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치아 프라다의 영감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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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치아 프라다의 영감의 원천

2019-10-08T15:08:41+00:00 2019.10.10|

배후에서 두 개의 주요 패션 레이블을 이끌며 1년에 10개의 패션쇼를 개최하는 이탈리아 럭셔리 패션의 선구자.
미우치아 프라다는 자신의 제국을 미래로 이끄는 데 집중하고 있다.

패션과 예술, 문화와 정치를 모두 아우르는 이 시대의 패션 여제, 미우치아 프라다를 뉴욕의 프라다 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툭 트인 프라다 미국 본사 7층에는 디스토피아적 분위기가 있다. 천장은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했고, 거기에 달린 조명은 네온 푸크시아 컬러이며, 선박이나 자동차 주차장에나 어울릴 법한 건물의 원통형 받침 기둥은 연한 매트 핑크색으로 칠했다. 디테일한 세트는 지난 리조트 패션쇼의 잔재다. 부러워할 만한 의상을 걸친 머리 없는 마네킹이 그 공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데, 그것들의 뻣뻣하고 호리호리한 허리에는 번호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일부 대형 창문 밖으로는 고급 승용차 람보르기니와 부가티 대리점의 지붕이 한낮 태양 아래 길게 뻗어 있는 게 보인다. 다른 창문 밖으로는 눈부신 허드슨강이 살짝 엿보인다. 그것은 프라다 패션쇼의 맨 앞자리에 자주 초대되는 소피아 코폴라나 니콜라스 빈딩 레픈 같은 유명한 감독의 아름답고도 충격적인 영화에 나옴직한 무대 배경 같다. 니콜라스 감독은 올 초에 현대미술관인 폰다치오네 프라다에서 예술가들이 개인적으로 영감을 받은 영화를 소재로 한 소제티바(Soggettiva)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 있다.

지난 5월에 70번째 생일을 기념했지만 유화로 그리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외모는 변치 않았다. 한때 미세스 프라다를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라고 칭한 루카 구아다니노가 선호하는 풍부한 색상의 세상과 잘 어울릴 듯한 외모. 쇄골 부위로 부드럽게 감긴 머리칼은 버터같이 부드러운 블론드다. 귀에는 여러 개의 적갈색 구가 공룡알처럼 매달려 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마리골드 플리츠 스커트는 프라다 여성복의 주된 스타일이다. 캐러멜 색조의 쇼트 슬리브 스웨터 아래로 그녀는 소매와 네크라인에서만 살짝 엿보이는 타이트하고 크레이프처럼 얇은 흰색 언더셔츠를 걸치고 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완벽한 모습이다.

이 사람이 해마다 프라다 남성복과 여성복, 미우미우 사이에 복잡하고 영화 같은 10개의 컬렉션을 선보이는 거대 의류 기업인 프라다 그룹을 이끄는 창조적 힘이다. 평생에 걸쳐 완벽한 미적 감각을 키워왔고, 10대와 대학 시절 이브 생 로랑 제품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고, 밀라노의 빈티지 매장에서 자신의 안목을 길렀으며, 다른 아이들과 차별되도록 자녀의 옷을 입힌 여성이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아직도 매일 아침 옷을 입으며 그러한 기쁨을 얻느냐고 질문하자, 그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특이한 표정을 짓는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술을 삐죽 오므리는 표정이 왠지 “아마도요”와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라는 두 가지 대답을 다 전달하는 듯하다. “저는 유니폼을 입는 경향이 있어요.” 그녀는 말한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대부분의 의상을 이제 나이 때문에 입을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이를테면 미니스커트 같은 거죠.”

“그녀는 미니스커트 이야기를 자주 해요.” 오랫동안 프라다와 미우미우의 홍보 책임자로 일해온 베르데 비스콘티는 말한다. 발레리나처럼 우아한 그녀는 이 회사에서 20년 이상 일해오면서 대부분의 공식 행사에 프라다를 수행하는 대외 홍보 담당관이다. 우리가 인터뷰하는 동안, 그녀는 거의 1.5m 정도 떨어져 고양이처럼 앉아 있다. 그 말의 의미가 프라다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싶어 하는 개인적 열망을 자주 언급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1994년의 플리츠 올리브 니트 드레스, 2010년의 해변 풍경이 프린트된 로에지 실크, 2017년의 극도로 작은 패턴이 들어간 스코트 등 그녀가 선보인 작품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프라다 스커트는 때때로 도발적이기도 했다. 천박한 절개선이 들어간 1990년대의 블랙 레오타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무지갯빛 플라스틱 보석 등. 2019년 봄 패션쇼에 서 런웨이를 따라 성기에 위해를 가할 것처럼 보이던 조그마한 반바지를 입은 남자 모델들을 내보냈다. 그녀는 그 반바지를 남성용 미니스커트라고 불렀다. “도발적이죠.” 프라다는 시간의 무게만 견딜 수 있다면, 자신이 기꺼이 입을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의상을 아직도 상상하며 근엄하게 말한다. “진짜예요.”

