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잔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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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잔다르크

2019-10-28T15:53:34+00:00 2019.11.07|

노벨평화상 화제의 후보였던 16세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그 앞에 고개를 들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우리 성인들은 지금까지 툰베리 세대의 삶을 도둑질해 삶을 화려하게 불태워왔다. 기후 문제를 ‘기후 정의’의 문제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다.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에반 리안(Evan Lian)이 <뉴요커>를 위해 그린 그레타 툰베리의 모습. 그레타가 즐겨 하는 길게 땋은 머리, 시위와 연설을 할 때 나오는 특유의 강한 표정을 담아냈다. 작은 체구로 지구를 힘겹게 받치는 모습은 우리에게 각성을 요구한다.

“작은 일부터 해봐요.” 기후 위기가 코앞에 닥쳤다고 다급하게 외치는 글을 썼더니 이런 댓글이 붙었다. 텀블러, 에코백으로 대표되는 착한 개인들의 녹색 소비 운동 정도로는 지금의 기후 위기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글이었는데 말이다. 선한 의도에서 쓴 댓글이 분명했지만, 그 태평한 어조에 절망적인 기분까지 들었다. 친구는 집 안에 넘치는 텀블러, 에코백이 오히려 환경을 파괴한다고 농담하곤 한다. 사람들은 모두 기후 위기를 걱정하는 체하지만, 굴러다니는 텀블러를 무심히 보듯 누구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각자 생활 속에서 작은 일부터 실천하자’는 착하고 계몽적인 훈화를 믿으면서 매일 텀블러와 에코백으로 얕은 속죄 의식을 치른다.

사람들이 기후 위기에 대해 말로 떠드는 것과 달리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날씨’와 ‘기후’를 자주 혼동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덥다가도 춥고 늘 변화무쌍한 게 날씨라고 여기고 있으므로 기후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는 말을 잘 믿지 못한다. 기후가 날씨처럼 마구 변하기라도 하듯 상상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사는 우리는 무더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즈음이면 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복을 누리기에 기후변화를 더욱 실감하지 못한다.

기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을 그저 미래의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SF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인용해야 할까? 기후 재앙이 이미 와 있는 미래라고 한들 여전히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므로, 이제부터라도 에너지 효율을 높이거나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믿는다. 수소차가 문제를 해결해줄까? 그런데 이런 헛된 믿음을 버리고 거리로 뛰쳐나온 소녀가 있다.

2018년 8월 어느 뜨거운 금요일, 스웨덴의 한 소녀가 학교 대신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를 외치며 매주 금요일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켰고, 우리들의 꿈과 미래 세대에게 주어진 시간을 도둑질하고 있습니다. 우린 대멸종의 시작점에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오로지 돈과 경제성장 같은 동화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소녀의 외침은 그날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가 133개국 청소년 160만 명이 동참하는 캠페인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16세 소녀의 이름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소녀는 특정 분야에 대한 집중력을 증세로 하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한다.

툰베리는 지난 9월 비행기 타기를 거부하고 무동력 요트로 대서양을 건너 유엔 기후정상회의가 예정된 뉴욕으로 향한다. 이 소녀가 유엔에서 한 연설을 꼭 들어보기를 권한다. “정말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행동하지 않는 거라면, 여러분은 악마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 가냘픈 소녀의 외침에 가슴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정말 희망이 없다. 그러나 사악한 인간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트럼프, 마크롱 등이 내뱉은 멍청한 코멘트로 모자랐는지 폭스뉴스의 한 패널은 툰베리를 두고 “부모와 국제 좌파 진영에 착취당하는, 정신 질환을 앓는 스웨덴 아이”라고 부르면서, “기후변화가 아닌 기후 히스테리에 불과하다”는 막말을 쏟아냈다. 과연 누가 지금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것인가?

