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100주년, 여배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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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100주년, 여배우론

2019-10-10T14:08:43+00:00 2019.10.07|

배우는 시대의 얼굴이다.
김혜수, 전도연, 문소리, 손예진, 김고은, 김태리.
영화 평론가와 아티스트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들의 매력을 해석하다.

김혜수

아버지는 또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트셨다. 속상했다. 90년대 중반이었다. 일요일 아침 드라마는 전국의 모두가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요 아침 드라마는 <한지붕 세가족>의 후속으로 시작된 MBC의 <짝>이었다. 항공기 승무원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이 가벼운 가족 코미디 드라마는 가히 현대적이었다. 90년대는 지상파 드라마가 보다 현대적인 시도를 하던 시기다. <짝>은 가족이 함께 보는 코미디 드라마이면서도 동시에 트렌디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열풍을 이끌고 가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KBS의 농촌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트셨다. 이쯤 되면 일요일 아침마다 ‘오늘은 <짝>을 볼 수 있을까?’ 숨을 죽이던 당시의 내 기분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짝>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김혜수라는 이름.

당시의 김혜수는 이미 스타였다. 그는 <짝>으로 겨우 27세의 나이에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전 국민이 그를 아꼈다. 한국에서 아역 배우로 시작해 무사히 성인 연기자로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예를 한번 떠올리려 노력해보시라. 80년대 김혜수는 하희라, 김혜선, 이상아 등과 함께 전국 학생들의 책받침이 되던 당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였다. 80년대에는 좋아하는 스타의 사진을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쓰는 게 유행이었다. 김혜수는 한동안 나의 책받침이었다. 당대의 김혜수는 아름다운 소녀의 어떤 상징 같은 존재였다. 전국의 많은 학생이 그의 얼굴을 보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끝냈다. 시간이 30여 년 지난 지금, 압도적인 스타로 살아남은 ‘책받침 스타’들은 거의 없다. 그건 하이틴 스타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재능과 이미지로 잠깐 불타오른 뒤 잊힌다. 김혜수는 잊히지 않았다. 그는 안전하게 브라운관 속의 직업적 배우로 경력을 이어나가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도전했다.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으로 무사히 충무로에 안착한 그는 <닥터 봉>으로 흥행 배우의 대열에 올랐지만 그 뒤로는 그만저만한 영화와 그만저만한 성적이 이어졌다. 흥행은 중요하다. 당신이 ‘스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면 그건 그만한 금전적 가치가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혜수는 그걸 꼭 입증해야만 했다. 그는 <얼굴 없는 미녀>와 <분홍신> 같은 장르 영화에 도전한 뒤 자신의 가치를 완벽하게 입증한 <타짜>로 마침내 오래 기다리던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도둑들>과 <관상>의 성공이 이어졌다. 이건 꽤 놀라운 일이다. 전 국민이 사랑하는 소녀로 시작해 드라마의 세계를 정복한 뒤 무비 스타로서 아우라를 계속 지켜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미션에 가깝다. 김혜수는 그걸 해냈다.

더 놀라운 건 김혜수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015년 작 <차이나타운>과 2017년 작 <미옥>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누아르 영화다. 이런 영화는 마치 “왜 송강호와 설경구가 하는 것을 여성 배우는 할 수 없지?”라고 관객에게 외치는 듯한 도전이다. 김혜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여성 배우들이 해내지 못하던 역할을 하나씩 하나씩 격파해나가는 데 자신의 견고한 스타성을 이용하고 있다. 먼 훗날 누군가가 한국의 ‘고전 스타’에 대한 책을 써낸다면 김혜수라는 이름은 80년대에서 시작해 90년대와 2000년대, 2010년대를 거쳐서도 계속 챕터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무이한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김도훈(<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엄유정 드로잉과 페인팅 작업을 기반으로 작업한다. 2019년 디뮤지엄의 <I Draw>전에 참가하고, 2017년 소쇼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를 출간했다. “예쁜 사람은 잘 못 그려서 좀 어려웠지만 김혜수 배우를 좋아하던 터라 수많은 습작을 거쳐 완성할 수 있었다.”

