도 <도희야>(2014), <범죄의 여왕>(2016), <유리정원>(2017), <살아남은 아이>(2017), <나비잠>(2017) 등을 거쳐 현재는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편집 중이다. 둘은 사제 관계로 만났다. 유은정 감독이 한예종 1학년이었을 때 이영림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맥(Mac) 전원 버튼을 켜는 법도 몰랐던 제게 선생님의 수업은 도움이 많이 됐어요. 편집에 대한 기술적인 면보다 영화의 본질, 기본을 알려주셨죠.”(유은정)

몇 년 뒤, 유은정이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선배가 준비하는 웹드라마의 스크립터로 들어갔을 때, 그 작품을 편집하던 이영림 편집기사와 재회했다. 유은정 감독은 당시 준비 중이던 단편 <밀실>의 모니터링을 이영림 편집기사에게 부탁하면서 둘의 첫 작업이 시작됐다. “영화가 마음을 울렸어요. 내가 조금만 더해주면 훨씬 좋아질 것 같아 함께 하자고 제안했죠. 지금도 기억나는 유은정 감독의 말이 있어요. 영화를 왜 구상했느냐고 물었더니, 본인이 느끼는 공포라는 감정에서 이 영화가 시작됐대요. 그것이 유은정 감독의 세계관 같아요. 본인의 감정에서 시작해서 솔직하고 진실하고 풍성하게, 또 장르적으로 풀어내요. 그것들이 관객과 스태프, 저의 마음을 움직이죠.”(이영림)

둘은 작업할 때 수많은 대화를 나눈다. 각자 느낀 바를 얘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치고, 정리하고, 다시 고치는 작업의 반복이다. “대화하면서 감독님의 ‘10원어치’ 늘리는 세밀한 작업을 계속했죠. ‘10원어치’란 표현은 우리만의 은어예요. 하하.”(이영림) <밤의 문이 열린다>를 편집할 때도 이영림은 놀랄 때가 많았다. “편집기사는 그림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일하잖아요. 이 작품에서 몇몇 신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작업했어요. 장면이 주는 엄청난 기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이영림)

유은정 감독은 이영림 편집기사의 편집을 “영화가 다시 연출되는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촬영의 결과물은 어떻게 보면 조각조각 나 있잖아요. 선생님은 그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흐름을 만들면서도, 제가 전달하고 싶은 바를 놓치지 않으세요.”(유은정) 유은정의 꿈은 한 번쯤 로버트 저메키스의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1988)처럼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혼합한 형식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영림 편집기사가 편집하는 전쟁 영화를 보는 것. “다이내믹한 장르에서도 인물 개개인을 잘 표현해줄 것 같아요.”(유은정)

이영림 편집기사는 그저 어떤 영화나 장르를 맡아도 재미있게 만들어내는 것이 소망이다. 그리고 편집과 같은 후반 작업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작업량을 산정하기도 힘들고 명확한 기준도 없어 시간이 걸리는 문제일 거예요. 표준 근로계약서 같은 제도도 뒷받침돼야 하지만, 일하는 파트끼리 서로 정리도 필요해요. 점차 환경이 개선되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이영림)

전고운 감독과 권현정 음악감독

전고운이 입은 화이트 블라우스는 잉크(Eenk), 귀고리는 러브미몬스터(Lovememonster at HAGO). 권현정이 입은 드레스는 분더캄머(Wnderkammer).

권현정 음악감독은 전고운 감독이 속한 독립 영화 제작사 ‘광화문시네마’의 거의 모든 작품을 작업했다.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2013), 이요섭 감독의 <범죄의 여왕>(2016),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2017)와 <페르소나-키스가 죄>(2018)도 함께 했다. 전고운 감독이 권현정 음악감독과 함께 하는 이유는 위로 때문이다. “영화를 찍고 편집을 하면 유리처럼 깨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밖에 못 찍나 자괴감에 너덜너덜해지죠. 그런 상태로 찾는 것이 음악이에요. 음악은 ‘별로 안 못생겼어’라면서 화장을 해주고 위로해주죠. 제가 영화에 구멍을 이만큼 내놨다면 음악이 그걸 메워줘요.”(전고운)

