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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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달인

2019-10-28T15:45:57+00:00 2019.11.06|

정유미, 공효진, 천우희, 서현진의 연기는 생활력이 강하다. 로맨틱 코미디마저 실화로 만든다.

정유미의 데뷔작을 찾아봤다. 정유미는 서울예대 영화과 선배인 김종관 감독의 단편 <사랑하는 소녀>와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촬영했다. <사랑하는 소녀>는 단역으로 출연했으니 <폴라로이드 작동법>이 데뷔작이라 할 만하다. 러닝타임은 6분 20초다. 화면은 내내 정유미의 얼굴만 비춘다. 내용은 정유미가 한 남성에게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우는 게 다지만, 그 얼굴 덕분에 짝사랑의 설렘이 화면을 뚫고 나온다. 16년이 지났어도 그 순수함이 정유미에게 있다. 대중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여러 상을 수상했고, 이후 정유미는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단역으로, <사랑니>에서 여고생 조인영으로 출연한다. 당시 인터뷰에서 “<사랑니>를 촬영하는 게 너무 좋아서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어두운 방에 스위치를 켠 듯 환하다. 이 얼굴을 나영석 피디도 보았고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에 캐스팅했을 것이다.

정유미에게는 삐삐 롱스타킹의 얼굴도 있다. 자기 세계에 사는 엉뚱한 소녀 같을 때가 있다. 보통 그 정수로 드라마 데뷔작 <케세라세라>를 꼽지만 단막극 <위대한 계춘빈>을 더 좋아한다. 계춘빈은 펜을 들고 다니며 ‘주차금지’를 ‘주책금지’로, ‘무단횡단금지’를 ‘무당횡단금지’로 고친다. 무당이 길을 건널 때마다 죄지은 기분이라며 인터뷰까지 하게 만드는 엉뚱한 춘빈의 오랜 취미는 짝사랑이다. 이를 눈치챈 상대가 원하는 걸 묻자 “그저 좋아할 뿐 바라는 게 없다”고 말한다. 춘빈의 세계에선 짝사랑의 목표가 상대의 관심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춘빈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정말 이상한 여자야”다. 덧붙인다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2020년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엉뚱함의 얼굴이 빛을 발할 것이다. 정유미는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귀신을 퇴치하는 보건교사로 나온다. ‘괴랄하다’로 표현되는 감독 이경미가 어떻게 이 얼굴을 끄집어낼지 기대된다.

무엇보다 정유미에겐 약자의 얼굴이 있다. 그의 연기는 ‘리얼리티’로 표현되곤 한다. 첨벙대지 않고 스며든다. 영화 저널리스트 김혜리는 정유미의 연기를 떨림으로 표현했다. “떨림은 요동과 달라서, 멀리 있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아도 옆 사람한테는 전이된다. (중략) 게다가 감정에 악센트와 악상기호를 넣어 유려하게 표현하는 유형이 아니라, 담백한 직선으로 ‘속엣것’을 표출하고 거기 형상을 부여하는 뒷일은 동료 배우와 연출자에게 맡기는 쪽에 가깝다.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데에는 확실히 불리한 특징이지만, 동시에 정유미와 짝이 된 많은 남자 배우들이 이완된 상태로 본인의 최상급 연기를 보여주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 정유미를 만났을 때, 자신을 이해한 기사라며 내게 읽어보길 권했다.) 그래서인지 정유미는 약자의 역할을 자주 맡는다. 거대한 재난에 휘말리는 약자가 아니라 친구, 이웃, 나의 그림자 시절을 연기한다. (<부산행>은 좀비물이지만 임산부인 성경에게 좀비를 사회로 대치해도 큰 차이 없다.)

한마디로 이 시대의 비정규직 얼굴을 고르라면 정유미 아닐까. <직장의 신>에서 비정규직 정주리는 이 드라마가 만화 같은 설정에도 그저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임을 상기시킨다. 최고는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세진이 면접장에서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부르며 춤추는 장면이다. 낄낄대는 면접관들에게 세진은 말한다. “가뜩이나 취직 안 돼 죽겠는데 사람을 가지고 놀아요? 아무리 약자라도 인간적이고 기본적인 대우를 해줘야 될 거 아니에요?” 누가 이 대사를 정유미만큼 착 붙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유미를 보며 위로받는다. 그가 약자 역할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의 연기에는 위로가 담겨 있다. 나는 선망 말고 위로를 주는 배우가 좋다. 10월에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역시 정유미는 이웃집 약자를 연기한다.