지금은 리조트 컬렉션 룩 사이에 앉아 있을지 몰라도, 패션계의 혼란스러운 연대표 때문에 우리는 그녀가 지난 2월에 선보인 감각적 도발보다 이지적 도발을 불러일으킨 2019년 가을/겨울 컬렉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건 모두 프라다가 영국의 여성 작가들에 매료되면서부터다. 그들은 주로 활동하던 18세기 후반과 19 세기 초반에는 자주 저평가되곤 했다. 프라다는 수십 년 전에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의 소설에 푹 빠졌고, 최근에 들어서는 난생처음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기 시작했다. 컬렉션을 이끈 건 이들 작가의 사회적 예민함과 셸리가 쓴 고전 작품의 다크 로맨스였다. 프라다가 창조하는 다른 모든 컬렉션처럼, 거기에도 풍자적 유머가 스며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그의 신부를 그린 만화 이미지가 지나치게 큰 장미와 번개(극단으로 밀어붙인 상징과 모티브)와 함께 의상을 장식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복잡한 것을 심플한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사람들은 시간이 별로 없고, 정보는 넘쳐나는데, 거기에는 뭔가 좋은 게 없으니까요.” 프라다는 말한다. 그녀의 답변은 꼭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요? 이해가 가나요?’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이번 컬렉션이 그녀의 신경을 긁는 듯하다. “저는 한 번도 저의 정치적 의도를 공공연하게 말한 적이 없어요. 저는 패션 업계에서나 명품 업계에서 일할수록 입을 다무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번 컬렉션은 거절당한 사람들의 사랑과 현재 너무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인 것. 럭셔리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러한 양분된 태도는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를 옮겨 다니며 성장기를 보냈고, 밀라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이 디자이너를 평생 따라다녔다. “저는 모든 것에 다 관심이 있었지만,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말한다. 대신에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질문하자, 그녀는 말썽꾸러기처럼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녀는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자 생식권과 접근 가능한 보육을 공공연하게 지지하고 나선 활동적인 페미니스트로 유명했다. “젊은 시절 저는 몹시 당황했어요. 좌파 페미니스트로서 패션 일을 한다는 게 저한테는 정말 끔찍하고 수치스러웠어요.” 하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호기심과 문화에 대한 인식은 다방면으로 뻗어 있었다. 1960년대의 위대한 이탈리아 시네마 열풍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에 극장에 다녔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 영화를세 편이나 본 적도 있었다. 안토니오니, 펠리니, 베르톨루치. 그의 작품이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 영감을 준 세르지오 레오네.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만든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 (앞서 언급한 베르데는 그의 증손자다. 아마도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일 것이다.) 그녀는 영화 애호가였고 그 유명한 피콜로 테아트로 극장에서 5년 동안 신체 마임을 배우곤 했다. “결국 물건을 향한 애정이 우세했죠.”

우선 그녀 가족의 매장을 위해 몇 가지 품목을 디자인한 후 프라다는(당시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이름인 마리아 비안키로 통했다) 1978년에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았다. 이탈리아 왕가를 위해 트렁크를 디자인하던 그녀의 외조부 마리오 프라다가 1913년에 설립한 이 가죽 제품 회사는 당시에는 소규모 가족 사업이었다. 가죽 제품 업계에서 경쟁하던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라는 남자를 만나 나중에 부부가 된다. 두 사람은 그 프로젝트를 야심 찬 모험으로 봤고, 그는 비즈니스 부문을, 그녀는 크리에이티브 부문을 책임지게 된다. 그녀는 미혼의 이모가 자신을 입양하도록 해, 지극히 중요한 프라다라는 ‘성’을 법적으로 부여받는다. “우리는 회사를 세우기 시작했어요.” 그로부터 10년 후에, 프라다는 그녀의 첫 번째 여성복 컬렉션을 론칭했다. 미우미우와 프라다 남성복은 1993년에 탄생했다.