 

 

전도연

배우 전도연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규정하면 할수록 수식어만 구차해질 따름이다. 오랫동안 전도연은 ‘칸의 여왕’으로 불렸다. <밀양>(2007)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고, 한국 배우 최초로 칸영화제 심사위원까지 맡는 영예를 누렸으니 그렇게 호명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간편하다. 전도연이란 이름은 그 범주를 넘어선다.

전도연은 감독이라면 꼭 한 번쯤은 같이 일해보고 싶은 배우일 것이다. 배우가 감독의 세계를 창조하는 가장 결정적인 도구라면, 전도연은 말간 도화지에 가깝다.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채워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도연’ 하면 특정한 이미지가 즉각적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것은 매번 새로운 캐릭터를 입어야 하는 배우에게는 커다란 호재이자 더할 나위 없는 미덕일 것이다. 전도연은 작품을 만날 때마다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깎아내고 도려낸다. 감독들이 그와 협업하길 원하고 도전 의식을 가질 만하다. ‘전도연의 새로운 얼굴을 또 한 번 발명해내고 말겠다’와 같은 느낌이랄까.

90년대 초∙중반 주로 트렌디한 TV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전도연은 영화 데뷔작 <접속>(1997)을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한다. 첫 주연을 맡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배우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 티켓 파워도 파워지만 스크린을 꽉 채울 만한 존재감을 입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TV 드라마에서 아무리 인기 있고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해서 누구나 스크린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크린이 사랑하는 얼굴은 또 따로 있다.

전도연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착하고 사려 깊은 <접속>의 수현을 특유의 힘 뺀 일상 연기로 소화해낸다. 그전까지 팬시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사랑받아온 전도연에게 현실감과 성숙함을 더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전도연은 이 캐릭터를 보다 극적으로 강화한 <약속>(1998)을 통해 멜로 퀸으로 등극한다.

재미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전도연의 행보는 그리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 <약속> 이후 <내 마음의 풍금>(1999)에서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열일곱 살 늦깎이 초등학생을 연기하더니, 정지우 감독의 치정극 <해피 엔드>(1999)로 훌쩍 건너뛴다. 여기서 전도연이 맡은 역할은 대학 시절의 연인과 불륜 관계인 유부녀이자 남편을 무시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다. 전도연은 대중이 사랑스러워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배반하는 길을 택한다. 얼마든지 더 안전한 길을 누릴 수 있었지만, 울타리 밖으로 탈주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대중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원하는 길로 나아가겠다’는 아티스트로서의 선언과도 같다.

이후에도 전도연의 발걸음은 그 진폭이 드라마틱하다. 수더분한 멜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를 경유한 뒤, 류승완 감독의 누아르 액션 <피도 눈물도 없이>(2002)로 방향을 급격히 튼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속 발칙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다시 동화 같은 <인어 공주>(2004)의 세계로,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신파 <너는 내 운명>(2005)의 다방 여자 은하가 된다. 그리고 배우로서 전도연을 또 한 번 도약하게 만든 <밀양>의 신애와 뜨겁게 만난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필요에 의해 창법을 바꾸는 것처럼, 운동선수가 기량을 위해 쓰지 않던 근육을 발달시키는 것처럼, 이창동 감독과 만난 전도연은 자신의 새로운 얼굴을 꺼내 쓴다. 그 과정은 영화 속 아이를 잃은 신애의 사연만큼이나 묵직하고 지난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배우가 캐릭터의 아픔을 통과하는 것을 보았다’에 가깝다. <밀양>과 전도연이 남긴 ‘고통 체험의 풍경’은 아직도 선연하다.