정유미는 멜로에서도 주도권을 쥔 적이 거의 없다. <옥희의 영화>에서 젊은 남자(이선균)가 아무도 술을 마셔주지 않자 마지막으로 전화하는 사람이 옥희이고, 그가 새벽까지 기다렸다고 받아주는 사람도 옥희다. 정유미는 ‘찌질이’들마저 보듬는 아량의 인물이다. 연민, 동정, 같은 약자라는 연대 의식이 얼굴로 빚어진다면 정유미 아닐까. 정유미의 반격이라곤 기껏해야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난 너 때문에 연애 불구야”라며 억지를 부리거나, <더 테이블>에서 지라시나 물어보는 옛 남자 친구에게 실소를 보낼 뿐이다. 가끔 정유미가 <로맨스가 필요해 2>처럼 트렌디 드라마를 했으면 좋겠다. 사랑의 ‘티키타카’나 하면서 짊어진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길. 물론 우리 약자들의 대리인으로 돌아와줘야 하지만. 김나랑(<보그> 피처 에디터)

연민. 배우 공효진을 생각할 때면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다. 영어 단어로 컴패션(Compassion)은 연민, 동정 외에도 숨은 뜻을 하나 더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되어 생각함.’ 만일 배우에게도 자격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효진은 자신의 캐릭터에 연민을 묻히는 배우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과 대사도 그를 거치면 호소력을 얻는다.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감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공효진의 이런 강점을 고스란히 전수하고 있는 캐릭터가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다. 공효진이 씩씩하게 굴면 굴수록 시청자는 약해진다. 그는 강하게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안쓰럽게 보인다는 걸 안다. 공효진은 자신의 장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공효진은 남들이 꺼릴 만한 캐릭터를 거침없이 맡아왔다. 누구에게나 호감인 ‘공블리’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이 말에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출연작을 한번 되짚어보면 금세 수긍하게 될 것이다. 형부를 사랑하는 처제 (<눈사람>), 에이즈에 걸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고맙습니다>), 유부남 동료 교사를 쫓아다니는 얼굴 빨간 교사(<미쓰 홍당무>), 아이를 유괴하는 조선족 보모 (<미씽: 사라진 여자>) 등. 공효진이 언제나 매끈하게 가공된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에만 머물렀던 건 아니다. 공효진은 예쁘지 않은 얼굴도 기꺼이 드러내는 배우다. 현란한 펌을 하고 생선 대가리를 뚝뚝 잘라내고(<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강렬한 호피 무늬 옷을 입고 조개구이집에서 사람들과 대판 싸우던(<고령화 가족>) 순간은 여전히 생생하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술집을 운영하며 동네 사람들의 편견과 싸우는 동백처럼, 공효진은 이 사회가 여성 배우에게 요구하는 안전함 대신 대담함으로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채웠다. 공효진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 제아무리 특수한 캐릭터라도 관객에게 어렵지 않게 흡수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기에 이런 모험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연민이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으니까. 이러한 연민의 힘은 공효진이 가진 동시대적 평범성으로도 연결된다. 스릴러 <도어락>은 공효진의 이런 면모를 잘 살린 영화다. 서울의 원룸에 혼자 사는 여성이 범죄의 타깃이 된다. 주인공 경민은 비정규직 은행원으로, 그를 둘러싼 사회적 울타리는 취약하다. 관객이 경민에게 얼마만큼 몰입하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성패는 갈린다. 1999년에 데뷔해 20년간 스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효진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고개를 돌리면 흔히 만날 것 같은 인물을 연기해도 이질감이 없다. 공효진은 경민이 출근해 은행 사람들과 아침 체조를 하는 무감한 얼굴만으로 관객을 영화에 접속시켜버린다. 관객과 인물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일상성. 이것은 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타고난 재능일 것이다.

공효진이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본 작품은 <싱글라이더>다. 이 영화에서 공효진은 남편 재훈(이병헌)을 한국에 두고 아들과 호주로 유학을 떠난 수진이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영화의 중심인물은 어디까지나 이병헌이며, 공효진은 그림자처럼 영화를 뒷받침한다. 분량에 제약이 있고, 표현 면에서는 절제된 연기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남편을 배신했고, 속내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캐릭터다. 재훈 입장에서 숨죽여 지켜보는 아내의 모습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까운 사람의 몰랐던 맨 얼굴이 드러났을 때의 서늘함. 이 영화를 본다면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던 공효진이 꽤 낯설어질 것이다.

