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

Fashion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

2019-10-25T18:45:20+00:00 2019.11.04|

‘무엇이든 다 판다’는 독특한 컨셉으로 오늘의 한국 디자인을 소개하는 원효로 꽃술의 파란만장 작업 일지.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 서론: 리좀(Rhizome)

우리의 작고 보잘것없는 원효로의 낡은 집을 아름다운 철학서로 설명한 건 내가 아니라 대수선 공사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젊은 목수였다. 좀 색다른 문화 공간을 직접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그래서 오래된 골목의 2층짜리 낡은 주택을 뭐에 홀린 듯 덜컥 구입해버린 2년 전의 그날부터 나는 몇 년 치의 인간적 삶을 이 집에 저당 잡혔다. 물론 적금 통장도 함께. 철학적 사유는커녕 당장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계적 일 처리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다. 그럼에도 목수의 작업 일지에서 이 글을 봤을 때 우리 작업을 표현하기에 이만큼 적합한 문장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흐름을, 서로 얽히고설켜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줄기 리좀에 비유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미로, 무한한 가능성의 그물망. 여러 작업자들과 각각의 생각과 사연 많은 건물, 2019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유난히 고집 센 기획자가 만난 원효로 ‘꽃술(kkotssul)’은 그렇게 어느 날 한데 얽혔다가 여전히 어떤 무엇으로도 설명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현재 나는 이 공간을 ‘디자인 바(Design Bar)’라는 이름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중이다. 생소한 명칭일 것이다. 당연하다. 불과 한 달 전 내가 지어낸 말이니까. 3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기획 일을 시작할 때부터 조금씩 구체화해온 프로젝트였다. 한국에선 볼 수 없던 낯선 풍경을 만들고 싶었다. 갤러리, 쇼룸, 편집숍, 카페, Bar… 한 단어로 특정할 수 없는,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 디자인 중심의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창작자들을 위한 아지트이자 누구나 아무 때나 들러 앉고 쓰고 만지고 즐길 수 있는 이 모두의 경험의 장이 되길 꿈꿨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땅이 고작 80㎡에 불과하다는 현실이었다. 제품의 주문과 판매는 온라인 숍을 통해서도 얼마든 가능했지만 디자인을 경험하기 위해선 오감을 만족시키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원대한 망상을 실현하기에 대지 면적은 턱없이 좁았지만 예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기에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간 <보그> 피처 에디터로 미술과 디자인을 담당해오며 취재나 기획 전시를 통해 알게 된 작가와 큐레이터들, 또 그들이 소개해준 다른 작가와 공간ㆍ가구ㆍ제품 디자이너들이 참여하고, 학창 시절부터 고락을 함께해온 친구가 공동 운영을 맡기로 결정하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1968년 건축 당시 그대로의 외관과 유리창으로 안과 밖, 낮과 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꽃술.

오버사이즈 양털 코트는 마이클 코어스 컬렉션(Michael Kors Collection), 운동화는 나이키(Nike). 나무 테이블은 석운동 작품.

서울 시내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집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장점이라면 효창공원앞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자리한 데다 공항 철도, 버스 정류장도 가깝고 바로 뒤편에 공영 주차장이 있어 교통과 주차가 편리하다는 것. 단점은 그게 전부라는 것. 노부부가 아들 셋을 분가시킬 때까지 살았다는 붉은 벽돌집은 어느 한 구석 성한 데가 없었다. 1, 2층을 연결하는 나무 계단은 좁고 가파른 데다 삐걱거렸다. 1층은 이상할 정도로 습했다. 벽지에 핀 곰팡이는 얼마나 오래 방치되었는지 온 집 안을 뒤덮은 상태였다. 습기의 원인은 바닥을 다 털어내고 난 후에야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지하 벙커가 발견된 것이다. 건축물대장에도 없던 약 1.5m 높이, 한 평 남짓한 콘크리트 밀실 때문에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지금은 바닥 창고로 요긴하게 사용 중이지만, “이것이 박정희 정권 시절 서울 곳곳에 만들어졌다던 벙커 중 한 곳”이라는 둥 작업자들 사이에선 별별 말이 다 돌았다. 가스보일러를 걷어내면 연탄보일러가 나오고 흙더미를 파 내려가면 벙커가 나오는 식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말도 안 되는 집이 마음에 들었다. 미로처럼 구불구불 연결되는 비밀스러운 구조도 좋았고, 두툼한 바닥에 숨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던 높은 층고와 슬레이트 가건물에 가려져 역시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던 2층의 작은 테라스, 볼품없이 평평한 옥상도 매력적이었다. 한국전쟁 후 강북의 구 도심으로 몰려든 이주민들이 하나의 필지를 요리조리 나눠 지은 못난이 주택들은 집과 집 사이가 거의 한집처럼 붙어 있다. 심지어 두 집의 옥상 높이가 같았고, 옆집은 따로 옥상 출입문이 없었다. 탁 트인 옥상에서는 지금도 저 멀리 드래곤시티 호텔과 주사기만 한 N서울타워, 여의도의 불꽃놀이 축제가 보인다. 빨래나 널기엔 아까운 풍경이었다. 사방으로 바람이 드는 햇살 좋은 옥상 가득 식물을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분 몇 개가 아니라 나비와 벌이 날아드는 진짜 정원 말이다. 집을 본 첫날 ‘kkotssul(꽃술)’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초목이 더부룩이 나는 모양을 본뜬 꽃술의 한자 ‘蘂(꽃술 예, 모일 전)’에는 모인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많은 사람과 사물이 모이고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나는 작은 중심. 뭔가 그럴듯했다.

