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은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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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은희’에게

2019-10-18T16:32:14+00:00 2019.10.18|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 대중 영화 사이에서 빛나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벌새>. 포스터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단발머리 소녀가 가방끈을 꼭 부여잡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1994년, 가장 보편적인 은희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 <벌새>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후 세계 28개국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관객상, 제45회 시애틀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대상,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 대상, 제18회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 최우수 국제장편영화상·최우수 여우주연상·촬영상 등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습니다. 그 밖의 영화제에서도 상을 받고 28관왕에 오르며 관객은 물론 언론, 평론가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죠.

<벌새>는 지난 8월 29일 개봉 이후 꾸준한 관객 유입으로 누적 관객 13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한국 독립 영화계의 새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벌새>에는 김보라 감독이 겪은 1990년대 여성의 시선이 녹아 있습니다. 감독은 1994년을 살아가는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라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고, 그 당시를 살았던 여성들의 공감을 끌어냅니다.

은희의 성장기는 곧 개인의 이야기에서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짚어내는 서사로 이어집니다. 그만큼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겠죠. 그때만 해도 지금과는 또 다른 의미로 여성은 약자였고, 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요.

사회는 끝없이 발전하던 시기였지만, 은희는 그 안에서 어딘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벌새>에서는 은희네 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뜻 보면 화목해 보이지만, 글쎄요.

은희네 아버지는 “아빠가 너희를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데 말이야”라는 말을 반복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를 모른 체합니다. 공부하는 게 곧 권력인 오빠는 집 안에서 큰소리를 내며 여동생을 때리기도 합니다. 두 딸은 숨죽인 채 조용히 지내야 하죠. 화목한 가정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다섯 식구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묻고 싶어집니다. “정말 모두 행복한가요?”

은희와 비슷한 시절 혹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내면에 잠자던 질문을 깨우게 됩니다. 영화 속 은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밖 그 수많은 은희들은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묻고 싶어집니다.

“세상에는 나쁜 일도 있지만, 좋은 일도 많단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나눈단다.”

영화에서 은희의 편이 되어주는 ‘김영지 선생님(김새벽)’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아마도 세상의 수많은 은희들은 누군가를 만나며 삶을 살아가고, 무언가를 얻으며 삶을 온전히 지켜가고 있겠지요. 이것이야말로 은희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