공효진은 같은 자장 안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매번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나아갔다. 그는 사랑받았던 이미지를 간편하게 반복하지 않는다. 최근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가장 보통의 연애> 역시 이전보다 한발 더 현실에 밀착했다는 도전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공효진은 패셔니스타의 페르소나 또한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어렵지 않게 왔다 갔다 한다. 일상적인 연기를 하면서 이미지를 포장하지 않는 대신,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가의 워너비가 될 만큼 가공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 사이의 균형은 꽤 절묘하다.

10년 전이었나. 퍽 오래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공효진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처럼 익숙한 얼굴의 배우가 한번 실망시키기 시작하면 대중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쟤는 잘하다가 왜 별로지? 그다음 공효진의 영화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모순이지만 대중은 연기력이 공인된 배우의 연기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곤 한다.” 공효진의 끊임없는 변주는 엄중한 자기분석과 자기 객관화의 산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거의 모두가 공효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한국에서 지금 여자판 조커 역을 캐스팅한다면? 백번 생각해도 천우희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 속 광기 어린 악역 히스 레저보다는 최근작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 속 호아킨 피닉스에 가깝다. 고담시의 팍팍한 현실을 지극히 사실적인 방식으로 공감시켜, 악당 조커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소름 끼치도록 와닿게 만든다는 지점에서.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세간이 말하는 ‘생활 연기’를 달착지근하게 해냈지만 천우희의 연기가 언제 이런 ‘생활 연기’ 아닌 적이 있었나 싶다. 그 처지가 좀, 많이, 남달랐을 뿐이다. 첫 주연 데뷔한 그에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한공주>가 대표적이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실화를 다룬 이 작품에서 “숨소리, 발자국 소리, 바람 소리, 철 긁는 소음까지” 지독하게 되새긴 연기가 아니었다면 피해자의 참혹한 심정이 그토록 생생하게 가슴에 와 박힐 수 있었을까.

“후배지만 그만한 연기자가 어딨어요. 요번 영화에서도 봐요. 눈썹까지 밀고, 자칫하면 밑천 다 드러나는 역할이에요. 저라면 살짝 두려웠을 것 같아.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존경합니다.” 연기 경력 30년의 한석규는 올해 초 영화 <우상>에서 만난 그에 대해 이렇게 감탄했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과 재회한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련화는 살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연변 출신 여자다. 장애가 있는 남편은 신혼여행 중 뺑소니 사고로 죽고 자신도 납치·감금당해, 얼굴에 칭칭 감은 청테이프에 눈썹까지 죄 뽑혔다. 극단적인 설정을 쏟아부은 탓에 영화 자체의 평가는 갈렸지만 그나마 매 장면을 땅에 발붙인 건 천우희 ‘치트키’ 덕이었다.

아몬드형 큰 눈에 작은 코, 도톰한 입술이 친근하고 앳된 인상을 주지만, 산처럼 솟은 눈썹과 광대뼈, 여윈 볼을 잇는 날카로운 턱선은 상대로 하여금 긴장을 풀 수 없게 한다. 표정을 짓기 전엔 속이 절대 들여다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이를 백지 도화지 삼아, 미스터리 영화 <곡성>에선 연쇄살인이 일어난 동네의 정체불명 목격자 ‘무명’을 그려냈다.

데뷔 초엔 문소리, 전도연에 비견했던 그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 속 섹스하는 여고생, <써니>의 본드 부는 여고생, <우아한 거짓말>에선 가정 폭력에서 여동생을 지켜야 하는 여고생 등 20대가 되고도 한참 동안 작품에선 교복을 벗지 못한 그는 늘 길목에서 마주칠 듯한 친근한 얼굴로, 안전지대에 머무르고픈 관객의 마음을 꼬챙이처럼 꿰뚫어 자신의 상황 속에 끌어다 앉혔다.