권현정 음악감독은 <소공녀>의 시나리오를 읽고 한눈에 반해 참여했다. “우선 글을 너무 잘 쓰는 감독이에요. 보통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음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데 <소공녀>는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감독님도 원하는 컨셉이 분명했고. 특히 서로 하고자 하는 바가 비슷했죠. 그에 비해 작업이 수월하진 않았어요. 어떻게 더 잘 쓸지 고민이 많았거든요.”(권현정)

“제가 글을 쓸 때 느끼던 어려움과 비슷한 걸 거예요. <소공녀>는 작품 레퍼런스를 찾기 힘들었거든요. 아예 진지한 독립 영화도 아닌데 분위기는 가져가야 하고 코미디는 아닌데 블랙코미디 같고, 톤을 잡기가 어려웠어요. 음악은 그걸 마무리해줘야 하니 어려웠을 거예요.”(전고운) 전고운 감독이 음악의 힘을 느낀 부분은 <소공녀>에서 미소(이솜)와 한솔(안재홍)의 계단 키스 장면이다. “음악을 넣겠다는 생각을 못했고 오히려 장면을 뺄까 고민했는데, 언니가 음악을 보내왔어요. 음악을 입히는 순간 너무나 짠한 장면으로 등극했어요. ‘이게 음악감독의 역할이구나’ 절실히 깨닫고 완전 존경하게 됐죠.”(전고운)

전고운 감독은 자신이 별난 사람이라서 존중할 수 있는 사람과 일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기본적으로 이 사람이 센스가 좋다고 생각해야죠. 언니는 음악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어요. 특히 피아노 연주로 드라마틱한 음악을 정말 잘 만들어요. 결이 다른 <범죄의 여왕> 같은 코믹 스릴러 음악도 써내는 걸 보면 신기하고요. 그만큼 예민하고 감각적인 사람이죠. 우린 쿨의 온도도 잘 맞아요. 작업을 다시 해달라면 상처받을 수 있잖아요. 언니는 절대 그러지 않아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막 이래 볼까 저래 볼까 하면서 시너지가 나잖아요. 그런 작업이 참 즐거워요. 하지만 결국 자신이 인정을 받아야 더 즐겁겠죠? 그래서 저는 ‘<소공녀>의 촬영이 좋았다, 음악이 좋았다’라는 말이 기뻐요. 영화는 감독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기에 저만 과한 칭찬을 받는 거 같아요. 스태프에게도 관심이 분산됐으면 좋겠어요.”(전고운)

권현정 음악감독은 전고운 감독과 차기작도 함께 하고 싶다. “음악은 소통이 어려운 작업인데, 고운 감독님은 명확하게 피드백을 해주는 편이에요. 또 <소공녀>에서 ‘즐거운 나의 집’ 음악이 깔리는 장면을 보면 어쩜 연출을 그렇게 했을까 대단해요.”(권현정)
“저는 배우나 스태프에게 다음에 또 하자고 안 해요. 제가 다음 작품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무책임한 말 같아요. 그냥 마음에 간직했다가 작품이 확정되면 연락하죠. 꿈이 있다면 제게 힘이라는 게 생겨서 언니를 체코 같은 멋진 곳에 보내 교향악단과 녹음하게 돕는 거예요. 언니가 얼마나 행복해할까… 그 모습을 보고 싶어요.”(전고운)

김일란 감독과 최의경 음악감독

김일란이 입은 터틀넥은 코스(Cos), 팬츠는 미샤(Michaa), 로퍼는 레이첼 콕스(Rachel Cox). 최의경이 입은 터틀넥은 자라(Zara), 부츠는 레이첼 콕스.

