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로렌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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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로렌의 질서

2019-10-31T19:41:05+00:00 2019.11.15|

HBO 신작 다큐멘터리가 이 전설적 디자이너가  공들여 만든 세상의 이면을 엿보며 그 안의 희로애락을 보여준다.

랄프 로렌(Ralph Lauren)이 인생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바꾸고 늘 꿈꿔오던 영화배우가 되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사랑해 마지않는 뉴욕 양키스의 내야수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로렌이 선택할 수 있다면, 그처럼 1939년에 태어난 배트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여전히 배트맨이 좋아요.” 로렌이 브롱크스 특유의 깊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담시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꿈을 꾸죠.” 물론 로렌은 배트맨이 되지 않았다. 그 자리는 브루스 웨인에게 넘어갔다. 대신 어느새 50년 넘게 이어온 커리어를 통해 가장 상징적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되었고, 그 자체로 열망이며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브랜드이자 미학으로 우뚝 섰다.

로렌이 진하게 끼쳐온 영향은 11월 12일 HBO에서 방영 예정인 수잔 레이시(Susan Lacy)가 감독과 제작을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베리 랄프(Very Ralph)>에서 확인되고 있다. 수잔은 <American Masters>를 비롯해 제인 폰다와 스티븐 스필버그에 관한 최근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상을 탄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녀가 이번에 맡은 <베리 랄프>는 매우 매력적인 역사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약간 역설적 측면을 지닌다. 자기 스스로 외부의 시험이 다소 불편하다고 인정한 한 남자에 대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쓰게 하는 것 혹은 당신에 관한 영화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로렌이 인정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의 집, 아늑한 응접실에 놓인 긴 화이트 카우치에 앉았다. 그와 55년간 결혼 생활 중인 아내 리키가 함께 살고 있는 롱아일랜드의 몬턱에 자리한 집은 이스트 엔드의 다른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부심을 한껏 표출한 으리으리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에 파묻혀 낮게 자리한 40년대 목조 주택은 예술가들이 창의적으로 재충전하고 싶은 욕망으로 한껏 들끓을 때 지은 소박한 시골집 같았다. “이 집에 들어와본 사람들은 굉장히 맘에 들어 하죠. 편하잖아요.” 10월에 여든 살이 된 디자이너는 화이트 셔츠와 반바지를 매치해 갈색 피부가 더 부각되며 건강해 보였다. 게다가 상자에서 방금 꺼낸 듯한 러닝화를 신어 5km 정도는 거뜬히 뛸 준비가 된 듯 보였다. 로렌은 수년간 다큐멘터리 제안을 거절해왔다고 전했다. 심지어 미완성의 자서전도 보류시켰다. 그랬던 그가 회사 창립 50주년이 다가온다는 생각을 하던 작년 즈음, 당시 HBO의 CEO 리처드 플레플러가 살살 권하는 바람에 레이시 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아주 똑똑하면서도 정말 분명한 사람이더라고요. ‘제가 그 다큐멘터리를 찍을 거예요’라고 말하더군요.”

직업적으로 개인적인 이미지를 하나하나 공들여 만들어온 것으로 유명하던 남자가 그답지 않게 항복하고 말았다. 로렌은 몬턱, 뉴욕 사무실, 콜로라도의 광활한 가족 목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을 촬영하도록 거의 허락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렌은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자신에게 통제권이 없는 어떤 것도 만들어본 적이 없었죠.” 레이시가 말했다. “그가 저를 신뢰했던 것 같아요. 이 영화를 굉장히 감정적으로 받아들였어요. 영화를 본 후 저를 쳐다보면서 가장 먼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저는 결코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큐멘터리는 거의 3년간 제작되었으며, 예상대로 스타들의 코멘트도 다채롭게 담겨 있다. 오스카 수상자, 패션 에디터, 비평가와 더불어 캘빈 클라인과 칼 라거펠트 같은 동료 디자이너, 심지어 대통령이 될 뻔한 전직 국무장관까지도 코멘트를 보탰다. 랄프 로렌은 넥타이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이 그의 넥타이 뒷면에 백화점 상표를 붙이자고 제안하자 그 백화점에서 판매를 거절하면서 전설적인 맞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이처럼 전설적인 독학 디자이너 탄생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그 브랜드를 전례 없던 색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그냥 제품을 판매하진 않았다.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교한 마케팅 캠페인을 통해 한 사람이 하나의 브랜드’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너무 진부하게 들리지만, 당시 이것은 굉장히 급진적인 것이었다. “천재였어요! 천재가 따로 없었죠.” 로렌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는 패션계의 몹시 과장하는 습관에서 한발 물러선 모습이었다). “제가 하는 일을 무척 좋아했죠.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하고 있었죠. 다른 여자나 남자의 구미에 맞추지 않았어요. 저 자신의 구미에 맞췄죠.”