그가 연기한 여자들은 20대가 되고도 대형 마트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부당 해고는 철회돼야 한다”고 울부짖거나(영화 <카트>), 그 자신이, 부당 해고 당한 자들의 공석을 가로챈 계약직이 되어 눈총 받았다(tvN 드라마 <아르곤>). 그럴 때 그의 ‘생활 연기’는 ‘일상’에 대한 우리의 시야까지 확장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 매일 자고 일어나면 외모가 바뀌는 남자 우진은 사랑하는 여인 이수(한효주)에게 이런 믿기 힘든 비밀을 어렵게 털어놓는다. 우진 역으로 출연한 123명의 배우 중 천우희가 하필 그 고백의 중책을 맡게 된 게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뢰감을 주는 음색도 한몫했다. 이 재능이 가장 빛을 발한 작품이 내레이션을 겸한 <멜로가 체질>이다. 그가 맡은 신인 드라마 작가 임진주는 서른이 된 동갑내기 여자 친구들과 동거를 시작한다. 갓 사귀기 시작한 드라마 피디 범수(안재홍)와 방귀 튼 날마저 달콤한 연애사, 그가 거실 바닥에 누운 채로 족발 안주에 소주를 홀짝이며 “부위별로 살찌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뒹구는 일상사가 유쾌하다. “항상 임무처럼 주어진 힘들고 강한 캐릭터를 도맡으며, 코미디에 갈증이 많았다”는 그다. 자칭 “틀린 말은 하지 않는 돌아이” 진주 캐릭터는 천우희를 완전히 ‘봉인 해제’시켰다. 첫 키스 때 한쪽 다리를 드는 ‘로코 퀸’의 공식 따윈 갖다 버렸다. ‘밀당’ 시절 범수 피디와 앉은자리에서 생맥주 열두 잔을 ‘순삭’하고 ‘소맥’을 말아 먹기 시작할 때, 홍조 띤 미간을 찡긋하던 주당다운 미소라니. 가족,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먹방이 체질인 천우희의 진실의 표정”이란다. 이 꾸밈없는 천혜의 매력으로, 천우희는 스스로를 완전히 재발견했다.

무엇보다 감기 같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이들의 나날이 부러울 만큼 따뜻하게 새겨질 수 있었던 건 적어도 5할 이상 그의 내레이션의 공이다. 죽은 애인의 유령을 보는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전여빈), 이혼하고 여덟 살 아들을 혼자 키우는 게 힘에 부치는 워킹맘 한주(한지은)의 목소리였다면 드라마 장르가 바뀌지 않았을까. 최악의 순간에도 긍정이 체질인 진주의 중저음은 퇴근길 맥주 한잔처럼 호들갑스럽지 않게 친구들의 삶의 무게까지 위로하며 의연하게 내일로 나아간다.

9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마왕의 딸 이리샤>에서 마법의 공주 이리샤 역으로 처음 목소리 더빙에 도전한 그는 독립 영화 <메기>에선 무려 전지적 메기 시점 내레이션에 나섰다. 남녀의 성관계 엑스레이 사진이 발견되며 병원이 발칵 뒤집히는 이 소동극을, 병원 어항에서 지켜보는 메기는 침착하게 사태의 본질을 꿰뚫으며 인간들을 연민하는 지혜로운 존재다. 이 영화로 장편 데뷔한 이옥섭 감독은 “단편 <걸스온탑>에서 천우희는 선인장한테 말할 때조차도 따뜻했다. 동갑인데 언니 같던 그가 내게 준 위로를 관객한테도 주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10월 개봉 영화 <버티고>도 있다. 하정우·공효진의 로맨틱 코미디 <러브픽션>을 연출한 전계수 감독의 새 멜로다. 천우희는 고층 빌딩에서 외줄에 의지한 채 일하는 ‘로프공’과 운명적으로 만난 위태로운 직장인 서영 역으로 주연에 나섰다.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눈물이 펑펑 흘렀다. 힘들었던 마음을 힐링했다”는 그의 말은 곧 영화를 본 관객들의 것이 될 터. 그의 ‘생활 연기’는 오늘도 부지런히 미지의 일상을 개척하고 있다. 나원정(<중앙일보> 기자)

배우 서현진의 ‘생활 연기’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새삼 궁금해졌다. 도대체 ‘생활 연기’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경우에 ‘생활 연기’라고 말하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생활’이라고 부를 만한 건 무엇이고 그것은 ‘생활’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 경우와는 어떻게 다른가. 언제부터인가 무리 없이 통용되고 있는 ‘생활 연기’라는 말을 할 때면 어쩌면 우리의 머릿속에는 이미 전형적인 몇몇 이미지가 그려질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이런 것. 장르물보다는 드라마, 그중에서도 핍진성이 강한 리얼리즘 계열의 이야기. 집(가족), 직장(노동)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절대 우아할 수 없는 캐릭터. 지질하거나 발광하며 자기 밑바닥을 드러내고 허례와 허식을 벗어던진 ‘날것’의 일상사와 생활사가 캐릭터의 세부를 만드는 방식 등등.