최의경 음악감독은 김일란 감독의 <마마상>(2005), <3×FTM>(2008), <두 개의 문>(2011), <공동정범>(2016)을 비롯해 그가 프로듀싱한 <레즈비언 정치도전기>(2009), 그가 활동하는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거의 모든 작품에 참여했다. 둘은 사적으로는 거의 만나지 않지만 작품에서는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 만남은 1993년 각자 대학교에서 영화 동아리 활동을 하던 때다. “그때 일란이가 자기 학교에 영화 동아리를 처음 만들었어요. 저는 늘 얹혀가는 사람이었기에 일란이가 동아리도 직접 만드는 걸 보며, 원하는 바가 확실하고 그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같았어요. 그 뒤로도 삐쩍 마른 친구가 척박한 곳에서 열정적으로 움직이더라고요. 딱 제가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마마상> 이후 일란은 제게 꾸준히 일을 주고 있어요. 제가 그를 믿듯 저에게 믿음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저도 그에 부합하는 수준의 음악으로 대답하고 싶어요.”(최의경)

<두 개의 문>의 음악은 영화지에 그 평이 실렸다. 그만큼 김일란 감독의 다큐멘터리 특징 중 하나는 음악이다. “의경이가 보내준 음악 덕분에 망설이던 것을 결정하기도 해요. <두 개의 문>은 여러 부담과 시도가 점철된 작품이에요. 그중 하나가 음악이죠. <두 개의 문>에서 경찰이 망루 안으로 진입하는 장면에서 음악을 넣을지 말지 감이 안 왔어요. 너무 극적인 장면이라 음악이 과할 수 있거든요. 의경이가 작곡해 보낸 음악은 장르적이고 드라마라 고민이 더해졌죠. 최종적으로 쓰길 잘했어요. 망루 진입 장면은 영화의 톤을 결정하는 결정적 장면인데, 의경의 음악이 압정처럼 눌러주죠. <3×FTM>에서도 인터뷰를 조밀하게 걸쳐놓는 장면이 있는데, 의경이 음악을 보내왔어요. 처음엔 코믹했어요. 그런데 의경이 ‘말의 리듬감이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아 그 리듬과 음악을 교차’해봤대요. 이 장면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구나 놀랐죠.”(김일란)

최의경 음악감독에게 ‘다큐 음악은 이래야 한다’는 공식은 없다.“한국은 휴먼 다큐, 자연 다큐, 정보 다큐가 대부분이에요. 특히 휴먼 코드가 빠지지 않다 보니 음악이 과하게 들어가고, 방송에선 작곡보다 선곡도 많죠. 보통의 독립 필름은 굉장히 절제되어 있어 음악을 넣으면 강요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기 넣든, 저기 넣든 상관없는 드라이한 음악이 들어가죠. 물론 연출자 의도가 있겠죠. 하지만 저는 관객의 눈으로 보며 그저 ‘이 음악이 여기 들어가면 죽일 것 같다, 재미있겠다’란 생각으로 작업해요.”(최의경)

최의경 음악감독은 본래 <방귀대장 뿡뿡이>와 <뽀롱뽀롱 뽀로로> 같은 방송에서 주로 활약한다. 그가 빠듯한 스케줄에도 다큐멘터리 작업에 매진하는 이유는 사회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작업은 돈 벌려고 하지 않잖아요. 아는 사람이 부탁해서기도 하고, 사회의 부채 의식을 덜고 싶어서기도 하죠. 저는 주도적이지 않기에 열정적인 활동가를 무한 존경해요. 일란도 그중 한 명이죠. 그가 하는 의미 있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최의경) 김일란 감독은 역시 <두 개의 문>처럼 실험 영화를 고민 중이다. 최의경은 그것도 좋지만 다른 방향도 제안해본다. “의미도 사건 기록도 중요하지만 다른 할 말도 많잖아요. 무거운 작업도 필요하지만 유튜브 찍듯 가볍고 유머 감각 있는 다큐를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술 먹고 밥 먹을 일은 없어도 그 작업은 또 함께 하길 바라요.”(최의경)

김보라 감독과 홍지수 조감독

김보라가 입은 화이트 셔츠와 팬츠는 포츠 1961(Ports 1961), 귀고리는 아카이브앱크(Archivepke), 앵클 부츠는 앤아더스토리즈(& Other Stories). 홍지수가 입은 블랙 코트는 로에베(Loewe).