올 초, 이 커플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이자 프로 레이싱 카 드라이버인 로렌초 베르텔리가 프라다 그룹의 경영진에 합류했다. 이후 그는 이 브랜드의 온라인 부문을 오프라인 매장과 통합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프라다에게 가족의 유산이 중요한지 묻자(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태어난 밀라노의 빌라에 살고 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이 회사를 자신과 남편의 열정을 담은 프로젝트로 보고 있으며 언젠가 아들이 물려받을지는 확신도 우려도 하지 않는 듯하다. “본인이 그것을 좋아하는지부터 확인하겠죠.”

프라다와 그녀의 남편은 둘 다 순수예술에 몰두한다. 친구들에 따르면 그들의 집은 인상적인 그림과 물건이 소장된 공간이다. 아주 분주하던 1990년대 중반에도이 커플은 패션의 자본주의와 상업주의에서 분리되어 독자적 전시 공간 역할을 하는 현대미술관 ‘폰다치오네 프라다’를 설립했다. 그곳에서 로리 앤더슨, 카스텐 횔러, 티에스터 게이츠, 댄 플래빈을 비롯한 아티스트가 단독 전시회를 열었다. 프라다는 그것을 패션 회사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겪는 실존주의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부른다. “제 마음으로는, 그것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패션과 아트, 문화, 정치가 말이죠.” 그러나 그녀는 예술 세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명확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컬렉션에서 아티스트와 협업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이유가 됐든, 사람들에게 제가 의상을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아트를 이용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아마 저는 최후의 프로페셔널한 도덕주의자일 거예요.”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는 예술이 그녀의 패션 브랜드에 스며들고 있다. 이 브랜드의 밀라노 본사에는 횔러의 시그니처 슬라이드 가운데 하나가 프라다의 3층 사무실에서 거리까지 길게 늘어져 이어지고 있다. 횔러와 게이츠는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팝업 클럽을 만들어왔다. 이들은 프라다의 권한 아래서 활동하지만 창의적 자유는 맘껏 발휘할 수 있다. “만일 제가 하는 작업이 뭔가 야심 차고, 대담하고, 불합리하고, 기적 같은 것이라면, 그건 제 옆에 그런 일을 매일 하면서도 상 받기를 거부하는 미우치아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2012년에 그의 밴드인 ‘더 블랙 몽크 오브 미시시피’가 런던의 로니 스코츠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러 왔을 때 프라다를 처음 만난 게이츠는 말한다.

2011년에 프라다는 ‘미우미우 위민스 테일즈’라는 프로젝트에 대한 단편을 만들기 위해 여성 영화감독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하이파 알 만수르의 <웨딩 싱어의 딸>(2018), 클로에 세비니의 <카르멘>(2017), 미란다 줄라이의 <썸바디>(2014), 그리고 에바 두버네이의 <더 도어>(2013)를 비롯한 영화 제작자들에게 그들의 여배우 에게 미우미우 의상을 입히라는 통고와 함께 아트 팝업처럼 그들에게 창조적 자유를 전적으로 부여했다. 두버네이 같은 몇몇 감독과는 중요한 시점에 그런 콜라보가 이뤄졌다. 그녀는 당시 선댄스 영화제에서 <미들 오브 노웨어>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음에도, 역사적으로 백인 남성 감독이 향유해온 장편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런 작품이 필요했다. <더 도어>는 “아직도 제가 제작한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한 편이에요.” 두버네이는 말한다.

프라다는 자신이 활동하는 동안 창의적인 결정 과정뿐 아니라 사업적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 감각에서도 일각에서는 선구적이고, 약간은 기괴하며, 심지어 위험천만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1980년대에 다른 사람이 실크나 가죽 소재를 사용할 때 퇴폐적 백팩을 페티시한 물건으로 바꿔놓으며 산업용 나일론에 강하게 매료된 것과 같이. 9·11 테러 이후의 불황기를 맞아 명품 업계의 다른 사업체가 지출을 줄이고 맨해튼 시내에서 재빨리 벗어나는 동안 프라다는 갑자기 전면으로 나서며 소호의 오래된 구겐하임 건물에 렘 콜하스의 설계로 5,000만 달러짜리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를 세우고 2001년 말미에 문을 열었다.

“때때로 그녀는 시대를 약간 더 앞서가니, 시대가 그녀를 따라잡아야 해요.” 이번 기사를 위해 인물 사진을 찍어준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영화 제작자인 바즈 루어만은 말한다. 그 둘은 프라다가 루어만의 1996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입은 네이비 블루 웨딩 수트를 디자인할 때 만나 그 후 2013 년 <위대한 개츠비>에서 협업했다. 이후에는 ‘프라다 롱차이’ 문화 센터의 개관을 위해 함께 상하이를 향했고, 볼쇼이에서 존 크랑코의 <오네긴>을 보기 위해 모스크바를 돌아다녔다. 그는 그녀를 ‘무치’라고 부른다. 2013년부터 이 브랜드를 위한 광고 캠페인에 출연 중인 배우이자 모델인 데인 드한은 루어만의 정서에 공명한다. “미우치아는 지금 당장 무엇이 인기 있는지가 아니라 앞으로 수년 후에 무엇이 인기 있을지에 대한 감을 갖고 있어요.”