전도연은 <밀양>을 통해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의 자리에 우뚝 섰지만, 그가 택한 차기작은 이윤기 감독의 소품 같은 로드 무비 <멋진 하루>(2008)였다. 이쯤 되면 전도연이란 배우의 욕망을 우리가 감히 안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하녀>(2010)의 은이, <무뢰한>(2014)의 김혜경, <남과 여>(2015)의 상민, <생일>(2018)의 순남 등 전도연이 우리에게 남긴 캐릭터들을 하나씩 곱씹어본다. 전도연이기에 가능한 인물들이지만, 동시에 어느 하나 딱히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다. 전도연은 늘 자기 자신을 넘어서듯 연기해왔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캐릭터라는 집을 짓고, 그것을 미련 없이 부수고, 또다시 새로운 집을 짓는 과정을 거친 것 같다. 이 방식은 치열하고 대담하다.

한국 영화의 생태계가 전도연만큼 역동적으로 변한다면, 그가 짓는 집은 더 다종다양해질 것이다. 여전히 전도연에게서 보고 싶은 얼굴이 많다.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훗한나 문장에서 시작되는 이미지,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를 엮는 작업을 한다. 열린책들의 예술서 전문 브랜드인 미메시스에서 그래픽 노블 <파더 판다>를 출간했다. “영화에서 강렬한 장면 사이를 연결하는 무표정한 모습을 담고 싶었다. 그 안에서 전도연은 캐릭터이면서 배우 전도연이기도 하다.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에서 배우가 갖는 힘이자 매력이라 생각한다. 아, 그리고 정말 완벽한 이마를 가진 사람이다.”

 

문소리

박찬욱, 이창동, 장률, 홍상수. 한국 영화의 작가주의 감독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2000년대 초반에 한국 영화계에 소개된 장률을 제외하면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활동을 시작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기를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고유의 방식으로 유효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 영화사에 이들이 남긴 족적과 영향을 생각하면 많은 배우가 이들의 영화 세계에 뛰어들고 싶어 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만약 어떤 배우가 서로 완전히 다른 방식과 세계관으로 자신의 영화 영토를 구축한 이들 감독의 영화를 오간다면, 그것은 감독의 연기 연출이 탁월해서라기보다는 전적으로 그 배우의 역량과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배우 문소리다. 또 누가 있는가. 다른 이름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문소리는 (놀랍게도) 데뷔작인 <박하사탕>(1999)에 이어 <오아시스>(2002)로 이창동의 리얼리즘적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박하사탕>의 순임은 영호(설경구)의 절규 어린 외침, “나 다시 돌아갈래!”가 끝내 가닿기를 바라던 과거의 아름다운 시절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순전하고 귀하던 사랑은 이제 완전히 끝났음을 상기시킨다. 꾸밈없는 천연의 얼굴 순임을 보면서 ‘도대체 저 배우는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가’ 묻게 하던 문소리는 곧장 <오아시스>의 더없이 강렬한 인물 공주가 돼 연기에 대한 놀라운 몰입을 보여준다. (이 영화로 문소리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한편 눈에 보이는 것, 눈으로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을 제대로 보는 것에 영화적 진실이 있다고 말하는 듯한 홍상수의 세계 속 문소리는 어떤가. <하하하>(2009), <다른나라에서>(2011), <자유의 언덕>(2014)으로 이어지는 작업에서 문소리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톡 쏘는 듯한 말투로 생활의 활기를 낚아채는 인물이었다. 생(生)은 좋은 때에도 크든 작든, 세차든 여리든 죽음의 기운이 어른댄다고 여기는 듯한 홍상수 영화에서조차 문소리는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주눅 들지 않은 채 유쾌한 웃음과 활력이 깃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때때로 복받치는 설움과 화와 장난기를 터뜨리지만, 기본적으로 건강한 기운을 잃지 않는 선에서 그러해 보인다.