그럼 장르물은 어떤가. 이를테면 SF물. 앞선 드라마의 세계와 비교하면 당장, 이 SF적 세계가 우리의 ‘생활’을 들었다 놨다 하며 들고 파고 쑤실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와 극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고 심리적 거리감도 확실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이 SF적 세계와 현실을 명확히 갈라놓으며 얼마간 안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완벽히 극화된 드라마 세계에서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발견한다면, 그때의 드라마야말로 어떤 장르물보다도 이미지의 마법과 환상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세계가 아닐까. 우리는 드라마 속 ‘생활’과 ‘생활 연기’에 마음을 내주고 현혹된다. 심리적 거리감은 허물어지고 동요하고 동화되며 울고 웃는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적, 서사적 체험이 아닐까.

이런 극적 환상을 집약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게 드라마, 그중에서도 멜로, 특히나 무겁지만은 않은 로맨스물일 것이다. 사랑과 생활사를 맞붙여놓은 로맨스물에서 사랑의 이벤트성은 한층 극적으로 보일 것이고 ‘날것’의 생활사는 더더욱 우리 가까이 있는 듯하다. 배우 서현진의 ‘생활 연기’의 놀라운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로맨스물에서 서현진은 사랑의 환상과 생활사라는 이미지의 환상 사이를 기막히게 오간다. 드라마 <또 오해영>의 오해영은 그런 서현진 연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캐릭터다. 동명의 친구 오해영(전혜빈) 때문에 자꾸 인생이 꼬이는 해영. 드라마는 해영과 집(가족), 직장(노동), 연애(사랑)의 관계를 촘촘히 그려나가며 해영이 느끼는 열등감과 반감을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발산한다. 날것 그대로의 해영의 모습은 도경(에릭)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해영은 “겁 없이 밀고 들어”가는 저돌적인 에너지를 보인다. 물론, 로맨스물인 만큼 해영은 충분히 사랑스럽고 귀염성 있으며 허당의 기미마저 느껴진다. 귀염성부터 저돌성까지라는 이 너른 감정의 스펙트럼을 서현진은 똑 부러지는 발음과 또렷한 발성, 단어의 강약 조율과 문장 내 리듬을 만들어가는 탁월한 대사 전달력으로 시청자에게 정확하게 도착하게끔 만든다. 한편 서현진은 인물의 몸짓이나 눈짓을 아주 자세히 나눠가며 표현해 인물의 심리 상태를 계속 짐작하고 상상하고 해석해보게끔 유도한다. 치밀하게 계획된 제스처로 인물의 감정을 풍부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사와 몸짓의 이 리드미컬한 운용은 서현진이 드라마를 정확히 이해하고 인물과 서사를 장악했다는 확증이기도 하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서현진이 연기한 의사 윤서정 역시 서현진의 정확한 대사, 감정 전달력과 섬세한 표현력이 균형을 이룬 경우다. 의사로서의 직업윤리와 원칙을 견지해가는 서정은 때론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하게 소신을 발언하고 때론 거친 욕설을 섞어가며 상대방에게 일침을 가한다. 서정의 우직한 뚝심과 통쾌한 발설 사이의 균형이 서정을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로 보이게 하면서도 그녀에게 적절한 환상과 이상을 투영해보게끔 한다. 드라마 <사랑의 온도>의 이현수는 서현진 특유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 대사 운용이 빛난 경우다. 서현진은 한 문장의 대사에서도 입말의 강세를 어디에 줄지를 계산하고 전체 드라마 안에서 완급 조절을 노련하고 영리하게 해나간다. 그런 힘 조절이 때론 극 중에서 사랑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긴장감으로 작동하고 때론 이 인물이 정말 ‘살아 있는 듯하다’고, ‘있을 법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서현진은 핍진성과 환상이라는 로맨스 드라마의 필수 요소를 제대로 독해하고 정확히 표현한다. 드라마 속 생활사에 생동감을, 사랑이라는 낭만에 활력을 불어넣는 서현진 연기의 정공법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정지혜(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