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가슴, 나쁜 가슴, 이상한 가슴 (1)

Beauty

좋은 가슴, 나쁜 가슴, 이상한 가슴 (1)

2019-12-15T16:34:23+00:00 2019.12.18|

인간의 신체 중에 이토록 우리 사회와 인지 기능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부위가 또 있을까. AI가 인간을 대체하네 마네 하는 세상에 아직도 그놈의 가슴 얘기를 해야 한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과연 10년 안에 여성의 가슴과 섹슈얼리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 정말 브라렛과 니플 패치와 노브라가 여성해방을 가져올까? 어쩌면. 1997년 8월 <뉴욕 타임스>에는 ‘패션으로서의 브라 끈,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심지어 서양에서조차 돌체앤가바나 런웨이 모델들을 흉내 내 티셔츠 밖으로 브라 끈을 노출했다간 엄마한테 등짝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단 소리다. 요즘도 ‘투명 스트랩’ 같은 알량한 아이템으로 ‘내 속옷이 여기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지 말라’ 정신을 사수하는 여자들이 있지만 솔직히 브레인워싱이 어지간히 심하게 된 ‘유교걸’이 아닌 이상 브라 끈 노출 정도를 신경 쓰지는 않는다. 그리 생각하면 패션이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화해온 것 같고, 우리의 미래는 창창할 것 같다. 언젠가는 여자가 노브라에 흰 티셔츠를 입고 출근해도 미래에서 이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보낸 터미네이터, 노출증 환자, 관종, 섹스 중독자 취급받지 않는 날도 오겠지. 남자들이 그 티셔츠 위로 돌출된 젖꼭지에서 눈을 못 떼서 안절부절못하는 대신 샌들 신은 발가락 보듯 덤덤해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과연 인간 사회가 합리적인 방향으로만 진화해왔나?

1900년대 사진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남긴 조선 풍속화에는 저고리 아래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자들이 많이 나온다. 기생이 아니라 필부들이 밭일하고 애 키우고 빨래하는 와중에 포착된 모습이다. 거기에는 미개한 동양의 작은 나라를 신기해하는 시선이 담겼다. 당시 여자들이 가슴을 드러낸 게 ‘아들을 낳아 여성으로서 의무를 다했다’는 표시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니 그때가 오히려 좋았다고 한탄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조상님들의 가슴은 편안했을 거다. 그 후 100년간 세상이 어떻게 변했나? 실로 <베테랑>의 명대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 여성의 가슴은 문젯거리가 되었다. 야하게 보지 않으면 야하지 않은데, 야하게 보니까 야해지는 거, 그 일이 우리의 신체에 일어났다. 마음 아프지만 설리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영 페미니스트들이 탈코르셋을 선언하고, 속옷 회사가 브라렛 매출 신장에 환호하고, 패션지가 와이어와 푸시업과 볼륨 패드에 앞다퉈 사망 선고를 내린 지난 몇 년 동안에도, 걸핏하면 ‘걔가 오늘도 브라를 안 하고 사진을 찍어 올렸답니다’라는 사이버불링 선동 기사가 포털 뉴스를 장식했다. 한국 사회가 그런 자유로운 영혼을 보유할 자격이 없어서 설리는 우리를 떠났고, 어느 언론사는 부고에서조차 그를 ‘노브라의 아이콘’이라 명명했다. 남겨진 우리는 그가 시작한 자리로 되돌아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내게는 내 몸이 원하는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것들을 실천에 옮길 용기가 있는가. 누가 동참할 것인가.’ 여성에게서 가장 돌출된 장기라는 이유로 가슴은 여전히 핍박받고 있다. 섹슈얼리티의 상징이자 드러내선 안 될 금기로, 열망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누군가는 클수록 좋다 하고 누군가는 그 장기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짐작만 하게 해도 발작하는 기관으로, 가슴은 거기에 존재한다.