완벽히 설계된 이야기와 미감의 세계로 배우를 들이는 박찬욱과의 작업은 <아가씨>(2016)가 처음이다. 문소리는 남성들의 뒤틀린 욕망으로 가득한 코우즈키(조진웅)의 저택에 감금된 채 옴짝달싹 못하는 히데코(김민희)의 이모로 등장한다. 신경질적이다 못해 착란의 상태에 이른 게 아닐까 싶은 이모의 모습은 문소리 특유의 기민한 몸놀림과 날이 잔뜩 선 얼굴과 딱 붙어 있다. 장률의 <필름시대사랑>(2015),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에서의 문소리는 감독의 전작에서 보던 여성 캐릭터들과 비교했을 때 자기 기운이 세고 주도적인 면모가 도드라지는 경우로 보인다. 그러니까 앞선 영화에서 문소리가 딱 등장하면 배우 본연의 기세가 상당 부분 캐릭터로 옮겨가 영화의 기세와 기운으로 떡하니 자리 잡는 것이다.

특정 감독의 작품 세계를 통해 문소리의 연기를 이야기해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문소리는 능청스럽고 우직하게 일상적인 이야기에 파격과 일격의 순간을 마련한다. <바람난 가족>(2003)의 호정이 파격에 가까웠다면 촌스럽고 억척스러우며 생활력 강한 <사랑해, 말순씨>(2005)의 말순, 순진한 듯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강단 있는 <가족의 탄생>(2006)의 미라, 생활상의 어려움을 한껏 짊어지고 마지막 경기에 임하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의 핸드볼 선수 미숙 등은 평이한 일상에 일격을 가하며 리듬과 유머와 감동을 만들어낸 경우다.

심지어 문소리는 자신의 세계를 다른 방향에서 확장해가기까지 한다. 그간의 영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여배우는 오늘도>(2017)를 직접 연출해 개봉한다. 감독 문소리는 배우 문소리를 둘러싼 세간의 고정관념, 이미지, 평가 등을 영화의 이야깃거리로 용감하게 끌고 오고 극 중의 배우 문소리를 직접 연기하기까지 한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 어디쯤 놓인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극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를 통해 문소리는 영화에 배우 자신이 반영된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를 탐문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문소리는 배우와 감독 각각의 세계와 그 접점에 관해 묻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해서까지도 질문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배우로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건 기본이고 배우의 역할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연출의 메커니즘까지 공부해 자기화하는 배우가 얼마나 있을까. 문소리가 그것을 하고 있다. 심지어 잘. 그런 면에서 문소리는 보기 드물게 독보적이다.

정지혜(영화 평론가)

 

정미향 프랑스에 머물며 푸른색 안료를 사용한 단색 평면 회화 위주의 작업을 한다. 2016년에 출간된 <소품문집>에서 그림에 숨겨둔 심상을 시와 산문으로 풀어냈다. “그녀의 연기는 서슬 퍼런 날이 느껴진다. 눈동자를 둘러싼 뼈와 살갗의 또렷한 곡면이 직선보다 첨예하고 날렵하게 느껴지는 까닭일까. 그 어떤 캐릭터에도 유연히 스며들되 저마다 날카로움을 찾아내 찰나의 섬광처럼 번뜩이는 연기를 펼쳐내는 명민한 그녀를 부드럽고도 강렬한 획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손예진

<연애소설>(2002)과 <클래식>(2003). 두 편의 러브 스토리에 출연한 손예진은 단번에 눈길을 끌었다.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 있는, 이영애와 심은하, 전지현 등등 아름답고 청순한 미녀의 계보를 이을 만한 배우였다. 약간의 비극이 섞인 투명하고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에는 늘 청순한 미녀가 필요했다. 세상의 어떤 괴로움과 슬픔도 씻어줄 만큼 순수한 여인. 손예진의 얼굴, 이미지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리고 <겨울 연가>(2002)로 일본에서 1차 한류 붐을 일으켰던 윤석호 PD의 <여름 향기>와 일본에서 가장 좋아한 한국 멜로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손예진이라는 배우는 청순함 하나만으로도 영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외출>에서 손예진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로 한국 멜로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허진호 감독의 <외출>은 어른의 사정을 그린 영화였다. 불륜을 저지른 남녀가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고 깨어나지 못하는 병원에서 배우자들인 인수와 서영이 만난다. 배신을 당한 입장에서, 서로를 비난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는 미묘한 입장에 놓인 그들. 배신감과 절망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어쩌면 순간이었을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 놓인 남녀의 공감 속에서만 가능하던 찰나. 하지만 사랑이 아니어도, 그들은 서로에게 절실했다. 서영을 연기한 손예진은 청순의 덫에 걸리지 않았다. 그림자 속에서 여전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리고 <작업의 정석>(2005)은 손예진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영화다. 절대로 걸작은 아니지만, 손예진의 매력이 대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준 영화. 연애 절대 고수인 지원이 역시 작업의 고수를 만나 벌이는 사랑 이야기. 손예진이 연기하는 지원은 그야말로 여우다. 남자 앞에서 어떤 표정이 필요한지, 어떤 대사를 날리며 고개를 돌려야 하는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흔들어대는 모든 것을 알고, 구사한다. 너무나도 어리석고 한심해 보이지만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은 지원의 내숭을 보는 순간 하나의 세계로 통합된다. 거짓이어도 믿는다.