그간 크고 작은 전시와 행사를 함께해온 석운동과 공사의 초안을 잡았다. 앞서 언급한 그 기특한 젊은 목수다. 직접 건설업 사업자를 내고 직영 공사를 진행하며 한계에 부딪혔을 때 해결사가 되어준 건 방방곡곡 예술 기관을 누비며 마을 소사처럼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던 ‘맙소사(Marcsosa)’ 김병국 소장이었다. 그가 설계와 시공을 맡자 평소 친분이 있던 콘크리트 디자인 스튜디오 ‘랩크리트(Lab.crete)’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건축을 전공한 이들은 콘크리트 같은 건축 외장재를 이용한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원효로 꽃술의 반짝이는 우윳빛 계단 상판은 디자이너로서 영역을 확장해가는 랩크리트의 중간 작업으로 이를 기초로 완성한 제품은 최근 런던 디자인페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모듈화된 철제 작업으로 패션과 미술 신을 누비며 매번 재미있는 결과물을 선보이는 ‘원투차차차(OTC)’가 공간 내의 선반 일체를 제작했다. 그와 함께 뉴욕 에이랜드 매장의 메인 가구를 제작한 전산이 특유의 컬러감을 살린 다용도 수납함을 선물했다.

금장을 더한 오버 핏 인조 모피 코트는 베르사체(Versace), 로고 장식 귀고리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운동화는 컨버스(Converse).

분홍색 인조 모피 코트와 벨벳 소재 비대칭 실루엣 드레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하이톱 스니커즈는 컨버스(Converse). 모델 앞쪽 선반 혹은 테이블로 활용 가능한 나무 소재 오브제는 J1 Studio의 ‘T. Shelf’, 검정 계단 레일은 제로랩(Zerolab)이 제작, 미니 눈사람 오브제는 임정주의 ‘Noneloquent’ 시리즈, 아크릴 미니 테이블은 정그림의 작품.

