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OTING FOR LONDON

Fashion

SHOOTING FOR LONDON

2019-10-24T18:54:07+00:00 2019.10.30|

YCH가 런던에서 첫 번째 패션쇼를 열었다. 19세기 여성 총잡이를 뮤즈로 한 런던 데뷔전.

9월 17일은 내년 봄을 위한 런던 패션 위크의 마지막 날이었다. 새벽의 찬 기운이 채 사라지지 않은 아침 8시, 패션 위크 본부인 ‘더 스트랜드(The Strand)’의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좁은 복도 사이에 숨어 있던 디자이너 윤춘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1시간 뒤면 그가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런던에서 YCH 컬렉션을 선보이는데도 말이다. “잠을 설치진 않았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모델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붙여놓은 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어때요? 괜찮아 보이나요?”

여성적 디자인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아이디어를 조합하는 건 서울 패션 위크의 스타로 떠오른 윤춘호의 특기다. 그가 본격적으로 런던을 꿈꾸기 시작한 건 지난 7월 말이다. 서울디자인재단에서 추천하고, 영국패션협회(British Fashion Council)에서 최종 선정하는 해외 교류 패션쇼 레이블로 YCH가 선정된 것이다. 그날 이후, YCH와 런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가 빠진 키워드는 런던이었어요. 런던 풍경은 어떨까, 런던 여성은 어떤 모습일까, 런던에서 만나는 YCH는 어때야 할까?” 그는 긍정적 깨달음을 얻었다. “서울이든 런던이든 제가 그리는 여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켰어요. 컬렉션을 선보이는 도시에 따라 굳이 제 작업이 바뀔 필요는 없는 걸 깨달았죠.” 그가 그린 커다란 밑그림은 현대적 여성이었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여성들에게 더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이 궁금했다. “여성 내면의 힘이 드러날 수 있는 스타일이 뭘지 궁금했어요. 패션 디자이너로서 제가 늘 돌이켜보는 질문이기도 하죠.”

깊은 고민에 빠진 그에게 다가온 건 19세기 미국 총잡이 애니 오클리(Annie Oakley). 열다섯의 나이에 뛰어난 사격 솜씨로 유명해진 그녀는 유랑 극단에서 공연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총구를 겨누고,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담배 끝을 정확히 맞힌 전설적인 여성 명사수. 더 매력적이었던 건 그녀의 여성적인 옷차림으로,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사격 공연에 나서면서도 그녀는 남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페티코트를 더한 주름치마와 빅토리아풍 블라우스,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재킷과 카우보이모자 등이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자료를 찾을수록 다채로운 이야기와 함께 그만큼 신비로운 스타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19세기식 페티코트를 고집할 순 없었다. 2020년을 위해 다시 태어난 YCH의 애니 오클리는 훨씬 자유로웠다. 웨스턴풍 모자와 총잡이 가방 등은 풍미를 더하는 양념에 가까웠다(특별히 준비한 가방을 서울에 두고 와 가슴 졸이기도 했다). 컬렉션을 지지하는 커다란 뼈대는 자유로운 여성을 위한 옷차림. 몸을 풍성하게 감싸는 코팅된 코튼 소재 트렌치 코트는 디자이너가 꼽은 베스트 아이템. 여성적인 소재와 남성적인 테일러링을 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드러운 멜론색 레이스 드레스, 투명 팬츠 위에 매치한 화이트 재킷은 YCH의 이전 작업을 지켜본 팬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가죽 브라 톱을 더한 화이트 튜닉 드레스, 가죽 재킷을 허리에 묶은 듯한 슬릿 스커트와 주름 장식 블라우스는 쇼를 보는 재미를 더했다.

“그저 모두 끝난 게 좋았어요.” 모델들의 워킹이 끝나고 런웨이에 인사하러 나온 디자이너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했다. “홈그라운드를 떠나 원정 경기를 뛰는 운동선수 마음이 이럴까요. 급하게 서두르던 기억, 팀원들을 다독이고, 재촉하던 기억이 모두 한꺼번에 떠올랐어요.” 런던 패션계는 뛰어난 재단 실력과 부드러운 드레스를 칭찬했다. 다음 쇼를 묻는 질문도 많았다. 덕분에 다시 고민에 빠졌다. “런던에서 패션쇼를 발표한 건 고맙고 소중한 일이에요. 다음은 서울로 돌아오겠죠.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선보일지 떠올리고 있어요.”

10분 만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패션쇼가 과연 시대에 어울리는 이벤트일까? 관객 마음을 움직이고 디자이너의 개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런웨이 쇼가 아닐까? 이렇듯 여러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사라지고 있다. “더 서늘해지면 차분하게 생각에 빠져봐야죠. 정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런던의 꿈에서 깨어난 디자이너가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