<아내가 결혼했다>(2008)의 주인아를 연기하는 손예진을 볼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아내가, 난데없이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 터무니없는 말인데도, 주인아가 가까이 다가와 어리광을 피우며 귀에 속삭이면 다 들어주고 싶어진다. 하늘의 별을 따달라는 소원이나 지옥에 가서 누구의 영혼을 가져와달라는 명령일지라도. 남자의 모든 것을 꿰뚫고 조종할 수 있는 악녀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녀, 손예진은.

어디 그뿐인가. 한지승이 연출한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청순도, 내숭도 아닌 우리 일상에 존재할 것 같은 최상의 여자다. 은호와 동진은 이혼했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로 만나고 있다. 사실은 감정도 남아 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마음먹은 대로 쉽게 풀려나가지 않는다. 좋아해도, 사랑해도 어긋나거나 파탄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소하게 쌓이는 감정, 서서히 멀어져가는 순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이룰 수 없는, 돌아오지 않는 무엇을 그리워하면서. 손예진은 <연애시대>로 증명했다. 단지 미모나 톡톡 튀는 매력만으로 승부하는 배우 이상이라는 사실을. 더 많은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때로는 미모가 방해가 되기도 한다. 쉽게 드러나는 매력 때문에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무방비 도시>(2007),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오싹한 연애>(2011), <타워>(2012), <공범>(2012),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간혹 안타깝다. 손예진은 연기파 배우로 평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력은 분명히 뛰어나다. 손예진의 잠재력이 터질 수 있는 작품을 미리, 더 많이 만났다면 지금 어떤 배우로 가고 있을까. 그녀에게는 더 많은 것이 있었다. 늘 그것을 보고 싶었다.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은 여성을 보는 색다른 눈이 있었다. <비밀은 없다>(2015)에서 정치가의 아내 김연홍을 연기한 손예진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모든 것을 분출한다. 남편이 저지른 짓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분노만이 아니라 배우 손예진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 그의 안에 잠겨 있던 리미트를 해제해버린 느낌이었다. 생각을 하자면서 어디론가 맹렬히 달려가는 연홍은 손예진과 겹쳐진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던 배우. 어쩌면 비밀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안에 있던 모든 것.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손예진의 짜릿한 내면.

이후 <덕혜옹주>(2016),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7)에서 손예진은 여전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 그녀에게는 더 많은 매력이 있고, 잠재력도 남아 있다. 여전히 그녀에게는 대표작이 필요하다. 젊은 날의 반짝거리는 대표작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는, 그녀만으로 빛나는 영화를, 드라마를 지금도 원한다.