지금 가장 뜨거운 영화는 <벌새>(2019)다. 베를린 영화제 등 25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거나 후보에 오르며, 9월 중순 기준 5만여 명의 관객을 모으고 있다. <벌새>는 김보라 감독의 <리코더 시험>(2011)을 장편으로 확장한 영화로, 김일성이 사망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을 사는 중학생 은희(박지후)의 성장을 담는다. 6년여 동안 적은 예산과 주변의 우려를 이겨내고 영화를 개봉한 김보라 감독은 그 덕을 연출 팀으로 돌린다. 오디션과 로케이션도 함께 한 스크립터 구세미와 조감독 홍지수는 김보라 감독이 2011년부터 출강하던 학교의 제자다. “김보라 교수님의 수업은 굉장한 인기였어요. 영화를 보는 시선을 확장시켜주셨거든요. 당시 <벌새>를 제작한다는 소식에 학생 대부분이 참여하고 싶어 했어요. 운 좋게 제가 <벌새>를 하며 하루하루 열병을 앓듯 보냈어요. 사람이 무언가에 마음을 너무 쓰면 뜨거워지잖아요. 어떻게 이 정도로 뜨거울 수 있나 의아할 정도였어요.”(홍지수)

“왜 이 친구를 조감독으로 함께했는지 생각해보면, 끝까지 포기 안 할 것 같았어요. 이 정도 예산에, 시대극에, 주변에서 만들어질까 의심도 많은 작품이라 그런 친구가 필요했거든요. 지수는 사랑으로 끝까지 해내리란 걸 본능적으로 느꼈어요. 찍으면서 서로 애인처럼 울면서 얘기한 적도 있어요. 자기는 이 영화에 크레딧도 돈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사랑해서 하는 거고, 이 영화를 세상에 보여주길 바랄 뿐이라고요.”(김보라)

<벌새>에는 중학생 은희가 유일하게 믿는 어른, 영지(김새벽)가 나온다. 홍지수 조감독에겐 김보라 감독과 <벌새>가 그런 존재다. “은희가 순간마다 흔들리고 그게 쌓이고 쌓이잖아요. 제가 <벌새> 조감독을 하면 저도 계속 흔들릴 것 같았어요. 모든 순간을 봐야 하니까요. 감독님 덕에 이겨냈어요. 감독님은 어떤 결정을 앞두고 저와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사실 저뿐 아니라 스태프들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감독님이기에 모두가 <벌새>를 함께 한다는 감정을 가질 수 있었죠. 또 감독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촉수가 있는 것 같아요. 배우의 컨디션, 스태프의 분위기, 공기의 흐름까지 무서우리만치 잘 느껴요. 감독님을 보면서 저는 촉각을 세우고 있는지 거짓말인지 돌아보게 되죠.”(홍지수)

김보라 감독은 한국 영화가 주목받는 지금을 스태프들이 그저 누렸으면 한다. “홍지수 조감독은 제가 자제시킬 정도로 <벌새>에 애정이 많고 그만큼 아팠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벌새>가 잘되는 걸 누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살면서 일할 때 애정을 갖고,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중요해요. 저도 스태프로 일할 때 ‘내가 저 사람을 위해 일한다’가 아니라 ‘이만큼의 몫은 내가 주인’이란 마음으로 일했거든요. 이 친구뿐 아니라 연출부 모두가 그렇게 <벌새>를 대했어요. 하지만 가족 관계가 힘들듯 너무 사랑하기에 힘든 순간도 있었죠. <벌새>를 하면서 사랑의 정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지수도 다른 영화를 하면 더 알게 되겠죠. 하지만 사랑이 없는 것보다는 넘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김보라)

홍지수 조감독은 단편 <나의 기념일>(2016)에 이어, 또 다른 독립 영화를 준비 중이다. “좋은 이야기를 갖고 있어도 <벌새>처럼 진심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해요. 하지만 결국 해내는 김보라 감독님을 보며 용기를 얻어요.”(홍지수)

이언희 감독 / 정지영 사운드 디자이너

이언희가 입은 롱 드레스는 코스(Cos), 재킷은 로우클래식(Low Classic), 슈즈는 레이첼 콕스(Rachel Cox). 정지영이 입은 셔츠는 자라(Zara), 트렌치 코트는 로우클래식, 부츠는 H&M.