툰베리는 어린 나이에도 기후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본다. 기후변화를 ‘돈’, ‘경제성장’, ‘정의’의 문제로 보는 것부터 그러하다. 오늘의 기후 위기는 한 사회 안에서든 세계 차원에서든 본질적으로 자본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 끝없는 자원 착취, 에너지 불평등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후 문제는 불평등과 불공정에서 기인한 것이며 그 자체로도 불평등하다. 왜 그럴까?

화석연료와 깨끗한 물과 울창한 숲은 원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자연의 선물이다. 하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은 소수에게 주어진다. 그것들은 돈과 능력을 가진 기업, 자본, 대농장주에게 우선 배분된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들이 그것들을 이용해 우리 모두를 위한 경제성장을 이뤄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생산한 대량의 상품은 다시 우리의 소비를 강요한다. 물론 이런 상품을 소비하는 기회 역시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거기서 남는 온실가스 등의 에너지 부산물과 소비의 찌꺼기는 우리 모두가 떠맡아야 한다. 아니다, 가장 힘없고 약한 가장자리 사람들에게 먼저 그 폐해가 돌아간다.

너무 선동적인 이야기일까?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던 할머니들을 생각해보자. 아니면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라고 하는 후쿠시마 주민들을 생각해봐도 좋겠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전력의 가장 큰 부분은 화력발전소에서 생산한다. 화력발전소는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으로 꼽히거니와, 주로 바닷가 낙후된 지역에 자리하고 있고, 거기서 생산된 전기가 시골의 고압선을 타고 대도시와 공장 지대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누가 혜택을 보고 누가 피해를 보는가. 우리는 이런 에너지로 만들어진 소비 상품을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싸게 구입하고, 그 부산물까지 다 떠안는다. 전기와 에너지만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드는 도로 건설과 자동차 산업은 성능 좋은 승용차로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 이용권을 준다. 그로 인해 망가진 산하와 공기는 원래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인은 자본 또는 기업만 편들고 이 모든 환경 문제를 감추고 방치한다. ‘경제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이런 현상은 국제적으로도 벌어진다. 선진국은 아직 굴뚝 산업 단계에 머물러 있는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이 기후 문제의 주범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쓸 탄소 예산이 이렇게 부족해진 것은 선진국이 그동안 저개발국의 자원을 가지고 흥청망청 온실가스를 배출한 탓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남아 있는 탄소 예산을 ‘평등하게’ 나누자고 한다. 한국은 이 싸움의 어디쯤에 있을까? 놀라지 마라. 1인당 탄소 배출량으로 따진 ‘기후 악당’ 국가 4위에 한국이 올라 있다.

더 나아가 기후 문제는 세대와 계층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성인들은 지금까지 툰베리 세대의 삶을 도둑질해 우리의 삶을 화려하게 불태워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화력발전소의 송전선과 펑펑 뚫린 도로망을 통해 가장 낙후된 곳의 피를 빨대처럼 빨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기후 문제를 ‘기후 정의’의 문제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은 기후 문제를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본다. 시민의 폭넓은 이해를 대변하는 정부를 통해 소수를 위한 성장보다는 다중의 행복을 우선시할 수 있을 때만 기후 문제에도 정의롭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느리고 평화로운 민주적 과정으로 10년 후 닥쳐올 1.5도 기후 상승을 막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지구 기온이 1.5도 상승하는 순간부터는 동토의 메탄이 풀려 나오고 사막화가 가속화되는 등 지구 자체의 피드백이 일어나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기후 재앙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급진적인 생태 운동가들은 심지어 환경 독재를 주장하고, 화력발전 대신 원자력발전을 채택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플라스틱을 줄이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고 텀블러를 쓰고, 그렇게 작은 일이나 실천해야 할까? 기후 위기를 우리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부터 정치가 꾸며낸 허구 아닐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은 툰베리의 얘기를 들으면 알 수 있다. 16세 소녀가 감행하는 정치적 행동, 거기에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