김봉석(영화 평론가)

 

황벼리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흘러가는 것을 모아 이야기를 엮고,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그린다. <다시 또 성탄>과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를 출간했다. “이번 작업을 위해 배우 손예진의 작품을 다시 보았다. 아름다운 웃음이 먼저 떠오르던 배우인데, 그 안에 짙은 눈매, 굳게 닫은 입, 무표정을 뚫고 나오는 강한 인상이 있었다.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로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김고은

무덤처럼 적막하던 노(老)시인(박해일)의 집에 여고생 은교는 작은 새처럼 날아든다. 눈부신 고요 속 소나무 그늘 아래 잠든 채로. 엷게 붉은 볼과 입술, 짧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그의 새하얀 목덜미는 티 없이 순수하다. 데뷔작인 멜로 영화 <은교>(2012)에서 김고은은 그 자리에 갓 피어난 들꽃 같았다.

70대 ‘할아버지’ 시인이 자신을 연모할 줄 꿈에도 모른 채 은교는 깡충깡충 산책길을 쫓아 오른다. 강마른 몸에 가슴이 봉긋 솟은 소녀의 몸은 무방비했다. 찬란한 젊음의 천진한 관능은 우리를 눈멀게 했다. 난생처음 은막에 선 배우가 이토록 주목받은 게 얼마 만이던가. 독립 영화 경력조차 거의 없던 스물한 살 낯선 신인 김고은은 300 대 1 경쟁률로 발탁된 이 영화로 단숨에 충무로를 매혹시켰다.

그는 아름다움의 기준까지 확장했다. 화려한 서구형 미인들 틈에서, 그의 쌍꺼풀 없는 눈과 아담한 콧날은 오히려 신선했다. 눈썹을 한껏 둥글려 웃을 때면 앳된 얼굴에 온갖 감정이 그려졌다. 햇살 같은 그의 명랑함 뒤엔 늘 공허한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해피 엔드>(1999)의 전도연에 이어 <은교>에 그를 발굴한 정지우 감독은 “일상적이고 편안한 모습인데 감정을 담는 순간 강렬한 눈빛이 나온다. 그게 배우의 얼굴”이라 했다. 그를 대체할 얼굴은 누구도 없었다.

그해 그는 대종상,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올해의 영화상 등 신인상을 휩쓸었다. ‘충무로를 이끌 괴물 신인’으로 불린 건 오히려 이후부터다. 이제 막 시작한 배우가 성공한 이미지를 버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김고은은 했다. 노출도 불사하겠다며 제2의 그를 꿈꾼 신인들이 줄을 섰지만 그의 존재감을 못 넘어선 이유다.

계원예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가서는 지지리 억센 밑바닥 인생 역도 도맡고는 했다는 그다. <은교>에 안주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노출 연기로 데뷔했다는 꼬리표도 그는 “볼륨 없는 내 가슴이 콤플렉스인 걸 전 국민이 알게 됐다”며 소탈하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인 ‘청불’ 스릴러 <몬스터>(2014)에선 여동생을 죽인 살인마를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돌진하는 괴력의 ‘미친 여자’가 됐다.

<은교>를 거의 지워낸 건 <차이나타운>(2014)이다. 남성의 전유물이던 누아르 속 복수의 화신이 되어 보스 ‘엄마(김혜수)’에게 칼을 겨눴다. 신예 한준희 감독의 이 영화로 그는 난생처음 칸국제영화제 레드 카펫도 밟았다. “모든 대사, 지문을 다 연구해오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모두 내려놓고 동물적으로 움직이는 배우다.” 한 감독의 말이다.

흥행에 참패했으나 전도연‧이병헌과 호흡을 맞춘 <협녀, 칼의 기억>(2015)도 있다. 한국 영화로는 다소 과감하던 이 무협 영화에서 그는 말 그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와이어 검술 액션을 95% 이상 몸소 소화했다.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등 아버지 사업상 네 살부터 중학생이 되기까지, 10년간 중국에 살 때 즐겨 봤다는 무협 영화의 영향도 컸다. 1990년대생 배우 중 충무로의 첫 시도를 그만큼 자주 함께한 이가 있을까.