전시 공간 및 집기 디자이너로 미술계에서는 이미 유명한 제로랩은 ‘kkotssul’의 k를 모티브로 한 핸드레
일과 계단 수납장을 만들었고, 여기에 더해 트레이와 코스터, 배달통을 디자인했다. 계산대를 겸한 간결한 바 외에 주방이 따로 없는 꽃술에서는 가구와 소품처럼 음료와 음식도 큐레이션하여 선보이는데, 랑빠스 81의 수제 소시지(얼마 전 <수요미식회>에 나온 바로 그 집!)와 식당 동휴의 따뜻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꽃술과 이웃한 신생 공간 아카이브 봄 지하에서 식당을 운영 중인 요리사 동휴가 선보이는 독특한 메뉴가 바로 이 배달통에 담겨 꽃술로 배달된다. 배달 앱에는 없는 독점 배달 메뉴다. 전국 소규모 양조장에서 엄선된 우리술은 잡지사에서 오랫동안 F&B를 담당해온 이응경 에디터가 큐레이션했다. 꽃술을 위해 각 양조장 마스터들을 일일이 인터뷰하며 우리술을 소개하는 일러스트 북을 제작한 그녀는 곧 꽃술을 플랫폼 삼아 우리술 구독 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다. BI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이너 중 한 명에게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지속된 기나긴 공사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프로젝트 협업을 통해 원래 알던 이들도 있지만 다수가 초면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흙바닥에 서서 아직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공간 구성과 막연한 계획을 떠들던 내가 얼마나 요상한 사기꾼처럼 보였을까? 진심이 통한 건지 그들이 순수했던 건지, 혹은 둘 다일지 모르겠지만 참여 작가와 디자이너들은 계속 늘었다. 붓글씨의 예술적 조형미를 가구로 재구성한 곽철안의 의자, 동네 이웃이기도 한 ‘티엘(TIEL)’ 스튜디오의 세련된 테이블과 조명, 실용적이면서도 감각적인 ‘J1 Studio’의 테이블 겸 선반, ‘오리진(Orijeen)’의 오로라 빛깔 수납장, 알루미늄과 아크릴이 고급스러운 서정화의 스툴, 한옥 고재를 이용한 손신규의 스툴. 말랑말랑한 실리콘 오브제로 유럽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정그림의 이것저것. 언젠가 꼭 한번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던 이름들이다.

이전에 다른 전시에서 본 작품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무턱대고 찾아간 경우도 있다. 손으로 주물러 조형한 노기쁨의 뽀얀 도자기, 한지를 레진에 풀어 은은한 색감을 내는 손상우의 ‘Kiri’ 시리즈, 섬유공예가 엄윤나의 색실로 쌓은 탑, 무학사를 비롯해 여러 이름으로 활동하는 손정민의 스노볼과 모빌… 보잘것없는 사물을 전시 주인공 삼는 로와정에게는 우리의 옥상정원을 위한 파티션과 테이블을 부탁했다.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옛 유물과 함께 전시된 임정주의 ‘논엘로퀀트’ 시리즈는 문손잡이로도 만들어졌다. 원예 전문가와 한 팀을 이룬 가든 디자이너들은 한국의 자생식물로 꽃술만의 멋진 정원을 완성했다. 꽃술에서는 이 모든 것을 다 판다. 가구와 소품, 맞춤식 주방, 음료, 우리술, 나무와 꽃, 이 모든 과정을 담은 사진과 영상, 텍스트, 아카이빙 북,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까지. 결국 꽃술이 파는 건 이 도시와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다.

요즘 나는 틈이 나면 이웃들을 만나 원효로77길 33, 이 집과 동네의 옛 이야깃거리를 수집한다. 대부분 50년 이상 이곳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이다. 이들의 추억에 귀를 기울이는 건 집의 소리를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다. 리빙 디자인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공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아파트의 등장과 함께 좌식에서 입식으로 생활 문화가 급변한 한국에서 우리의 생활공간과 생활 디자인은 어떻게 적응해왔을까?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긴 공사 기간을 거치며 궁금증은 더 커졌다. 처음 계획한 대로 되는 건 없었다. 철거 과정에서 드러나는 집 상태에 따라 구조가 계속 달라지면서 작업자들과 “집이 말을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집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나가는 듯 보였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바꾸는 게 아니라 서로 맞춰가는 것이다. 집의 목소리는 과거 이 공간에 살았던 숱한 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크리스털과 타조털 장식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아티코(Attico), 운동화는 나이키(Nike).

염색한 한지와 레진으로 완성한 손상우의 의자.

얼마 전 나는 아카이빙 북 작업을 위해 철거 전 사진을 정리하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외풍을 막기 위해 노부부가 창문 여기저기 붙여둔 박스와 빛바랜 종이에 적힌 글귀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언제 적인지 모를 화장품 광고 전단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보이지 않는 뿌리, 전통은 계속 되어진다.” 물론 전통의 시작점을 찾는 건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처럼 쓸데없는 짓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냇물처럼 일상은 흘러간다. 과거와 현재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그렇게 양쪽 둑을 갉아내며 흘러가다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천개의 고원>에서 지혜로운 철학자들은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라고 했다. 나는 꽃술이 그런 중간의 역할, 가능성이 오가는 매개의 공간이 되길 바란다. 이제 겨우 공사를 끝내고 막 문을 열었을 뿐, 갈 길이 멀다.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꽃술은 그저 여기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