이언희 감독은 <미씽: 사라진 여자>(2016)에 내린 좋은 평가는 상당 부분 정지영 사운드 디자이너의 몫이며, 차기작 <탐정: 리턴즈>(2018) 역시 그에게 기대 이상의 보답을 받았다고 말한다. “정지영 사운드 디자이너는 제가 의지하고 위안을 받는 스태프예요. 무엇보다 제가 틀렸다고 냉정하게 얘기해주는 친구죠. 감독은 기술적 면도 부족하고, 한 인생만 살아가기에 영화를 보는 시각도 편협할 수 있잖아요. 그는 사운드 디자이너로서 전문적일뿐더러 영화 전반에 지식이 해박해요. 그의 조언은 늘 유용하죠. 스태프의 능력이 감독의 빈 곳을 채우기에 무척 중요한 선택이죠. 처음 시작은 친분 때문일지 몰라도 계속 그와 작업하는 이유는 제가 도움을 받기 때문이죠. 함께 작업할수록 그의 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에 매번 감탄하고 자극을 받아요. 감독으로 일하면서 상황에 치이고 스스로 실망할 때가 많은데, 저보다 훨씬 쉽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작업환경에도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면 제가 부끄러워지고 힘을 내게 돼요. 그녀의 재능이 좀더 인정받아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길 바라요.”(이언희)

“일단 언니는 제가 재미있어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요. 관객으로 <…ing>(2003)도 <어깨너머의 연인>(2007)도 좋았어요. <미씽: 사라진 여자>는 온전히 관객 입장일 순 없었지만 시나리오부터 정말 흥미로웠죠. 무엇보다 이언희 감독은 창작자로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이에요. 생각 외로 그런 감독이 별로 없어요. 어떻게 하면 관객이 많이 들지 고민하죠. <미씽: 사라진 여자> 때 극적으로 슬픈 장면을 만들어내자는 의견을 두고 언니가 생각이 많았어요. 상황을 보여주면 되지, 이렇게까지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하면서요. <탐정: 리턴즈>에서도 주인공인 두 남성이 무서운 아내에게 치이면서 코미디가 발생하는데, 아내가 악역이 될 수밖에 없음에도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감독은 제게 언니가 유일해요. 영화는 감독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그렇기에 이런 감독의 태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정지영)

둘은 95학번과 96학번으로 만난 오래된 사이인 만큼 인터뷰에서는 서로의 칭찬을 못 견디며 계속 농담을 한다. 그러나 이언희 감독이 정지영 사운드 디자이너에 대한 고마움을 따로 에디터에게 장문으로 보내왔듯 연대가 깊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여성이라는 동지애를 물었을 때도 그랬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자와 남자로 나뉘는 일이 많잖아요. 또 영화라는 매체가 시선과 해석의 작업이잖아요.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도 맞춰야 하는 것이 힘들죠. 어떤 이슈가 있을 때 같은 방향으로 보는 동료가 있어 든든해요.”(이언희)

이언희 감독은 지난 작품에서 보여줬듯 앞으로도 여성이라는 자신의 성별에서 나온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관객이 많아지길 바란다. 정지영은 후반 작업을 하는 스태프의 처우 개선에 관심이 많다. <기생충>이 “밥때를 너무 잘 지켰다”로 화제가 됐지만, 현장 스태프 외에 사운드 믹싱 같은 후반 작업 분야는 아직 갈 길이 멀다. “20여 년 일하면서 임금이나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근로시간이나 임금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기에 젊은 스태프들 사이에 노조를 준비하고 있어요. 저도 힘 닿는 대로 응원하고 있어요.”(정지영)

 

이정향 감독과 김양희 음악감독

이정향이 입은 셔츠는 로우클래식(Low Classic). 김양희가 입은 셔츠는 로우클래식.