두려움 없이 연기하지만 스스로를 과시하는 화려함과는 다르다. 그의 연기는 조금도 의심 없이 상대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투명하게 자신의 속내까지 내보인다. 그러다 보니 기능적인 역할엔 조금 서툴기도 했다. <성난 변호사>의 검사 진선민이 그랬다. 저의를 감추는 데 도통 서툰 이 배우에게 검사란 직업군의 대사는 온통 딱딱하기만 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감정만 나눌 수 있다면 900년 넘게 살아온 도깨비와는 말이 통했다. 김은숙 작가의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도깨비>에선 도깨비 ‘김신(공유)’의 불멸의 삶을 멈춰줄 운명을 타고나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마는 여고생 지은탁이 됐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지은탁을 향한 김신의 마음을 대변했던 김인육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 속 묘사 그대로였다. 웹툰과 0% 싱크로율 논란을 깨고 두각을 드러낸 첫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에 이어 <도깨비>로 2017년 1월 김고은은 한국기업평판연구소 광고 모델 브랜드 평판 조사에서 공유를 쫓아 2위에 올랐다.

올해 정지우 감독과 다시 만난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그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다. 데뷔 이래 무명 시절 없이 주연의 무게를 견디던 부담감이 <도깨비> 이후 한꺼번에 터져 잠시 스스로가 작아진 것 같았단다. “나는요, 내가 그렇게 예쁜 아이인 줄 몰랐어요.” <은교>에서 이렇게 울먹이던 소녀는 이제 짓누르는 부담감을 달래며 ‘나’를 지켜내는 법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었다.

‘20대’, ‘여성’을 뺀 그냥 ‘배우’로 인정받고 싶다는 올해 스물여덟의 배우에겐 여전히 보여주지 않은 게 더 많다. 가수 신승훈과 듀엣을 할 만큼 귀를 빨아들이는 음색은 9월 촬영에 돌입한 뮤지컬 원작 영화 <영웅>에서 처음 선보인다. 김은숙 작가와 재회한 새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선 대한제국 형사와 범죄자 일인이역에 도전한다. 그에게 해보지 않은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김고은의 세계는 쉬지 않고 넓어지고 있다.

나원정(<중앙일보> 기자)

 

이기준 그래픽 디자이너. 주요 작업으로 유유의 책 대부분, 민음사의 쏜살문고 다수가 있다. 책의 새로운 풍경을 상상하는 <책 예고>전을 열었고, 산문집 <저, 죄송한데요>를 지었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만 있으면 온 세상을 담을 수 있다. 특정 인물의 고유한 외모와 분위기를 산수와 도형으로 탐색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얼굴의 골격을 이루는 백합을 하얗게 칠한 게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검게 칠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김태리

지난해 어느 영화제에서 <리틀 포레스트>(2018) 상영 후 임순례 감독을 모시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 질문의 주인공은 어느 소년이었다.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김태리 누나는 정말로 저렇게 잘 먹어요?” 아이다운 질문에 사람들은 살짝 웃음을 터트렸지만, 임순례 감독은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 “원래 먹는 연기를 할 때 살짝 먹는 척하고 ‘컷’ 사인이 나면 뱉는 경우가 많거든요? 반복 촬영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다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리틀 포레스트> 찍을 때 김태리 씨는 진짜로 저렇게 맛있게 잘 먹었어요. 아마 그런 느낌이 관객에게도 전해졌을 거예요.”

어쩌면 이 소년이 가진 궁금증과 임순례 감독의 대답 속에 ‘배우 김태리’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말하면, 김태리는 진짜 같다. 여기서 ‘진짜 같다’는 표현은 조심스럽다. 가짜를 그럴싸하게 진짜처럼 위장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태리의 연기엔 계산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소년도 그런 의미에서 질문했을 것이다. 열 살 정도 된 그 학생은 김태리가 정말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다고 느낀 거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건, 김태리가 불과 3년 만에 대중에게 매우 친숙한 존재가 되고 맡은 역할마다 좋은 평가를 받는 원동력이다.