이런 것을 바탕으로 그는 유행을 좇는 덫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직감에 충실함으로써 세월의 흐름에 맞춰갔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게 정말 좋아요.” 로렌이 설명했다. “나이 들수록 더 나아지는 것들이 늘 좋았죠.” <베리 랄프>는 고전 영화, 빈티지 자동차,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스타일 개척자 등 로렌이 지닌 영감의 뿌리를 살펴보았다. “랄프에게는 연애 감정 같은 것이 있어요.” 베라 왕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 브랜드를 론칭하기 전 80년대 후반에 로렌의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했다. “그가 해온 다양한 일을 보면 삶에 대해 연애 감정 같은 것이 있는 게 분명하죠.”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베리 랄프>는 패션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가족에 관한 것이다. 랄프와 리키는 젊어서 결혼했고 그들의 자녀 앤드류, 데이비드, 딜런과도 가깝게 지낸다. 모두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했다. 그들은 훈훈하게 추억을 나눴고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가족 영상도 담겨 있다. 이 영상 속에서 로렌은 아내와 자녀들을 마냥 사랑하는 장난기 많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가정에서 촬영한 영상을 모두 보여달라고 부탁했죠.” 레이시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렌이 앤드류와 춤을 추고 끊임없이 움직였죠. 제임스 본드처럼 굴기도 하고, 시나트라가 된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죠. 그 가족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그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는 장면이었죠.”

“그 가족과 함께 어울리면 아주 즐거워요.” 디자이너 톰 브라운이 로렌 가족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그냥 평범한 가족이에요. 정말 평범할 수 없는 가족에게 평범하다고 이야기하니 무척 놀랍죠.” 로렌은 가족이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는 한때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가 살던 옆집을 대가족이 지낼 비치 하우스로 마련해두었다. 그렇지만 다른 가족처럼 그의 가족도 곡절을 겪으며 산다고 강조했다. 사업 측면도 마찬가지였다. 회사 설립 초기에 재정 압박을 간신히 모면했고 1997년 주식 상장으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정밀 조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죠. 주가가 상승하고 나면 갑자기 저는 뛰어난 인물이 돼요. 그러다 주가가 내려가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나이가 너무 들었어’라는 얘기가 나오죠. 그런 것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저 역시 살아가면서 겪는 일이랍니다.” 그런 불안은 사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다루지 않은 에피소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87년 귓속에서 지속적인 울림이 들리던 그는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당시 그에게는 어린 세 자녀가 있었고 한창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죠. 그리고 누군가가 제게 ‘뇌종양이래요’라고 말해주었어요.” 당시 그는 영화를 보는 건가 싶었다고 말했다. “믿기지가 않았어요.” 다행히 양성 종양이었고 수술로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아직도 로렌은 말한다. “정말 제 인생 최악의 시기였어요.” 그는 그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고 ‘난 혼자야. 난 스타가 아니야. 난 혼자야!’라는 생각에 시달렸다.

복귀한 로렌은 21세기에 들어선 후에도 두려움 없이 회사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가 자신처럼 브롱크스 출신이자 흑인 모델인 타이슨 벡포드 같은 새 얼굴로 시야를 확대한 것을 시간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벡포드의 기용은 사립학교 교복 같은 프레피 월스트리트 스타일이 지닌 귀족적이며 백인에게 어울린다는 클리셰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랄프 로렌 광고에 출연했어요. 그것은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죠.” 벡포드가 말했다. “그 일이 제 삶을 바꿔놓았죠.”

오늘날 로렌은 패션계에 주어진 또 다른 임무를 알고 있다. 환경적인 지속 가능성. 그래서 이제는 재활용 플라스틱병으로 만든 ‘Earth Polo’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업은 더 젊은 고객층에게 다가가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며, 로렌은 신세대들이 품질과 책임을 다하는 브랜드를 찾는 방식에 감탄을 자아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세계의 모습입니다. 젊은이들이 그것을 원하잖아요. 나이 든 사람들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요!” 로렌은 여전히 바쁘고 의욕에 불타고 있다. 레이시가 말했다. “로렌은 여전히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어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죠. 정말 그렇게 매일 일하고 있다니까요.”

“뭔가 말할 게 있어서 매일 출근하는 거예요. 제가 뭔가 할 말 없다고 느낄 때 저는 일을 잘할 수 없죠. 그러면 저는 그냥 가야 해요. 그것이 제 안에서 도전 의식을 북돋우죠.” 그는 운이 좋았다. 기도 주문처럼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내 꿈을 실현할 수 있었고, 그것은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의 영웅 배트맨은 범죄와 싸우고 고담시를 구했을지 모르지만 외로운 삶을 살았다. <베리 랄프>가 분명히 보여주듯, 랄프 로렌은 다른 종류의 모험을 시작했고, 문화적 흔적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사랑에 둘러싸여 외롭지 않다. 나는 랄프 로렌이 배트맨을 이겼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