둘의 만남은 운명에 가깝다. 이정향 감독은 <미술관 옆 동물원>(1998)의 시나리오를 심사받던 자리에서 혹평을 들었다. 그중 한 명만이 왠지 자신과 통할 것 같아 연락했고, 그는 “사실 나는 좋았는데,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라고 했다. 바로 김양희 음악감독이다. 그는 당시 첼로를 전공한 오케스트라 수습 단원이었다. 영화를 좋아해 지인의 시나리오 모임에 우연히 참가한 것이다. 무엇이든 좋으니 영화 일을 하고 싶다는 김양희 음악감독에게 이정향 감독은 평생 여섯 편의 영화를 하자고 제안한다.

“제가 죽을 때까지 여섯 편 이상 영화를 하겠어요? 평생 함께 가자는 뜻이죠. 양희 씨는 당시 1년만 더 하면 오케스트라 정단원이 되는데 워낙 영화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어요. 엄청난 재능이 있으리란 느낌도 왔고요. 그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 영화가 돼야 한다고 얘기해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지금도 저는 시나리오 완고되면 딱 두 사람에게만 보여주는데 김양희 음악감독이 그중 하나죠.”(이정향)

둘이 함께 각색한 <미술관 옆 동물원>은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다. “돈이 없어서 편의점에 있는 모카라테를 실컷 사먹고 싶다고 말하던 시절이었어요. 1997년 12월에 시나리오 당선 소식을 듣고는 그 추운 날에 차가운 모카라테를 함께 마시며 기뻐했죠.”(김양희)

이정향은 <미술관 옆 동물원>을 제작하는 영화사에 찾아가서 김양희 음악감독과 작업하겠다고 선언했다. “신인 감독이 뭘 믿고 또 다른 신인을 들이미냐고 그러더군요. 제가 그랬죠. 김양희는 음악도 50, 영화도 50의 식견을 가진 친구다, 음악만 100이고 영화를 모르면 소용이 없다고요. 이 친구랑 죽어도 하겠다는 저를 말릴 수 없었죠.”(이정향) 그 후에도 음악만큼은 전적으로 김양희 음악감독에게 맡긴다. “제가 음악을 좋아하고 조금 안다고 생각하지만, 김양희 음악감독에게는 절대 간섭하지 않아요. 시나리오를 던지며 ‘이렇게 할 거예요’라고 한마디 할 뿐. <집으로> 때 딱 한 번 요구했어요. 상우(유승호)의 머리를 할머니가 잘라주는 장면에서 휘파람처럼 경쾌한 음악을 원한다고 했죠.”(이정향)

김양희 음악감독은 늘 자신을 믿어주고 “성실한 천재”라고 평해주는 이정향 감독이 고맙고, 그로써 스스로 변했다고 말한다. “연주자일 때도 늘 떨려 하고, 제 능력에 소심했어요. 저를 믿어주고 손을 내밀어준 감독님 덕분에 조금씩 나서게 된 것 같아요.”(김양희)

100명의 영화감독이 한국 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옴니버스 형태의 100초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에서 김양희 음악감독이 프로듀서로 데뷔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정향 감독은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소년의 모습을 통해 삶을 비추는 영화 <100원의 무게>를 준비하면서 김양희 음악감독에게 프로듀싱을 제안했다. “제 시나리오를 함께 모니터링하던 날 양희 씨가 갑자기 프로듀서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물론 훌륭히 해냈죠. 영화 소품인 음식물 쓰레기도 직접 만들어올 만큼 애썼고, 특히 ‘100원의 힘’이었던 영화 제목을 ‘100원의 무게’라고 기가 막히게 바꿔줬죠. 제가 잘난 척하자면 캐스팅을 정말 잘해요. 배우를 볼 때도 대사를 읽어보라 하지 않고 같이 수다를 떨어요. 이 배우가 충분히 해내겠다 아니다란 느낌이 오죠. 감독은 자기 재주는 별로 없잖아요. 재능 있는 사람을 고르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사기를 올려주고, 그 재능을 균형 있게 버무리는 게 감독이 지녀야 할 재주입니다.”(이정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