1,500 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한 <아가씨>(2016)로 대중에게 알려진 김태리는 <1987>(2017)과 <리틀 포레스트>,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까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필모그래피를 이어나가고 있으며 현재는 <승리호> 촬영 중이다. 최근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영화계에 자신의 입지를 명확히 굳힌 배우는 없을 것이다. 이건 단지 <아가씨>로 신데렐라처럼 스타덤에 올라 높은 지명도를 얻었기 때문은 아니다. 감독과 제작자들이 타이틀 롤을 제안하며 러브콜을 보낸 건 김태리가 지닌 새로운 방식의 흡인력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꽤나 심각했다. 주인 아가씨와 함께 한 집안을 파멸시키는 하녀, 역사의 전환기에서 각성하는 스무 살 청춘, 도시에서 실패하고 낙향한 젊은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그런데 김태리는 그런 역할을 그냥 툭툭 해낸다는 느낌을 준다. 분명 그는 기교파 연기자는 아니다. 야구로 비유하면, 한두 가지 구종을 전력을 다해 던지는 투수다. 그런데 그 구종에 나름 자신감으로 타자 앞에서, 영화로 치면 카메라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다. 경험이 아닌 기질에서 나오는 노련함 같은 것? 김태리에겐 그런 독특함이 있다.

그러한 연기 스타일은 최근 바뀌는 트렌드를 반영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 ‘좋은 연기’란 ‘열연’이었고, 배우들에게 ‘파격 변신’은 중요한 미덕이었다. 이른바 ‘빅 3(최민식∙송강호∙설경구)’로 불리던 남자 배우나 혹은 전도연이나 문소리 등의 여자 배우는 이른바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배우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등장한 김고은, 박소담, 이솜, 김태리 등의 배우들은 훨씬 더 릴랙스 상태에서 캐릭터에 접근한다. 그들은 힘주어 자신을 변형시켜 캐릭터를 창조하던 선배들의 방법론에서 한 걸음 벗어나, 주어진 캐릭터에 접근하면서 조금씩 맞춰나가되 절대 자기 자신의 느낌을 지우지 않는다. 꽉 찬 느낌은 덜하더라도 뭔가 여백이 있고, 긴장 상태에서 응축한 후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지만 은은하게 뿜어내는 스타일의 연기. 김태리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배우다.

이런 스타일의 연기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캐릭터에 빠른 속도로 스며든다는 것이다. 김태리는 분석과 계산 전에 먼저 캐릭터 그 자체를 장착하는 스타일이다. 그의 연기를 “감성이 좋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그런 이유다. <아가씨>나 <미스터 션샤인>은 작품 안에서 다양한 톤과 느낌을 보여주어야 했는데, 김태리는 그 ‘넘나듦’이 매우 부드럽다. 그는 숙희를 해내고 고애신을 해낼 뿐 딱히 어떤 설정이 발견되진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 없음’은 혜원(리틀 포레스트)과 연희(1987)도 아우르는 김태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이 배우가 많은 작품을 접하며 쉼 없이 전진하기보다는 여러 삶의 경험을 통해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그 안에서 캐릭터를 만났으면 좋겠다. 기교보다는 감성의 배우이기에, 김태리는 자신이 가진 것과 연결된 캐릭터에서 장점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계속 캐릭터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강박에서만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면, 김태리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롱런할 수 있는 배우다. 그는 아직 열매 맺지 않은 나무로 가득한 ‘리틀 포레스트’ 같은 연기자이기 때문이다.

김형석(영화 평론가)

머레이크랩 주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확장된 영역인 애니메이션을 작업한다. 성수동 갤러리아포레 <내 이름은 빨강머리 ANNE>전에서 애니메이션 및 뮤직비디오를, 홍콩 소고백화점 빌보드에서 애니메이션을, 한남동 구슬모아당구장 <굿즈모아마트>에서 애니메이션을 전시 중이다.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보그 코리아>에서 좋아하는 김태리 배우를 그릴 수 있어 즐거웠다. 순수한 아이 같지만 묘하게 우수에 찬 듯한, 맑고 슬픈 눈동자는 그녀가 어떤 배역으로도 깊이 있게 분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