그럼에도 그녀와 이 브랜드가 골치 아픈 실수를 면할 수는 없었다. 지난해 말 프라다는 ‘프라다말리아’라는 별명을 가진 피규어 컬렉션을 출시했는데, 뉴욕에서 활동하는 인권 변호사 치녜레 에지가 그 피규어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포스팅하며 일부 피규어가 1899년의 어린이용 책인 <리틀 블랙 삼보>에 등장하는 인종주의자 캐리커처와 닮았다고 지적했다. “역사가 되풀이되어선 안 돼요. 흑인은 더 나은 대우를 받아 마땅해요.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라고 에지는 썼다. 프라다 측에서는 그 피규어를 철수하고 두루뭉술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프라다는 “프라다 그룹은 누구도 언짢게 할 의도가 없었으며,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이나 인종차별적 이미지를 혐오한다”고 밝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흔히 듣는 말이다. 몇 달 전 돌체앤가바나에서도 이탈리아 음식을 젓가락으로 먹으려는 중국인 모델 줘예를 내세운 광고를 내보낸 후 내놓은 사과도 그랬고, 그로부터 두 달 후 구찌에서(흑인 인종차별의 상징인) ‘블랙 페이스’를 떠오르게 하는 발라클라바 넥 스웨터를 출시한 후 그들이 내놓은 또 다른 사과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대부분의 경우 제품을 철수하고 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프라다 스스로가 “이 같은 실수”라고 진지하게 가리키는 상황이 발생한 후 그녀는 티에스터 게이츠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기회를 활용하여 상황을 한층 개선하고, 우리 디자이너들을 살피며 ‘좋은 의도를 갖고 있어도, 때로 인종차별적 이미지가 튀어나온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그렇게 질문했다고 말한다. 지난 2월, 프라다 그룹은 게이츠와 두버네이를 공동 의장으로 하고 하버드대학교 교수인 사라 루이스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다양성과 포용성 자문위원회’를 조직했다. 초기 단계에 언론에 공개한 이 위원회는 프라다 내부와 업계 전반에서 행하는 교육적 노력과 확장되는 내부 대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프라다가 발표하고 나서 이틀 후에 구찌는 인식, 다양성, 포용성 고취를 목표로 하는 일련의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여러분의 관행은 어떤 건가요? 예전에는 어떤 것이 편했나요?” 두버네이는 프라다 팀에 자신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고 말한다. “제가 그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실행되고 있지는 않아요. 그들의 계획을 공개적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그것을 그냥 하면 돼요.”

프라다는 그런 도전에 동기부여를 받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문화가 아주 다양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아주 많은 인종이 살고 있죠.” 그녀는 말한 다. “우리는 이제 모든 종류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해요. 실상은 거의 반대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는 듯하지만요.” 민족주의가 팽배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나는 미국과 멕시코 간 장벽을 머리에 떠올렸고, 그녀는 유럽을 거론했다.

다른 우려는 브랜드 내에서 처리하고 있다. 올여름 이 회사는 수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한 끝에 프라다의 DNA가 박힌 아이코닉한 제품을 선보였다. 지속 가능하도록 업데이트한 재활용 나일론으로 제작한 최초의 제품이었다. 지난 5월 프라다 그룹은 2020년까지 ‘퍼 프리(Fur-Free)’를 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가능할 때 모두가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건 정말 중요해요.” 프라다는 말한다. 그녀는 약간 피곤해 보이면서도 단호해 보인다. “그게 하나의 과정이죠.”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즈음, 나는 그녀가 디자인 작업, 예술적 시도, 패션쇼, 여러 파티 등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아까처럼 또다시 얼굴을 찌푸린다. “스트레스 해소요?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문제라고 한다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를 충분히 갖고, 앞서 생각하고, 뭔가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만들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거죠.”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초지일관 계속해야 하고, 끝도 없는 패션 일정, 언론 매체와의 약속, 그 모든 비즈니스 여행은 상관없는 걸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저는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질색이에요. 물론 어디든 갈 때마다 뭔가 새로운 걸 배우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